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합적 고찰
1) 신구약 성서는 하느님은 유일한 분으로서 세상의 창조주이며 구원자 그리고 완성자(심판자)라고 고백한다. 바꾸어 말하면, 야훼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간에게 가까이와서 인간의 일에 관심을 갖는 신으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자신과의 만남과 교류, 친교를 가능하게 한다. 한 마디로 홀로 있는 신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신, 계약의 하느님이다(인격적인 하느님). 하느님은 당신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이 백성에게 보호를 약속하시고, 동시에 그들이 지켜야할 계명을 주신다. 그 계명은 의미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공동체(“대조사회”)를 이루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해서 계약을 어겨서 심판을 받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할 미래의 구원자(메시아)를 기다리게 된다.
2) 신약성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고 전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죄인과 원수들까지도 포함하는 하느님 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는데, 그 목표는 보통 인간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제외하지 않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대조사회”)을 이루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소식을 받아들여(믿음) 회개의 삶을 살지 않고 반대와 저항을 한다. 그래서 급기야 예수의 사명은 십자가 죽음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어 인간의 마음 속에 성령의 은혜를 부으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지속적이고 깊은 일치,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렇게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이룩하시고 계속하신다.
3) 신구약 성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하느님 자체의 본질과 특성을 논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플라톤 철학은 신을 모든 것의 근원(arche)으로서, 하나이며 초월적인 존재로, 영적이며 파악불가능하고, 불변하며, 고통을 당할 수 없고, 완전한 존재라고 파악하였다. 고대교회의 호교교부들은 플라톤 사상의 신 이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데에 효과적인 접목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이 사상의 초월적인 신관념은 유일신 신앙만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느님의 초(超)세계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가 “희랍화”되어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상 호교 교부들은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철학 체계보다는 원칙적으로 우위에 두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신은 본질상 필연적으로 불변의 상태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교부들은 하느님이 무한한 자유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하시는 분, 세상, 물질, 인간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지닌 분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이런 자유롭고 인격적인 행동은 하느님 스스로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육화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교부들은 강조하였다. 그러나 고대 교부들은 하느님께 대한 일관된 시작을 형성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즉 철학적 신개념과 성서적 하느님 이해가 조화되지 않고 단지 병립하여 서술됨으로써 세상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모습은 잘 드러났으나, 성서가 증언하듯이 자신의 백성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생동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로서의 하느님 모습은 불충분하게 표현되었다.
4) 그리스 철학적 신개념은 후대의 신 이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위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설명하는 신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서, 모든 것의 근원인 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서 인간의 파악능력에서 계속 벗어나는 ‘전혀 다른 분’으로 이해하였다. 켄터베리의 안셀모 역시 그리스 철학에서 세상의 근원인 신을 완전한 존재로 이해했던 것처럼 하느님을 완전성의 총체로서 이해했다: 그는 하느님이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분’이라고 표현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체험 가능한 세상의 질서에서 시작해서 인과원리를 도구로 해서 그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을 찾아갔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이해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립적 존재(ens a se), “自存的 존재”(ipsum esse subsistens)로서 세상만물의 첫 번째 동인, 첫 번째 원인, 절대적인 필연성, 최고의 완전성, 세상 질서의 조종자로서 단순성, 완전성, 무한성, 불변성, 유일성의 속성을 지닌다. 토마스는 인간 이성을 도구로 체험가능한 세상 사물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비교할 때에는 나중에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가 밝혔듯이 유사성(similitudo)과 함께 더 큰 차이(major dissimilitudo)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類比論).
가톨릭 신학의 신론에서 유비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전제이다. 이를 잊는다면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을 없애거나(범신론) 아니면 무한대로 넓혀놓게 된다(초기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유비론은 대략 세단계로, 긍정의 길(via affirmativa), 부정의 길(via negativa), 탁월(卓越)의 길(via eminentiae)로 이루어진다: ①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창조계의 긍정적 측면, 예를 들어서 인간의 긍적적 특성의 하나인 지혜를 하느님께 적용할 수 있다. ② 그러나 하느님의 초월성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지혜로운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지혜롭지는 않다. ③ 하느님은 피조물을 무한히 뛰어넘는 분이기에, 하느님의 지혜는 무한한 지혜이다.
5)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을 거부하고 성서에 나타난 계시된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을 둔 스콜라 신학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루터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존엄성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고,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그를 받아들이는 신앙만이 유일한 신인식의 길이라고 보았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분(Deus revelatus)인 동시에 숨어계신 분(Deus absconditus)으로 나타난다.
6) 근대에 인간 주체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하느님 이해의 출발점은 더 이상 세상과 우주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되었다.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사고체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렇게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방식(“초월적” 사고 방식)으로 신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헤겔에게서는 인간의 유한의식과 신의 무한의식이 동일시되고 그로 말미암아 신과 인간이 인식론적,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된다. 이런 점은 근대 무신론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포이어바흐는 신개념이란 인간이 자신의 무한한 본성을 자기 밖으로 투사한 투사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나 니이체는 포이어바흐의 무신적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자신의 무신론을 전개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신을 인간행복의 방해자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무신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7)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근대 무신론에 반대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서 창조물을 통하여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범신론, 불가지론에 반대해서 지금까지의 신앙 전통에서 믿어온 하느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함께 모아서 제시하였다(DS 3001). 여기에서 제시된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은 구세사에서 체험한 하느님이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사변적, 추상적으로 개념화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을 배격하면서도 무신론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는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실현의 방해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깊숙히 자리하는 구원, 선함, 생에 대한 갈망이 채워질로록 하는 최종적, 본래적 보증자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볼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의 취약점을 명확하게 수정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상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는 철학적 신개념의 영향 하에서 주로 하느님의 초월성, 자립성에만 역점을 두고 인간과의 관련성, 즉 하느님의 인격적이며 생동적인 측면이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라는 구원론적 관점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9)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고 실현시키는 분이라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삼위일체 교리도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성부는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계속하신다는 것이다(활동의 일치). 그러나 신약성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구분되면서 구원활동에서 일치를 이룬다고만 얘기할 뿐,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와 구분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후대 교회와 신학의 과업이라고 하겠다.
신약성서 시대 이후에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철학적 사변과 개념을 사용해서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규명하는 시도는 처음에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역사적으로, 내용적으로 삼위일체론의 형성은 그리스도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종속론적인 경향에 반대해서 니체아 공의회는 (325)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로서, 성자에게서 “출생”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는 보장이 되었지만 구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에 성자가 성부의 동일본질이 아니라 “비슷한 본질”(homoiousios)이라고 주장하는 중도적 아리아니즘이 확산되었다. 이 상황은 카파도치아의 세 교부들이 하느님의 안에서의 단일 본질(ousia)과 세 위격(hypostasis)을 구분함으로써 극복되었다. 또한 그들은 “성령배격론자”들을 배격하면서 니체아 공의회의 표현인 “동일본질”(homoousios)을 성령에게도 적용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이런 견해를 수용해서 성령에게 하느님에게 해당되는 술어(주님, 생명을 주시는 분)를 적용하였다. 니체아-콘스탄틴노플 신앙고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공식적 전례용 신앙고백이며 동방과 서방의 모든 교회를 이어주는 신앙적 유대이기도 하다.
라틴 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노를 선두로 삼위일체 교리의 신학적 표상에 대한 숙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두 위격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성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의 신 본성 내지는 하나의 신 본질로부터 출발하여서 그 안에서 어떻게 세 위격이 존립하느냐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설명 방법으로서 인간 정신 생활의 단일성 안에 존재하는 삼성(三性)을 유비적으로 이용한다. 아우구스티노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켄터베리의 안셀모에 이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어받는다.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은 5세기경에 형성된 아타나시오 신경,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삼위일체론(DS 800-806), 피렌체 공의회의 삼위일체론(DS 1330-1331)에도 영향을 끼쳤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요약: 3.2.9.)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내재적인 발출을 통해서 형성된 삼위가 어떻게 관련을 맺느냐는 것을 논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세사 안에서의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을 논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토마스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파견(missio)이라는 주제와 밀접히 연관시킴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세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때 그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계획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 신학과 신스콜라 신학에서는 파견의 신학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분리되는 경향이 커져갔고 그래서 삼위일체론 자체가 구세사의 구체성에서 분리되어 이론적,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삼위일체 신비 자체가 우리 인간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구원론적인 연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아서 하느님의 한 본질에서 출발하여 세 위격의 형성과 일치를 논하는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동시에 난점도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성자와 성령 두 위격의 근원인 성부에게서 출발해서 세 위격의 일치를 상호간의 내재와 관통의 모델로 이해한다. 이 관점과 성서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를 “계시의 일치”로 표현할 수 있다: 참 인간인 나자렛 예수는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의 실제적 계시이다. 여기서부터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예수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현존하는가? 예수는 물리적,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 안에서, 영적인 실재로서 우리를 위해서 현존한다. 성령은 하느님과 현양된 그리스도가 신앙공동체와 신앙인 개개인을 위해서 현존하는 형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자신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 현대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심상태, 「삼위일체론의 어제와 오늘」, 『續‧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59-169 = “삼위일체”, 한국가톨릭대사전, 574-575.
* 요셉 랕씽어,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의 제5장 삼위일체신에 대한 신앙(122-146).
4. 종합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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