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2세 교황 Pius 12.

 299. 비오 12세 교황 Pius Ⅻ. 1939~1958

교황 비오 11세 서거 후 1939년 3월 2일 에우제니오(Eugenio Pacelli)가 교황 –  비오 12세 – 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867년 3월 2일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1901년 이후 교황청의 국무성에서 활동하다 1917년 뮌헨 주재 교황 대사에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베를린 주재 교황 대사에 임명되었다. 뮌헨과 베를린에서 체류하면서 교황 비오 12세는 독일의 생활, 문화 그리고 교회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교황 비오 12세의 선거 표어는 ꡒ평화란 정의의 업적이다ꡓ였다. 교항 비오 12세는 3월 12일 교황좌에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협을 받고 있는 평화를 다시금 회복시키는 거싱 자신의 중요 과제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독일 주재 교황 대사 오르세니고(Orsenigo)를 통해 1939년 5월 5일 히틀러에게 보낸 각서에서 평화의 유지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무솔리니로 하여금 히틀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평화를 회복하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교황 비오 12세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39년 8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몬티니(Montini) 추기경 – 나중에 바오로 6세 교황 – 이 작성한 평화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도 불구하고 계속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법적이고 종교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의 성탄절 메시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활용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로마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공중 폭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5,000명 이상의 유다인들을 수용소로부터 구출하였고, 독일의 제국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유다인 박해에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항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보복 조치를 통해 유다인의 처지가 더욱더 심각한 궁지로 몰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교황의 이러한 태도는 인종 문제에 대해 비겁하고 우유부단하였다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부당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전쟁의 참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이 닿는데 까지 노력하였고, 전쟁 포로와 실종자 그리고 부상자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는 기구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 기구를 통해 1천백만 건의 소식이 중재되었다. 종전 후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박애와 사랑의 정신을 전파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모금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하였고, 패배자들이 입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독일에 대한 화해의 표지로 미국의 군종 주교 알로이시오(Aloisius Munch)를 사도좌 순서자로 임명하여 독일에 파견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자신이 반포한 여러 회칙 또는 담화문을 통해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에 관한 회칙 Mustici corporis, 성서 연구에 관한 Divino afflante Spiritu 그리고 전례에 관한 Mediator Dei 등이 중요하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람 Humani Generis를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호도하는 주장과 이론들을 공박하였다. 아울러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마리아의 몽소 승천(蒙召昇天)을 도그마로 선언하였다. 1954년 마리아의 해를 기념하는 동안 교황 비오 12세는 여왕 마리아의 축일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1956년 예수 성심 공경을 강조하기 위해 회칙을 반포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비록 사회 회칙을 반포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담화문을 통해, 그리고 교황 권고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의 이러한 교도권적인 활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비오 12세의 발언을 고려함으로써 그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33명의 성인을 시성시켰고, 그 가운데는 교황 비오 10세도 포함되어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추기경을 임명함에 있어서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숫자를 축소시킴으로써 세계 교회와의 연대성을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 재임 기간 중에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의 교회는 심각한 박해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과 소련의 경우 상황은 심각하였고, 거의 1,000명 이상의 사제들과 5명의 주교들이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아니면 재판에 회부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8년 10월 9일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종전 후의 시대의 변화를 거치는 동안 교황권의 도덕성을 강화시키면서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교황 비오 12세의 후임 교황 요한 23세가 세상을 향해 교회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교황 비오 12세에게는 바로 이러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신심이 돈독하고 자신에게 위임된 과제를 헌신적으로 이행한 인물이었던 교황 비오 12세는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 아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한 교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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