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재물관

I. 예수의 재물관
성서에서 재물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성서의 내용이 재물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경원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부정한 방법에 의한 재물의 획득이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에서 오는 재물의 관리나 사용, 그리고 재물만을 절대시하는 황금 만능주의의 재물관을 경고하고 있다. 성서의 기본 정신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는 맘몬의 세력을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재물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금기시 하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과 구원을 선포하고 하느님 이외의 모든 현세적 사물은 창조주에 속한 것이며 재물도 그 범주 안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신약성서는 진실로 가난한 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특전을 소유하고 있음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신치구, 앞의 책, 141면.

1. 재물에 대한 경고들
구약성서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에 대한 준엄한 단죄와 비극적인 종말을 경고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사람들에게 내려진 이러한 준엄한 경고는 신약성서에서 가난한 자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따라 재물의 도전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복음적 메시지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서는 황금 만능주의로 치닫는 재물관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온 세상을 벌어들인다 해도 제 목숨을 손해를 본다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혹은 사람이 제 목숨의 대가로 무엇의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루가 12,16-21)에 잘 나타난다. 이렇게 부(富)를 경계하는 것은 결국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맘몬(μαμωνᾷς) 아람어 맘몬은 일차적으로 “돈”, “부”, “세속적 재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차적으로 동사형 “돈을 벌다”, “부정 축재하다”, “타인의 소유룰 착취하다”라는 의미로 또는 명사형 “뇌물(賂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가 친히 발설한 것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 일차적 의미는 “재산”, “세속적 물질”을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부정적이고 죄스러운 물질 만능주의를 겨낭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가끔 ‘부정한(ἄδικος)’, 또는 ‘부정의(τής ἀδικιας)’라는 형용사나 소유격 명사를 덧붙이고 있다(루가 16,9.11 참조). 그러나 루가 16,11에 나타나는 ἀδικῳ μαμωνᾷ는 τὸ ἀληθινὸν(진정한 재물)과 대조되고 있다 : 조규만, “하느님과 맘몬”, 「신학과 사상」 제10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3, 11-12면.
의 노예가 되어 구원을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태 19,23-24).
여러분은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마태 6,24; 루가 16,13).
이와같이 예수는 지상적 재물을 하느님과 맞서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섬기다’라는 단어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맘몬이 하느님과 같은 섬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맘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방해물이 되고 있는 셈이다. 위의 책, 13면 참조.
맘몬을 섬기는 부자에 대하여 갈릴레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부유한” 자들은 필요없이 재산을 축적한다. (있던 창고들을 헐고 더 큰 창고들을 새로 지은 사람에 관한 비유 : 루가 12,20-21; 마태 6,19-21 참조).
2. “부유한” 자들은 자기네 재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놓지 않는다. 이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 참조)에서 알 수 있다.
3 “부유한” 자들은 부와 권력과 영예와 그와 유사한 것들 그 자체를 가치로, ‘우상’으로 들어높인다(“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1.24)) S. Galilea, ꡔ진복선언ꡕ,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7, 36-37면.

2. 재물 사용에 」대한 가르침
창세기에 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창세 1,4 참조). 재물은 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을 좋은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더불어 세상 안에 살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부자들을 단죄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으신다. 위의 책, 40면
사실 부(富)는 그 자체로 아무런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재물의 올바른 관리와 사용에 문제가 있다. 즉 맘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다.
제물에 대한 사용을 다룬 비유가 바로 약은 청지기의 비유이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일지라도 선한 곳에 사용하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돈 자체가 불의한 것일지라도 선하게 사용될 때 칭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규만, 앞의 책, 15면.
재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하는 것으로서, 받은 재물을 충실하게 관리를 해야한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루가 16,1)
관리자는 주인의 고용인이다. 착한 관리자는 재물을 주인의 뜻에 따라 관리한다. 자기의 지혜를 동원하되 정의를 거스리지 않으며, 재물의 유용한 가치를 알되 절제한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탈란트의 비유는 자기 능력의 인식 즉 분수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세이 재물 관리의 비결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재물 관리는 그분의 뜻을 좇아야 할 것이다. 부의 축적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며 결국 구원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 모은 재산이라 할지라도 그 관리와 사용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원칙으로 확립되어야 하며, 이러한 원칙이 결여된다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잊게 되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것이다. 신치구, 앞의 책, 145면 참조.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오, 거기서는 좀과 벌레가 갉아 먹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않고 훔쳐 가지도 않습니다. 사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당신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마태 6,19-21; 참조, 루가 12,33-34).
지상의 것은 아무것도 보물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늘의 것만 보물임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가?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마태 19,21; 마르 10,23; 루가 18,24-27).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하느님 심판의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2,6-8) 임승필, “정의를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신학과 사상」 제10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3, 64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의 실천이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판결의 기준이 된다(마태 25,31-46). 이 사랑이 그리스도교 전체 및 그 구성원들의 참된 삶의 필수 요건인 것이다. 위의 책, 65면.

3. 가난의 요구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보면 포기와 나눔과 추종의 요구가 이어서 나온다. 예수를 따를려면 제물의 포기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경제적 가난을 포함한 전적인 가난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철저히 따른다는 것은 큰 희생을 요구하지만 밭에 묻힌 보물에 관한 비유(마태 13,44)와 진주에 관한 비유(마태 13,45-46)에서 나타나듯이 탁월한 보물과 비교할 때 무가치해 보이는 다른 모든 것을 “기뻐하며” 포기하게 된다. J. Jeremias, ꡔ비유의 재발견ꡕ, 황종렬 옮김, 분도출판사, 1991, 225-226면 참조.
철저한 추종이란 인간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 나라의 매력에 마주치면 추종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쉬워진다. 이것은 다음의 예수의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4.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루가 6 20).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가난 자체 – 비참을 뜻하는 -를 사랑하시지 않고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며,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도 아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가난에 대한 우상이 된다.
가난은 물질적 재물이나 다른 어떤 관계에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김보록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나 우리에게나 청빈의 근본은 자신과 하느님과의 마땅한 관계를 인식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 김보록,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와 수도생활(3)”, 「전망」 제49호,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1980, 125면.
에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세상의 것에 의지할 것이 없어진,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완전히 맡기는 자이며, 갖가지 변화와 모순들에 부딪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자를 뜻한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충실은 물질적인 결과를 불가피하게 이끌어 내게 마련이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명성을 위태롭게 하고 자기 이익을 희생하며 자기 안정을 찾지 않게 된다. Jean Daniélou, S. J., “마음의 가난”, 「전망」 제15호, 1971, 90-96면 참조.
이것을 선포하신 예수께서 또한 이러한 가난을 철저히 실천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셨다.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로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의 첫쪽에서 끝쪽까지 하느님의 뜻은 모든 차원에서의 인간 복지를 겨냥하고 있다. 인간의 결정적․포괄적인 복락, 성서의 용어로 말하면 인간과 인류의 “구원”을. 하느님의 뜻은 돕자는․치유하자는․해방하지는 뜻, 구원 의지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기쁨․자유․평화를, 구원을 원하신다: 인간 각자와 인류 전체의 궁극 행복을. 인간의 전면적 해방․속량․만족․행복 – 이것이 예수의 선포에서 하느님의 절대 미래, 하느님의 승리, 하느님의 나라가 말해 주는 것이다. Hans Küng, 『왜 그리스도인인가?』,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2, 168-169면.

예수께서는 이 ‘일’(루가 4 43)을 위해 이 세상에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하게 사시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키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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