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보프의 그리스도론적 사상의 발전

보프의 그리스도론적 사상의 발전 (p 192 – 322)

1. 그리스도론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들은 신학인가?
아니면 역사인가?

예수의 유년기와 관련한 이야기들과 크리스마스 기념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띠는 것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신앙과 어떤 연관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보프의 입장이다. 이러한 것은 신앙은 역사와 관계되어 있고, 역사 안에서 계시되시는 하느님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가와 마태오의 기술은 주로 그분의 탄생과 관련한 가족 상황을 기술하는데 이는 그분의 역사에 관한 중립적인 기록이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구세주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부차적 요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루가와 마태오가 예수의 유년기 역사에서 전하고자 하였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대상에 역사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전하고자 하고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 결국 에수 유년기 이야기는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맥락 속에서 창출된 신학과 신앙의 비추임 속에서 생각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신앙 생성 초기에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물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즉 하느님은 예수 생애의 어느 시점에 그분을 구세주,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세우셨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꼬는 이를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던 때라고 천명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는 탄생 바로 그 순간부터 오래 고대되던 메시아로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루가는 예수는 베들레헴 동굴에서 탄생하면서부터 그 이후로 내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요한은 예수는 그분이 태어나기 이전에 조차 세계의 창조 훨씬 이전에 역시 하느님 곁에 선재(先在)하셨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유년기 이야기는 기원 후 약 80-90년 경의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나자렛 예수, ‘그분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하여 말하는 일종의 선포라는 것이다. 그럼 이제 마태오와 루가에서 나타나는 그분에 대한 메시아성의 고백을 알아보도록 하자.
부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가 그 오메가 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예수는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하였고 복음을 집필함에 있어 편집적으로 앞쪽으로 방향을 제시한 것 뿐이다.
마태오는 자신이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의 족보를 구성하면서 14세대를 세차례 언급하고 있다. 14세대는 구원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최고점을 나타내 준다.
루가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자를 역시 삽입한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역사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끌어안으셨다는 것과 또한 그분이 자신에게 인간의 불명예, 부끄러움을 짊어지셨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렇듯 마태오는 그리스도가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마태오는 예수는 이제 요셉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자 동시에 메시아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가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루가는 1,2장에서 각 대비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세례자 요한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기법들은 그리스도의 수태 고지때 휠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마태오와 루가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교리에서 나타나는 관점과 루가와 마태오의 그것간에 실재하는 차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교리는 마리아의 동정성, 즉 출산을 하기 전과 출산을 하는 동안과 그 이후에 있어서의 그의 항구한 신체적 동정 사실에 역점을 두어 왔다. 하지만 복음서는 마리아 개인의 동정성은 이차적인 대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동정 수태인 것이다.
결국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탄생 무렵의 세속 역사와 요한의 설교에 관하여 언급한 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사히는 장으로서의 우주 세계의 세속 역사와 거룩한 역사간에 실재하는 진정하는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은 어떤 연관성을 갖나?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대변하는 자들이다. 기쁜 소식은 바로 이들에게 선포되었고, 예수 역시 이들에게 보내여지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베들레헴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원 후 80-85년 경의 루가의 독자들에게 직접 건네 졌고 그들은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목자들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오는 또한 그리스도의 유년기와 관련하여 네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동방 박사들과 별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본문들과 천문학적 사실과 연관하여 볼 때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이것들에서 동기를 받았고 이 이야기는 종말론적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태오 1-2장에서는 빠스카 이후의 관점에서 복음서의 대주제들이 진술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나자렛 예수가 한 분 참 메시아이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 왕가의 메시아 집안의 후손이시고, 이제 역사의 정점, 역사의 궁극 시간에 에집트로부터 탈출한 그 백성를 결정적인 교향-고국으로 데려갈 새로운 모세이시라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말해 보자. 복음서들은, 특히 예수 유년기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인 사건을 수록한 출판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형성되었을 당시에는 ‘하가다 미드라쉬’가 넓게 활용되었던 시기였고 이러한 상황에 의해 유년기 이야기가 발전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띤 하느님 자신이셨다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그래서 우리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희망과 기쁨을 얻도록 하려는 근본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상징적, 유비적 표현이 종교적인 언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고려해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상징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탄생과 구유 이야기들은 제대로 이해 하여야 할 것이고 하느님의 저 영원히 젊은 기운이 이 세계를 관통하여 이제 다시는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것, 그분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그 행복한 밤에 결코 지지 않을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현재에 밝혀야 할 것이다.

2.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토록 인간적이실 수 있으셨다. – 예수,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하느님이요 인간적 인격이라고 알기에 이르른 것은 그분을 보고, 닮고, 해독해 내고 그분과 더불어 삶으로써 였던 것이다. 오늘날 본성(natura)과 인격(persona)으로 세겨지는 말들이 당시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우리가 예수에 관한 신앙을 고백하고 에수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 그 즉시 우리에게는 그분의 존재 방식(다른 사람들을 – 위한 – 존재)을 본받으라는 요청이 제기된다. 나자렛 인간 예수는 그토록 위대하고 심오한 모습을 자신의 인성 가운데서 계시하였다. 그 순간 사도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유다인이기를 그만 둔 것이다. 예수가 구체적인 한 사람,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띠고 있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들과 갈라놓는 우리 신앙의 핵심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분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인간 존재자들, 인격들의 의미와 그들의 뿌리와 참된 인간성에 대해서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예수를 보고 본받고 해독해 냄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함께 삶으로써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발견해 낸 것은 구체적인 한 사람 안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 존재들의 참된 본성과 운명을 알기에 이른 것은 한 하느님 안에서였던 것이다. 즉 인간 존재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를 일깨워 주고, 하느님의 신비를 살아 나가는 것은 인간 존재들의 신비를 일깨워 주는 것이며, 예수 안에서 이 둘은 그 어떤 것도 상실하는 것이 없는 그러한 양식으로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예수는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코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신앙의 출발점이 될때, 개념들과 정식들이 말하는 것들을 뛰어넘어 예수의 그 신비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들이 담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들의 시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해 주고자 하는 그 신비를 살도록 예수는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역사 속에는 많은 사도들이 있어왔다. 이들은 잘못도 있었고, 이탈도, 이단도 나타났는데 이는 자신의 신앙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과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정확히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고, 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은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성찰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흡수하거나 인간이 하느님을 흡수하는 정도로까지 극단적으로 철저하게 일치를 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하느님-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처음의 대 논쟁은 성서적인 유일신론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이었고 그의 인성은 단지 외양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부류의 주장에는 성부수난설, 종속설, 아리아니즘등이 있다. 이러한 이단적 사상에 대해 신앙은 언제나 예수의 신성을 축소시키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서 맞서왔던 것이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은 로고스 신학을 펼친다. 이들은 에수의 이중성 즉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 요소에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에는 신적인 본성이 인간적인 본성을 흡수해 버리는 단성론의 위험이 놓여있었다. 그들의 생각 내지 이해들에 있어서 나타나는 그릇된 전제는 인간 본성의 완성을 그 자체로 폐쇄된 것으로, 그리고 고립된 것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정적인 양식으로 이해하는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파로 안티오키아 학파가 있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 즉 두 개의 완전한 본성들은 하나의 단일 본성 안에서 동일화 될 수 없다는 원리를 지반으로 하여 인간적 본성과 신적인 본성은 각각이 그 자체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채로 서로가 병치 되어있다고 보았다. 이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이러한 두 학파들은 모두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육화에 바탕하여 그리스도론을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육화는 각각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어야 했다. 역사의 예수를 설명하고자 추구해 온 이 긴 성찰 과정을 마루리 해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분은 하느님 자신의 육화요, 인간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실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현적인 모습이자 그분의 투명한 모습이라고 말이다.
이들 두 학파와 역사적 예수의 육화에 대해 칼체돈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천명하였다.
①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구원은 그를 통해서 오지 않았다.
② 만일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③ 만일 인성이 하느님의 것이 않다면 인류의 신화는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④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인성이 참된 인성이 아니거나 이것이 인성으로 존속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인 인간 존재요, 인간인 하느님이라고 천명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 자신과 더불어서 인간 존재와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시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에수의 실존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타자(하느님)를 향하고 있었고 또 이들을 위하여 영위된 실존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바우셨던 한 인격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그분이 사람들이 존재했던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락했던 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히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와 그분의 친밀성은 그분의 언명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인격성을 결한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불완전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최고의 완전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의 철저한 인성은 ‘나’의 무질서와 ‘나’에 대한 존재론적 천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동일시하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나를’ 타자들에게, 또한 타자들을 위해서 , 특히 하느님을 위해서 내어 맏기고 전달해 줌으로써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참된 삶살이는 ‘더불어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나’가 나인 그것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나’에 의해서일 따름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이르기 까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 안에 존재할 수 있는 한 인간 존재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이 인간이 되시기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완전한 개방성을 충만히 채워주실 정도로 당신 자신의 자아로부터 스스로를 비우실 수 있다. 이에 예수는 참 인간이며 또한 참 하느님이시다.
인간 예수는 이 세계에 들어오셔서 역사를 이루시는 하느님 자신이다. ‘말씀’이 육이 ‘되셔서’우리 가운데서 사셨던 것이다. 하느님이 ‘생성하실’때, 그리고 그분 스스로가 역사가 되게 하시고 생성을 이루실 때, 여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육화 말씀이라고 일컫는 분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 자신, 자아를 타자들과 대타자들에게 완전히 열어젖혔다는 것은 부활 역시 예수의 친교와 개방성의 충만한 깊이를 밝혀 주었던 까닭이다. 이제 부활을 통해 더 이상 육적이지 않고 영적인 새 인간이 나타났다. 이제 그 몸은 더 이상 한계가 아니라 총체적인 우주적 현존이요 모든 실재와의 친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육화를 이루어가는 한 과정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삶의 각 단계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하느님을 계시하셨다. 왜냐하며 각 단계는 발달에 상응하는 양태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연히 따르게 되는 高와 低, 성과 쇄 현상은 예수 자신이 인간과 하느님의 의미를 꿰뚫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고 정화하는 과정들로 작용한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악은 이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결되어 사랑으로 극복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상황 속에서 허용되는 가능성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전된 인물이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전달해 주시면 주실수록 예수는 그만큼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드렸다.
이러한 자기 비허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비우셔서 하느님과 인간 존재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잃으셨다. 또한 여기서 하느님의 가장 커다란 자기 전달이 이에 상응한 방식으로 발생한 것이다. 하느님의 그 가장 커다란 자기 전달은 부활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물질과 영, 인간과 하느님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치에, 그리고 온전한 해석에 도달한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출발점으로서의 부활에 입각해서만이 혼동도 가름도 없는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인간화와 인간의 신화의 실질적인 의미를 진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성찰에 바탕하여 우리는 이제 예수의 죄없음의 의미를 자리매김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육을 띠고 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죄 없이 사셨기 때문이다. 맨 처음 두 세기에 걸쳐 형성된 전승은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 것이 그분의 본성의 특별한 자질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본원적이고 부단한 일치, 결합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논증하고자 해왔다. 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 문제를 예수의 동정 수태에 입각하여 논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그분은 아예 죄를 범할 수도 없으셨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애초부터 성령의 작용과 힘에 의해서 죄 없이 수태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위격적 결합은 – 말씀의 신적인 뻬르소나는 이에 따라서 예수의 인간적 행위들의 담지자가 된다. – 불완전과 죄와 연루된 일체의 조짐을 배제시키고 있다.
죄 없음이라는 것은 예수에 있어서의 하느님과의 일치, 결합과 하느님에게 있어서의 예수와의 일치, 결합을 나타내는 우리의 부정적 표현 방식이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하느님 안에 중심을 두셨다. 그리고 완전히 하느님 안에 중심을 두셨기 때문에 죄 없이 존재하셨다. 그분은 이 근본적인 태도를 보존하셨기 때문에 죄를 범하시지도, 죄를 범하실 수도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죄 없음은 그분의 윤리적 태도들의 결백이라든가 그분의 개인적인 행동들의 올곧음에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물러 있는,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그분의 존재의 근본 상황에 더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분이 죄로 가득한 인간의 조건을 취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죄의 역사를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비록 그분이 죄가 없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취하였다. 또한 그분은 당신의 생애 동안에 하느님과 안긴 존재들 앞에서 그분이 보인 사랑과 처신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분 자신의 육에 있어서의 죄의 역사를 극복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부활은 죄로 가득 찬 인간 실존 구조로부터의 결정적인 해방을 표상한다. 또한 이것은 인격 주체로서의 ‘나’와 실재의 총체성과 형성할 수 있는 관계 가능성들의 충만한 실현을 표상한다.
예수는 인간 존재들을 안으로부터 구속하셨다. 그분은 유혹과 소외들을 정복하셨고, 죄가 역사 내에서 인간 본성에 각인해 놓은 소인들을 정복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이르지 못한 참된 인간 존재의 모델이자 원형이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또다른 경로를 통해 인간을 위하고 하느님을 위해 인간적 본성을 해방하리라는 목적으로 이를 취하심으로써 모든 인류에 가닿아 계시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이자 닮은 꼴들이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에 대해서 주장된 것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각 인격 주체에 대해서도 역시 천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분인 예수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신들이 예수처럼 실재 전체에 개방된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다. 중세기의 프란치스코 학자들의 고전적인 정식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무한자를 소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무한자와 동일시 되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 능력을 절대적이고 충만한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육화는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 행업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에 마련해 두신 가능성의 철저하고도 총제적인 내지는 전적인 실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 즉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신적이고 인간적인 자기 전달의 충만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더 우리 자신을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라는 도전을 예수의 누이들과 형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예수로부터 동일한 도전을 받아왔다.
나자렛 예수는 우리의 미래에 입각하여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미래는 육화하였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밝혀졌다. 각 인격 주체의 미래는 확실히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 그리고 죽음 그 너머에 있다. 하느님이 우리의 존재 안에 마련해 두신 무한자를 향한 능력의 실현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저 육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운명에로 방향지워져 있는지를 알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본성을 알기에 이르는데, 하느님은 인간적 본성을 취하셔서 이것을 당신의 신적인 실재로 충만히 채우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우리의 다름을 존중하시는 가운데 – 우리의 것과 같은 얼굴로 우리와 대면하시는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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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보프의 그리스도론적 사상의 발전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보프의 그리스도론적 사상의 발전 (p 192 – 322)

    1. 그리스도론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들은 신학인가?
    아니면 역사인가?

    예수의 유년기와 관련한 이야기들과 크리스마스 기념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띠는 것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신앙과 어떤 연관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보프의 입장이다. 이러한 것은 신앙은 역사와 관계되어 있고, 역사 안에서 계시되시는 하느님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가와 마태오의 기술은 주로 그분의 탄생과 관련한 가족 상황을 기술하는데 이는 그분의 역사에 관한 중립적인 기록이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구세주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부차적 요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루가와 마태오가 예수의 유년기 역사에서 전하고자 하였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대상에 역사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전하고자 하고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 결국 에수 유년기 이야기는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맥락 속에서 창출된 신학과 신앙의 비추임 속에서 생각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신앙 생성 초기에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물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즉 하느님은 예수 생애의 어느 시점에 그분을 구세주,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세우셨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꼬는 이를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던 때라고 천명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는 탄생 바로 그 순간부터 오래 고대되던 메시아로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루가는 예수는 베들레헴 동굴에서 탄생하면서부터 그 이후로 내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요한은 예수는 그분이 태어나기 이전에 조차 세계의 창조 훨씬 이전에 역시 하느님 곁에 선재(先在)하셨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유년기 이야기는 기원 후 약 80-90년 경의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나자렛 예수, ‘그분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하여 말하는 일종의 선포라는 것이다. 그럼 이제 마태오와 루가에서 나타나는 그분에 대한 메시아성의 고백을 알아보도록 하자.
    부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가 그 오메가 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예수는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하였고 복음을 집필함에 있어 편집적으로 앞쪽으로 방향을 제시한 것 뿐이다.
    마태오는 자신이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의 족보를 구성하면서 14세대를 세차례 언급하고 있다. 14세대는 구원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최고점을 나타내 준다.
    루가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자를 역시 삽입한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역사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끌어안으셨다는 것과 또한 그분이 자신에게 인간의 불명예, 부끄러움을 짊어지셨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렇듯 마태오는 그리스도가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마태오는 예수는 이제 요셉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자 동시에 메시아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가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루가는 1,2장에서 각 대비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세례자 요한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기법들은 그리스도의 수태 고지때 휠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마태오와 루가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교리에서 나타나는 관점과 루가와 마태오의 그것간에 실재하는 차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교리는 마리아의 동정성, 즉 출산을 하기 전과 출산을 하는 동안과 그 이후에 있어서의 그의 항구한 신체적 동정 사실에 역점을 두어 왔다. 하지만 복음서는 마리아 개인의 동정성은 이차적인 대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동정 수태인 것이다.
    결국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탄생 무렵의 세속 역사와 요한의 설교에 관하여 언급한 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사히는 장으로서의 우주 세계의 세속 역사와 거룩한 역사간에 실재하는 진정하는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은 어떤 연관성을 갖나?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대변하는 자들이다. 기쁜 소식은 바로 이들에게 선포되었고, 예수 역시 이들에게 보내여지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베들레헴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원 후 80-85년 경의 루가의 독자들에게 직접 건네 졌고 그들은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목자들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오는 또한 그리스도의 유년기와 관련하여 네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동방 박사들과 별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본문들과 천문학적 사실과 연관하여 볼 때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이것들에서 동기를 받았고 이 이야기는 종말론적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태오 1-2장에서는 빠스카 이후의 관점에서 복음서의 대주제들이 진술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나자렛 예수가 한 분 참 메시아이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 왕가의 메시아 집안의 후손이시고, 이제 역사의 정점, 역사의 궁극 시간에 에집트로부터 탈출한 그 백성를 결정적인 교향-고국으로 데려갈 새로운 모세이시라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말해 보자. 복음서들은, 특히 예수 유년기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인 사건을 수록한 출판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형성되었을 당시에는 ‘하가다 미드라쉬’가 넓게 활용되었던 시기였고 이러한 상황에 의해 유년기 이야기가 발전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띤 하느님 자신이셨다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그래서 우리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희망과 기쁨을 얻도록 하려는 근본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상징적, 유비적 표현이 종교적인 언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고려해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상징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탄생과 구유 이야기들은 제대로 이해 하여야 할 것이고 하느님의 저 영원히 젊은 기운이 이 세계를 관통하여 이제 다시는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것, 그분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그 행복한 밤에 결코 지지 않을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현재에 밝혀야 할 것이다.

    2.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토록 인간적이실 수 있으셨다. – 예수,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하느님이요 인간적 인격이라고 알기에 이르른 것은 그분을 보고, 닮고, 해독해 내고 그분과 더불어 삶으로써 였던 것이다. 오늘날 본성(natura)과 인격(persona)으로 세겨지는 말들이 당시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우리가 예수에 관한 신앙을 고백하고 에수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 그 즉시 우리에게는 그분의 존재 방식(다른 사람들을 – 위한 – 존재)을 본받으라는 요청이 제기된다. 나자렛 인간 예수는 그토록 위대하고 심오한 모습을 자신의 인성 가운데서 계시하였다. 그 순간 사도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유다인이기를 그만 둔 것이다. 예수가 구체적인 한 사람,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띠고 있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들과 갈라놓는 우리 신앙의 핵심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분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인간 존재자들, 인격들의 의미와 그들의 뿌리와 참된 인간성에 대해서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예수를 보고 본받고 해독해 냄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함께 삶으로써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발견해 낸 것은 구체적인 한 사람 안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 존재들의 참된 본성과 운명을 알기에 이른 것은 한 하느님 안에서였던 것이다. 즉 인간 존재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를 일깨워 주고, 하느님의 신비를 살아 나가는 것은 인간 존재들의 신비를 일깨워 주는 것이며, 예수 안에서 이 둘은 그 어떤 것도 상실하는 것이 없는 그러한 양식으로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예수는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코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신앙의 출발점이 될때, 개념들과 정식들이 말하는 것들을 뛰어넘어 예수의 그 신비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들이 담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들의 시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해 주고자 하는 그 신비를 살도록 예수는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역사 속에는 많은 사도들이 있어왔다. 이들은 잘못도 있었고, 이탈도, 이단도 나타났는데 이는 자신의 신앙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과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정확히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고, 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은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성찰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흡수하거나 인간이 하느님을 흡수하는 정도로까지 극단적으로 철저하게 일치를 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하느님-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처음의 대 논쟁은 성서적인 유일신론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이었고 그의 인성은 단지 외양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부류의 주장에는 성부수난설, 종속설, 아리아니즘등이 있다. 이러한 이단적 사상에 대해 신앙은 언제나 예수의 신성을 축소시키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서 맞서왔던 것이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은 로고스 신학을 펼친다. 이들은 에수의 이중성 즉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 요소에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에는 신적인 본성이 인간적인 본성을 흡수해 버리는 단성론의 위험이 놓여있었다. 그들의 생각 내지 이해들에 있어서 나타나는 그릇된 전제는 인간 본성의 완성을 그 자체로 폐쇄된 것으로, 그리고 고립된 것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정적인 양식으로 이해하는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파로 안티오키아 학파가 있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 즉 두 개의 완전한 본성들은 하나의 단일 본성 안에서 동일화 될 수 없다는 원리를 지반으로 하여 인간적 본성과 신적인 본성은 각각이 그 자체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채로 서로가 병치 되어있다고 보았다. 이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이러한 두 학파들은 모두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육화에 바탕하여 그리스도론을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육화는 각각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어야 했다. 역사의 예수를 설명하고자 추구해 온 이 긴 성찰 과정을 마루리 해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분은 하느님 자신의 육화요, 인간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실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현적인 모습이자 그분의 투명한 모습이라고 말이다.
    이들 두 학파와 역사적 예수의 육화에 대해 칼체돈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천명하였다.
    ①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구원은 그를 통해서 오지 않았다.
    ② 만일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③ 만일 인성이 하느님의 것이 않다면 인류의 신화는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④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인성이 참된 인성이 아니거나 이것이 인성으로 존속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인 인간 존재요, 인간인 하느님이라고 천명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 자신과 더불어서 인간 존재와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시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에수의 실존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타자(하느님)를 향하고 있었고 또 이들을 위하여 영위된 실존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바우셨던 한 인격이셨다. 따라서 그분은 그분이 사람들이 존재했던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락했던 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히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와 그분의 친밀성은 그분의 언명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인격성을 결한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불완전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최고의 완전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의 철저한 인성은 ‘나’의 무질서와 ‘나’에 대한 존재론적 천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동일시하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나를’ 타자들에게, 또한 타자들을 위해서 , 특히 하느님을 위해서 내어 맏기고 전달해 줌으로써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참된 삶살이는 ‘더불어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나’가 나인 그것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나’에 의해서일 따름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이르기 까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 안에 존재할 수 있는 한 인간 존재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이 인간이 되시기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완전한 개방성을 충만히 채워주실 정도로 당신 자신의 자아로부터 스스로를 비우실 수 있다. 이에 예수는 참 인간이며 또한 참 하느님이시다.
    인간 예수는 이 세계에 들어오셔서 역사를 이루시는 하느님 자신이다. ‘말씀’이 육이 ‘되셔서’우리 가운데서 사셨던 것이다. 하느님이 ‘생성하실’때, 그리고 그분 스스로가 역사가 되게 하시고 생성을 이루실 때, 여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육화 말씀이라고 일컫는 분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 자신, 자아를 타자들과 대타자들에게 완전히 열어젖혔다는 것은 부활 역시 예수의 친교와 개방성의 충만한 깊이를 밝혀 주었던 까닭이다. 이제 부활을 통해 더 이상 육적이지 않고 영적인 새 인간이 나타났다. 이제 그 몸은 더 이상 한계가 아니라 총체적인 우주적 현존이요 모든 실재와의 친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육화를 이루어가는 한 과정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삶의 각 단계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하느님을 계시하셨다. 왜냐하며 각 단계는 발달에 상응하는 양태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연히 따르게 되는 高와 低, 성과 쇄 현상은 예수 자신이 인간과 하느님의 의미를 꿰뚫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고 정화하는 과정들로 작용한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악은 이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결되어 사랑으로 극복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상황 속에서 허용되는 가능성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전된 인물이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전달해 주시면 주실수록 예수는 그만큼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드렸다.
    이러한 자기 비허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비우셔서 하느님과 인간 존재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잃으셨다. 또한 여기서 하느님의 가장 커다란 자기 전달이 이에 상응한 방식으로 발생한 것이다. 하느님의 그 가장 커다란 자기 전달은 부활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물질과 영, 인간과 하느님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치에, 그리고 온전한 해석에 도달한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출발점으로서의 부활에 입각해서만이 혼동도 가름도 없는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인간화와 인간의 신화의 실질적인 의미를 진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성찰에 바탕하여 우리는 이제 예수의 죄없음의 의미를 자리매김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육을 띠고 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죄 없이 사셨기 때문이다. 맨 처음 두 세기에 걸쳐 형성된 전승은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 것이 그분의 본성의 특별한 자질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본원적이고 부단한 일치, 결합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논증하고자 해왔다. 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 문제를 예수의 동정 수태에 입각하여 논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그분은 아예 죄를 범할 수도 없으셨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애초부터 성령의 작용과 힘에 의해서 죄 없이 수태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위격적 결합은 – 말씀의 신적인 뻬르소나는 이에 따라서 예수의 인간적 행위들의 담지자가 된다. – 불완전과 죄와 연루된 일체의 조짐을 배제시키고 있다.
    죄 없음이라는 것은 예수에 있어서의 하느님과의 일치, 결합과 하느님에게 있어서의 예수와의 일치, 결합을 나타내는 우리의 부정적 표현 방식이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하느님 안에 중심을 두셨다. 그리고 완전히 하느님 안에 중심을 두셨기 때문에 죄 없이 존재하셨다. 그분은 이 근본적인 태도를 보존하셨기 때문에 죄를 범하시지도, 죄를 범하실 수도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죄 없음은 그분의 윤리적 태도들의 결백이라든가 그분의 개인적인 행동들의 올곧음에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물러 있는,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그분의 존재의 근본 상황에 더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분이 죄로 가득한 인간의 조건을 취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죄의 역사를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비록 그분이 죄가 없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취하였다. 또한 그분은 당신의 생애 동안에 하느님과 안긴 존재들 앞에서 그분이 보인 사랑과 처신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분 자신의 육에 있어서의 죄의 역사를 극복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부활은 죄로 가득 찬 인간 실존 구조로부터의 결정적인 해방을 표상한다. 또한 이것은 인격 주체로서의 ‘나’와 실재의 총체성과 형성할 수 있는 관계 가능성들의 충만한 실현을 표상한다.
    예수는 인간 존재들을 안으로부터 구속하셨다. 그분은 유혹과 소외들을 정복하셨고, 죄가 역사 내에서 인간 본성에 각인해 놓은 소인들을 정복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이르지 못한 참된 인간 존재의 모델이자 원형이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또다른 경로를 통해 인간을 위하고 하느님을 위해 인간적 본성을 해방하리라는 목적으로 이를 취하심으로써 모든 인류에 가닿아 계시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이자 닮은 꼴들이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에 대해서 주장된 것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각 인격 주체에 대해서도 역시 천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분인 예수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신들이 예수처럼 실재 전체에 개방된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다. 중세기의 프란치스코 학자들의 고전적인 정식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무한자를 소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무한자와 동일시 되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 능력을 절대적이고 충만한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육화는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 행업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에 마련해 두신 가능성의 철저하고도 총제적인 내지는 전적인 실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 즉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신적이고 인간적인 자기 전달의 충만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더 우리 자신을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라는 도전을 예수의 누이들과 형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예수로부터 동일한 도전을 받아왔다.
    나자렛 예수는 우리의 미래에 입각하여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미래는 육화하였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밝혀졌다. 각 인격 주체의 미래는 확실히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 그리고 죽음 그 너머에 있다. 하느님이 우리의 존재 안에 마련해 두신 무한자를 향한 능력의 실현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저 육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운명에로 방향지워져 있는지를 알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본성을 알기에 이르는데, 하느님은 인간적 본성을 취하셔서 이것을 당신의 신적인 실재로 충만히 채우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우리의 다름을 존중하시는 가운데 – 우리의 것과 같은 얼굴로 우리와 대면하시는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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