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약의 하느님
일반적으로 인간은 지성을 통하여, 신의 인식, 신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하여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많은 종교들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숭배해 왔다.
그런데 특별하게 그리스도교는 참된 하느님과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실 성서도 하느님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나 개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드러 내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전인적으로 응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성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삶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제시는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차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은 항상 역사적인 현장감을 담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하느님의 정체나 행위 등이 선포되고 있다. 한마디로 역동적인 삶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 생애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을 두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1 구약에 계시된 하느님과 동일하신 하느님
신약에서 증언되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이시지만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한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섬겨온 야훼 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신과,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마르 12,29-30).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인간에게 벌과 심판을 내리시고 그리고 시대의 사유 구조를 반영하는 표상으로서의 주님 표상이 하느님의 신성을 집약하고 있는 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신약성서 안에서 단일적 성격들 띤 하느님의 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구약에서 복합적 요소를 지닌 신의 면모가 야훼 표상 안에 수용된 것처럼 신약의 하느님 안에서도 간단히 통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어느 때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또 어느 때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리고 심원한 간격을 지닌 하느님으로 이야기 되기도 하고 반대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여러 상념들이 다 신약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께 적용 가능한 면들이다.
예수는 아무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친히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요한 1,18; 14,7-9), 명백하게 말씀으로 알려 주시기까지 하셨다(요한 16,25-2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 (히브1,3; 골로 1,27; 2,2)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로 이를 수가 없다고 고백되었다(에페 2,18; 3,12; 요한 14,6). 그러므로 신약의 하느님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격젹으로 만나 뵙게 될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은 구약에서 이미 계시된 하느님 곧 ‘조상들의 하느님“(사도 3,13; 5,30; 22,14),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마태 22,32; 마르 12,26; 루까 20,37; 사도 3,13; 7,32), ’이스라엘의 하느님‘(마태 15,31; 루까 1,68; 사도 13,17; 코린 후 6,16; 히브 11,16)이시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코린후 1,3; 11,31; 로마 15,6; 에페 1,3.17; 베드 전 1,3)이시다.
이와같은 사실은 하느님은 오직 한분 밖에는 안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 17,3; 로마 3,30; 16,27; 코린 전 8,4-6), 또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충분히 보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자신에 대해서는 구약에 비해 언급이 적은 편이다.
4.2.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우리의 신앙고백문인 신경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아버지)”라는 전제로 시작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긴밀히 연결된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면서 하느님을“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 새로운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 민족의 의해 전수 되어 온 하나의 신앙아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과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을 갈라놓는 분깃점이 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한때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셨고(베드 전 2,19),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히브 13,20)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라고 말한 사도 바오로의 생각(코린 후 1,20)도 이를 대변하는 것이다.
신약의 하느님도 구약의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요한 5,17).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인격성은 더욱 새롭게 드러난다. 예수는 ’세례‘와 ’현성용‘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불리게 되었다 (마르 1,11; 9,7). 예수 또한 하느님을 ’압바‘ 또는 ’아버지‘ 라고 부르셨다 (마르 14,36; 11,25-26; 요한 11,41; 17,1.5.11). 특히 ’압바‘란 말은 아라메아어로서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매우 정다운 호칭이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말을 잘 못하는 아기가 아버지라는 말보다 쉽게 아빠라고 하는 경우 사용되고, 그 다음으로 어린이가 성장한 다음에도 친숙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 것은 똑같다. 이차적으로 아람어 권에서 어른을 존칭으로 부를 때도 사용된 적이 있는 용어였다. 물론 예수에게는 일차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한편 ‘아버지’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일 때,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오랜 역사를 통해 ‘genitore'(생식적 차원에서 생명을 준 사람)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생명의 창조자, 생활의 부양자, 보증자다. 우리의 생명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또 우리에게 자유를 보증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손들에게 선이나 도움에 있어서 권위와 능력을 지닌 자로 표현된다. 아버지가 이러한 과거의 의미를 모두 지녀야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아버지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어 현대의 인간들은 ‘고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인간들이 인간적으로 아버지 체험을 하지 못하면, 다시말해 부정적인 아버지를 체험하면, 어떻게 하느님을 두고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뜻을 알아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 다운 아버지를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전달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여성해방 운동자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왜 하느님은 남성. 아버지로 표현되어야 만 하는가, 하느님 어머니일 수는 없는가? 또 한가지는 해방 신학적 깃점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서 보호를 받아야하고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미성연자가 아니라, 성년의 신분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 해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가리켜 ’압바‘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호칭 문제이다. 사실 바빌론 신화나 그밖의 이방인들의 신화에서 제우스나 엘은 제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아버지라고 여겼다. 신이 아버지라는 사상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호칭으로 신을 두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신화나 고대 종교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여길때 아버지라는 말은 ‘원천, 또는 ’기원‘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아들로 여겼다. 물론 여기서 자연적 또는 생식적 의미가 아니라, 선택과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의 관계를 맺었다(출애 4,22; 호세 11,1; 창세 31,9).물론 구약의 이스라엘의 ’아들‘ 됨은 신화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역사안에서 구원업적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특권으로 생각했고 그 것을 즐겼다(로마 9,4).
창조 개념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한 귀절들
이 어리석은 것들아, 이 미련한 것들아,
그가 너희를 있게 하신 너희 아버지가 아니냐?(신명 32,6)
우리의 아버지는 한분이 아니시냐
우리를 내신 하느님도 한분이 아니시냐?(말라 2,10)
계약의 개념상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긴 귀절
너희를 버린 자식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자녀라 하리라(호세 2,1)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내구원의 바위이십니다’하겠고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시편 89,26-27)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호세 11,1)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외면하여도
당신, 야훼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이사63,16)
오냐! 에브라임은 내 아들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다.(예례31,20)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야훼께서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시편 103,13)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시편 27,10)
이러한 구약성서는 그의 완성을 신약성서에서 발견한다.구약성서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해 왔던 것을 신약성서는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시라고 확정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규정짓는 새롭고 놀라운 양식은 바로 예수로부터 비롯되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성서학자는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규정하는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 안에서만도 170번 사용된다. 그리고 거의 예수가 발설하는 것으로 되어있다.그러므로 어떤 성서학자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일컬는 것이 나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삽입한 신학적 견해라고 보는 사람이 없다. 가장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이와 같은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 처음으로 하느님께 적용되었고,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로마 8,15; 갈라 4,6). 한편 예수는 하느님을 두고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를 구별하고 있다. 예수가 하느님을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마르 1,15). 실제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최대의 관심사였으며, 유일한 관심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부록: 하느님의 나라
어떤 개신교 학자가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이 세상에 온것은 (로마)교회였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알베르트 슈바이쩌같은 신학자는 “예수는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세상, 하느님 나라를 외쳤지만 세상은 바뀐게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도,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옛날보다는 더 좋아졌다고 봅니까? 아니면 옛날이 더 좋았읍니까?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낙관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비관론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과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또 오늘의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느냐는데 있다고 본다.부분적으로 어떤 면은 좋아졌는가 하면, 또 어떤 면에서는 더 엉망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예수가 외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핵심 메시지가 하느님의 나라였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우선 예수가 30년의 숨은 생활을 마치고 공적활동을 개시하면서 외친 것은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꼬 1,15)는 것이었다. 마르꼬 복음 사가는 예수의 설교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여 보고 하고 있는 셈이다.우리가 황금율이라는 산상설교를 보자. 그중에서도 진복팔단을 보면, 8가지 행복 중에 첫째 조항과 마지막 조항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물론 2번째에서 7번째까지의 모든 내용이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지만 첫째 조항과 여덟번째 조항에서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바꾸어 부른다. 이유는 이스라엘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는 관습에 기인한다. 마태오의 하늘 나라는 마르꼬나 루까의 하느님 나라와 동의어이다. 예컨대 똑같은 사진복8단(5,5-12), 루까에서는 진복 4단(6,20-26)이지만, 행복의 조건에서도, 주의 기도(마태6,9-15; 루까11,2-4)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말을 루까는 하느님 나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 의식주를 걱정하는 일보다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25-33)할 만큼 하느님 나라가 급하고 중요하다고 전한다. 우리는 당시 예수를 따라 다니던 군중들의 처지를 고려해야만 이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아 그날 그날을 살아가야 했던 어부출신의 제자들, 예수의 양부 요셉처럼 남의 집 문짝이나 고쳐주고 부서진 의자나, 탁자를 수리하고, 총독부에 끌려가 죄수를 매달 십자가나 다듬는 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목수출신이거나, 간음하다 들켜 돌에 맞아 죽을 번 했던 윤락여성 출신의 여인들, 아니면 돈한푼 잃어버리면 등불을 켜고 온 방을 비질하며 그것을 찿아내야 했던 가난한 서민출신의 여인들, 물론 자케오같은 세무소장도 있었고,문둥병에서 낫게된 지방유지 회당장 시몬도 있었을태고, 헌병대장격인 로마 백부장도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은 하루 종일 장터에 서성이며 일꾼으로 써줄 포도밭 주인을 기다리는 하루 품싹꾼들처럼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였을 것이다. 이런 청중에게 끼니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하느님 나라만 찿으라고 했을 때,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허튼 소리로 들리지 않았을까? 예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예수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를 찿아 나섰다는 이야기도 복음에 전해지고 있다(마르 3,21-22). 예수는 누구보다도 에민하게 서민들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신경을 썼던 양반이었는데 청중들의 처지를 전혀 몰랐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했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를 따르고 싶어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내 걸었다.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요. 그리고 당신을 따르겠읍니다“, 그러자 예수는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루까 9,57-60)고 답변한다. 예수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도보다도, 조상에 대한 예의 보다도 하느님의 나라가 더 급했고 중요했다. 당신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매일 일용할 양식과 더불어 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주의 기도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일용할 양식에 앞서서 구해야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라는 신약성서 안에서 100여번 찿아 볼수 있다. 예수는 말씀만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분의 삶이 그랬다. 예수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병자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자 어느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다. 그때 그분은 ”나는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이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까 4,22-44).라고 대답하며 그들을 떠났다. 그분은 당신의 사명을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할 때에도 둘씩 둘씩 짝지워 보내면서 ”너희는 그 동네에 가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여라“(루까 10,10)하는 사명을 맡기셨다.
도대체 예수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급박하다고 하는 하느님의 나라란 무슨 나란가? 우선 ”하느님 나라“라는 귀절에서 주어는 ’하느님‘이고, ’나라’란 하느님이란 주어를 보충해 주는 수식어다. 문법상의 구조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그렇다. 영토적 개념으로 ‘왕국’을 의미하는 ‘나라’는 그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국가란 영토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고 주권과 국민이 전제된다. 여기서 나라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란, 하느님의 생각이란 무엇일까?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과 같지 않다고 했다. 하느님의 길,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것보다 높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에겐 신비다.그 신비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 역시 인간에게 신비다. 그래서 하느님이라고 고백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비가 전해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것에 비할 수 있다.”,
“하늘 나라는 밭에 뭍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찿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포도밭 주인이 일꾼에게 하루 품삯을 지불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로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이 밖에도 그물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 등의 많은 비유들이 있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비유는 약 40가지가 된다. 이 40가지 중에서 대부분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다. 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해설에 의하면, 이세상에선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로 언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유를 든다는 것은 이 두가지 실재를 모두 아는 사람만이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이세상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두가지 실재를 모두 알고 있는 적격자라는 것이다. 결국 가장 귀한 진주, 보물, 혼인의 기쁨, 잔치의 즐거움 어느 것도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을 대변해 주지 못하고 그 것을 상상케 해주는 비유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은 마태오 복음 12,28: “나는 하느님의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쫏아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는 귀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악의 세력과 반대가 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예수의 기적은 거의 대부분 악의 세력을 거스려서 발생한다. 꼭 마귀추방만이 아니라 가난, 질병, 소외, 위선, 교만 모든 것이 악의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예수는 이 악에 세력에 대항하는 일을 자신의 일생의 사명으로 간주하였다.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1-2을 낭독하고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을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밝혔다. 요한 세자의 제자들이 찿아와 예수께 당신이 누구냐? 무엇하는 사람이냐? 물었을때도 역시 같은 내용을 반복하였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께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루까 7,23). 적어도 이것이 예수가 이해한 하느님의 뜻이요, 바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임하도록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가난이 어째서 악이냐고, 오히려 부가 악이 아니냐고. 그래서 예수님이 “가나한 사람이 행복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여기에 대해 나 자신은 견해가 다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축복하셨지 가난을 찬양하시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셨다. 제자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라는 것이다. 가난자체를 찬양하셨다면, 그들로부터 가진 것마저 빼앗으라고 하셔야했을 것이다. 부를 공박하신 것은 부 자체가 악이어서가 아니라, 부로 인해 안일을 추구하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없이도 돈만으로 잘 살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질 위험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는 견해는 우리의 삶이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요, 가난한 사람일 수록 자신의 무능력으로해서 하느님께 의존하게 되는 유익성 때문에 가난을 축복하였다고 본다. 가난함으로써 가진 자들의 것을 배아퍼하고 시기하고 그 것에 연연한다면 상황은 더 나쁘지 칭찬할 만한 것이 못된ㄷ다. 여기서 마태오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연유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계급투쟁의 혁명가는 절대로 아니였다. 실제로 예수는 부자라고 해서, 권력있는 자라고 해서 미워했다는 것을 찿아 볼 수 없다. 돈많은 세관장 자캐오, 유대인의 회당장이었던 야이로, 시몬, 로마 백부장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복음에 나타나는 한가지 실화를 예로 들어 볼수 있다. 루까 복음 7,36-50에 나오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 이야기다. 장소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이다. 시몬은 바리사이파 사람이다. 여기에 어떤 용서받은 죄녀가 예수께 향유를 붓는다. 이 루까 복음을 마태오26,6-13과 마르꼬 14,3-9, 그리고 요한12,1-8을 연결시켜 보면 더욱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시몬은 나병환자 였었다 장소는 베타니아였으며, 여인은 같은 마을에 사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였으며, 이 향연은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환영하기 위해 베풀어 진 것이었다. 여기서 시몬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아니면 죄녀였던 마리아가 못마땅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에 초대로 없이 드나든 것이 기분 나빴을 수도 있다. 어떻든 우리의 촛점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란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사람이 다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빚을 탕감 해 주었다. 누가 더 하느님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답은 자명하다. 더 많이 빚진 사람이다. 자 시몬은 예수님이 나병을 고쳐 준 사람이였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 적어도 루까 복음엔 행실이 나쁜 여인, 어쩌면 그 어느 새벽 아침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둘러싸여 돌로 맞아 죽을 뻔하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나고 용서받은 여인인지도 모른다. 이 두사람 중에서 예수는 마리아를 더 많이 용서하였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을 미워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바리사이 파 사람이였고, 예수를 위해 향연을 베풀만큼 부유했으며, 지식층의 사람이였고 백성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다. 예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마리아를 더 사랑했을 지언정 시몬을 미워했던 것은 아니였다.
예수를 혁명의 기수로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사람은 에수를 빙자하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혁명가 였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였다. 예수가 대결했던 것은 악 자체였다. 오히려 예수는 사람에 대해선 어떤 사람이건 미워하지 말길 바랬다.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원수사랑은 얻어맞고, 당한것만으로도 억울한데, 그를 미워함으로써 원한까지 덧붙여 스스로의 상처를 더하지 말라는 것이 일차적이라고 본다. 이차적으로 원수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주자는 것이다. 미움과 원한으로부터의 자유, 해방. 이것이 예수가 부르짖은 해방신학이요, 혁명이다.
예수님이 이해하고 가르쳐 준 하느님의 나라는 이러한 평화의 나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서 느끼는 기쁨의 다스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구원의 총괄개념이다. 인간이 욕망하고 있는 모든 것들, 평화, 용서, 정의, 낙원, 영원한 생명처럼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집약하는 개념이다.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거져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달린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어떤 정치적인 투쟁, 윤리적 도덕적인 실천으로 요구되고, 그래서 실현 될 수있는 나라는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영”, 또는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만아니라, 바로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도 임하게 하소서“하고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물로서의 성격은 ”잃어버린 아들“(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구원은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 가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되돌아 서는 일이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일이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그 자비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자 이제 결론을 낼 때가 온 것같다. 과연 하느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미 온 것인가. 아직도 기다려야 할 미래의 것인가?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온 것은 교회였다. 그러면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인가? 우선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 지는 곳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생애에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온 생애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기 때문이다.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라 받아들였다. 그가 행한 업적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된다. 알렉산더가 이룬 제국,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이 건설한 제국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하다. 그가 행한 것이라곤 성서가 기껏 불려서 5000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니며 빵을 얻어먹고, 설교를 듣고 일부의 병자들이 치료를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1년반에서 아주 길어야 3년이 고작이다. 성모병원이 치료해준 사람은 몇배는 될 것이다. 어쩌면 당시에 세레자 요한보다도 별볼 일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세레자 요한에게는 그가 광야에 살았지만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들도 그를 찿아 왔다. 여기에 비해서 예수는 제자들을 찿아 나섰다. 그가 제자를 뽑았다. 그가 민중들을 찿아 다녔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된것은 무슨 이유일까? 왜 알렉산더, 요한세자는 역사의 인물로 남았는데 예수는 신봉자들의 예배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당신의 말씀처럼 땅에 떨어져 죽은 한알의 겨자씨가 아닐까 그래서 백배의 열매를 맺고, 무성히 자라서 새들이 거주하는 나무가 된 것은 아닐까? 그가 심은 씨앗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씨앗이었다. 그는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운 적도 없다.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세운 적도 없다. 배고픈 사람을 위해 자선단체를 조직한 적도 없다. 그에게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그날 그날 닥치는대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깨닫게 된 것을 하루하루 실천했을 뿐이다. 바로 여기서 예수안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 이 세상은 아직 하느님의 뜻대로만 움직여 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의 완성은 아직도 미래의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있다.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면 역시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교회는 교회 자체가 목적일 수 없고,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향한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와 교회가 구별된다. 과연 우리 교회는 모든 제도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혜화동 성당, 아니면 명동성당, 바티칸 ?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제도가 아니다. 바로 너와 나의 모임이다. 예수님 처럼 살겠다고 모인 너와 나의 모임이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오늘을 살고 있는가? 하느님의 다스림이 나에게 오늘 이루어지고 있는가?도함께 질문되어야 한다고 본다.
4. 신약의 하느님-(가)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