클레멘스 5세 교황 Clemens 5.

 227. 클레멘스 5세 교황  Clemens Ⅴ.  1305~1314

교황 베네딕토 11세 서거 후에 소집되었던 봉쇄 교황 선거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추기경단은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과 이탈리아에 우호적인 진영 – 이 편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추종자들이었다 – 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아울러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체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콜론나 가문 출신의 추기경들은 봉쇄 교황 선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교황 선거는 11개월을 허송세월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의 추기경들은 자신들이 추대하였던 후보자 – 보르도(Bordeaux)의 대주교 베르트랑(Bertrand de Got) -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베르트랑 대주교는 1305년 6월 5일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교황 선거는 교황의 아비뇽 유배와 서방 교회의 분열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맏형은 리옹의 대주교로 재직하던 중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알바노의 주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교황은 곧 프랑스 국광의 수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로마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그사이 그는 추기경들을 자신의 교황 착좌식에 참석하도록 리옹으로 초대하였다. 1305년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착좌식을 치렀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원래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길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의 압력은 점점 더 거세게 다가왔고, 교황은 이 압력을 견대어 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에 정주하게 되었고, 6명에 이르는 그의 후임자들도 아비뇽에 정주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교황의 70년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국왕에 종속되어 있다는 징후는 1305년에 있었던 추기경 서입에서 입증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9명의 프랑스인을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그 중에 4명은 교황의 조카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영국인이었다. 이후 계속된 추기경의 서임에 있어서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늘어났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의 압력에 못 이겨 전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단죄하는 소송을 진행시켰다. 프랑스의 국왕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반포하였던 두 칙서 Clericis laicosUnam Sanctam을 거부하였다. 소송은 시작되었고 매우 불충분한 증언의 심문을 거친 후 중지되었다. 왜냐하면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의 국왕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철회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와 관련해서도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의 국왕은 이 이권에 눈독을 들였다. 1311년 이 수도회의 해체 문제를 다루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에서 공의회가 소집되기도 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수도회의 해체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교부들은 수도회의 해체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교부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고소의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3년 3월 22일 두 번째 회기 중 이 수도회의 해체를 선언하였으나, 교부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비엔나 공의회가 다룬 또 다른 의제는 십자군 출정 문제였다. 십자군의 출정을 위해 6년간 십일조의 세금을 납부한다고 결의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 결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울러 공의회는 교회의 개혁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몇 가지 회칙을 반포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4년 4월 20일 서거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동시대인들은 교황권이 이처럼 무시당한 때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엿고, 교황권이 프랑스의 국왕에게 종속됨으로써 교회의 올바른 통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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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227. 클레멘스 5세 교황  Clemens Ⅴ.  1305~1314

    교황 베네딕토 11세 서거 후에 소집되었던 봉쇄 교황 선거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추기경단은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과 이탈리아에 우호적인 진영 – 이 편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추종자들이었다 – 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아울러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체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콜론나 가문 출신의 추기경들은 봉쇄 교황 선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교황 선거는 11개월을 허송세월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의 추기경들은 자신들이 추대하였던 후보자 – 보르도(Bordeaux)의 대주교 베르트랑(Bertrand de Got) -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베르트랑 대주교는 1305년 6월 5일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교황 선거는 교황의 아비뇽 유배와 서방 교회의 분열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맏형은 리옹의 대주교로 재직하던 중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알바노의 주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교황은 곧 프랑스 국광의 수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로마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그사이 그는 추기경들을 자신의 교황 착좌식에 참석하도록 리옹으로 초대하였다. 1305년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착좌식을 치렀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원래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길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의 압력은 점점 더 거세게 다가왔고, 교황은 이 압력을 견대어 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에 정주하게 되었고, 6명에 이르는 그의 후임자들도 아비뇽에 정주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교황의 70년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국왕에 종속되어 있다는 징후는 1305년에 있었던 추기경 서입에서 입증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9명의 프랑스인을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그 중에 4명은 교황의 조카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영국인이었다. 이후 계속된 추기경의 서임에 있어서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늘어났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의 압력에 못 이겨 전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단죄하는 소송을 진행시켰다. 프랑스의 국왕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반포하였던 두 칙서 Clericis laicosUnam Sanctam을 거부하였다. 소송은 시작되었고 매우 불충분한 증언의 심문을 거친 후 중지되었다. 왜냐하면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의 국왕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철회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와 관련해서도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의 국왕은 이 이권에 눈독을 들였다. 1311년 이 수도회의 해체 문제를 다루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에서 공의회가 소집되기도 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수도회의 해체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교부들은 수도회의 해체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교부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고소의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3년 3월 22일 두 번째 회기 중 이 수도회의 해체를 선언하였으나, 교부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비엔나 공의회가 다룬 또 다른 의제는 십자군 출정 문제였다. 십자군의 출정을 위해 6년간 십일조의 세금을 납부한다고 결의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 결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울러 공의회는 교회의 개혁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몇 가지 회칙을 반포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4년 4월 20일 서거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동시대인들은 교황권이 이처럼 무시당한 때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엿고, 교황권이 프랑스의 국왕에게 종속됨으로써 교회의 올바른 통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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