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의 승천

1) 하늘의 의미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늘이 머리위에 있다는 것은 잘알고 있다.그런데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문제이다.
그것은 하늘이 우리 위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이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니까 이쪽 지구에 서서 쳐다보게 되어 있는 하늘이 저쪽 지구에 선 사람한테는 머리 위가 아니라 그 반대 쪽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땅에 서 있는 사람한테 하늘은 머리 위에도 있고 오른 편에도 있고 왼 편에도 있고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고 마침내 아래에도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땅이 묻혀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란 말은 구분이 지금 어디에 계신다는 뜻이겠는가? 이 말은 단순히 까마득한 저 꼭대기 어디에 계시다는 말은 아닐것이다. 땅은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금을 그어서 나눌 수도 있고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하늘은 어떠한가? 물론 하늘도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땅처럼 무슨 형체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서, 그냥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어 있다(空)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건 물론 아니다. 하늘은 만져지지도 않고 금을 그어서 나누어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어떤 사람이 혼자서 차지하거나 돈을 받고 팔 수도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없는 것은 아니고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이다. 하늘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 시대 하늘 하고 조선시대 하늘 하고 오늘의 하늘 하고 다른 것일까? 미국 나라 하늘 하고 일본 나라 하늘 하고 다른 것인가? 이는 물어보나마나 하늘은 언제 어느곳의 하늘이든 같은 하늘이다. 이를 일컬어 ‘시공간(時空間)을 초월한다’라고 한다. 하늘은 때와 장소에 따라 제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땅은 미국 땅하고 일본 땅이 서로 다르며 둘이 동시에 한 곳에 있을 수 없지만 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하늘이다.
인간이 하늘을 바라볼 때, 그 광대무변, 그 광변, 그 놀랍고도 설명할 수 없는 조화 앞에서, 인간은 자연히 불가사이한 우주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땅과 심연의 깊이도 인간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하늘은 눈으로 볼 수 있으면서도 영구히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로 나타난다. 인간은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늘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또 누구든지 비행기 등을 이용하지 않고 하늘을 날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은 다고 해봐야 기껏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린 것밖에 없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이 역사적인 사실은 곧 바벨의 왕처럼(바벨 왕은 하늘에 도전하기 위해 하늘에 까지 이르는 탑을 쌓다 하느님의 노여움과 징벌을 받았다.) 하늘에 오르려고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으며,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2) 예수님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심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머리 위 저 꼭대기 어디로 올라가셨다는 뚯이 아니라 더 이상 때와 장소에 갇혀 있지 않는 분으로 바뀌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예수님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만나뵐 수 있는 분으로 되신것이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모든 곳 모든 때에 계신 에수님이란 말이다. 따라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의 에수님은 같은 시간에 여러 장소에서 만날 수 없는 분, 우리와 똑같이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분이었지만,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에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후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 20)고 하셨다. 여기서 “함께 있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함께 있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머리속으로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곤란하겠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것을 어떤 멀리 있고 놀라운 세계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세계, 그리고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 세계의 가장 심오하고 중대한 한 부분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당신의 아버지로 알고 계신다. 하늘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쳐 주시기위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셔야 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기”(요한 3, 13)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즉 하늘에 그 운명을 지니고 계신 분,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로 돌아가실 분이므로, 그분의 일도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본질적인 일은 당신의 몸과 피로 바치신 희생이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늘로 부터 내려온”(요한 6,33-58) 빵이요 영원한 생명, 성부의 생명, 천사의 생명을 주는 빵이다.

3)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알아본 승천의 의미

우리들 중에 누구나가 자신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그리고 친척들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가정해보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부모님의 생전의 모습은 상상이 될 것이다. 부모님의 육신이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기 때문에 부모님의 과거 모습을 송두리채 잊어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살아 생전의 모습 보다도 부모님의 모습이 더욱 생생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 웃는 모습, 우는 모습, 자신을 안아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착한 일 했다고 칭찬하시는 모습, 꾸중하시는 모습 등등 부모님의 살아 생전의 모습은 어쩌면 그분들이 돌아가시게 되면서 더욱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점유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육체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기억된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이지만 ‘돌아가셨지만 다시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이 우리 마음을 자극하고 우리의 행동에 지침이 된다면 돌아가셨다고만 얘기할 수 없지 않는가? 오히려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다고 얘기해야 옳은 것 아닌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정신과 가르침은 우리 안에 승화되어 우리의 삶과 같이 하고 있다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예수 승천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단지 저 먼 하늘에 위치하시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고자 승천하셨기에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승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과 ‘죽은 부모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다른 것이다. 또 그 의미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는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절대자)이시고 부모님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부모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는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과 부모님의 기림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나 기림의 차이는 마치 우리의 전통 의식인 ‘제천의식’과 ‘조상제사’의 차이와 같다고나 할까? ‘제천의식’과 ‘조상제사’는 제사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제사의 대상이나 의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제천의식’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조상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같은 제사이고 같은 기림이지만 하나는 절대자에 대한 기림이고 또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죽은 부모에 대한 기림이다.

4)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

하늘은 막연한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우리의 현실 안에 존재한다. 예수님은 공상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앞, 뒤, 위, 아래, 속, 겉, 모든 곳에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이미 하늘이나 땅이라는 우리의 시간적 공간적 개념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인 것이다. 불교인도 힌두교인도 그리스도인처럼 승천하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언젠가 무신론자인 소련의 우주인이 처음으로 대기권을 뚫고 우주을 비행한 뒤에 “하늘 꼭대기 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천국은 보지 못했다”라고 한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공간을 즉 대기권 밖을 구경하고 온 것에 불과하다. 대기권 밖에서 천국을 찾았으니 당연히 천국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과 하늘의 의미를 알지못하는 그런 눈 가지고는 하늘 꼭대기가 아니라 하늘 꼭대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늘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나무 사이, 사람과 구름 사이, 그 뿐 아니라 사람들 몸 속에, 저 자연 속에, 온 세상 가득찬 모든 것 속에 그리고 그 곁에 있는 것이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보려고 머리 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5) 예수의 승천과 우리의 승천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성부와 일치하였다는 의미 외에도 하느님과 일치된 우리 인간의 승천이요 그 인간이 구원되어 목적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승천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닌 예수님이 승천함으로써 성삼위가 새로운 신자 개인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당신 천주성에 참여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셨나이다”라는 예수 승천 감사송에 잘 표현되어 나온다.
이렇게 예수님의 승천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전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치는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르신 하늘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다.

6) 하늘에 대한 희망

천국에 대한 희망을 그리는 성서구절을 찾아보면 우리의 천국관이 새롭게 또 자세히 잡힐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오시는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 20-21)

여기서 우리의 희망의 대상인 천국의 모든 내용이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도성이요, 공동체이며,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이 도성에 속해 있으며, 거기에 우리가 열망하고 있는 거처가 마련된다. 그것은 이 세상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워진 새로운 세상이며 거기에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어려운 것도 밤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이 나타날 때 묵은 세계즉 이 전의 하늘과 이 전의 땅은 마치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져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이 새로운 세계는 우리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영원무궁히 육체를 취하신 말씀과 그 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복종시켜 이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주님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러한 천국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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