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느님 체험

2. 하느님 체험
2.1 하느님의 체험문제와 인간의 체험 구조
“현대 신학의 위기가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데 기인한다”는 하센휫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신체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체험이라는 말을 만히한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아직까지 온전히 규명되지 않은 어려운 학문개념 중의 하나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내적으로 신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체험으로해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회의적 시선에도 구애를 받지않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또 종교적 성스러움의 체험으로 그들의 삶이 달관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인간은 하느님을 봄으로써 죽게 된다는 사상을 자주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인간의 체험 구조를 볼때, 체험은 논리정연하거나 체계적이지 못하다.하지만 직접적인 만큼 강렬하다. 여기서 체험을 단순한 지각행위, 즉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사물을 알게되는 행위자체를 말하진 않는다. 그 내용을 깨닫고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서서히 발생하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도 발생한다. 항상 기존의 지식의 체계 위에 이루어지는 체험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체험의 객관성- 체험은 각자에게서 이루어지는 주관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이말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하는 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실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체험의 객관성을 말해준다.
체험의 주관성- 체험에는 항상 체험자 자신의 주관적 요소가 늘 작용한다. 토마스는 “수용되는 것은 수용하는 것에 따라 받아들여진다”라는 말을 했고, 칸트 역시“받아들이는 사람의 양식에 따라 대상이 받아들여진다”는 말로 인식의 가능성을 표현했다. 한 실재의 체험은 주체인 체험자의관심을 전제로하고 있다.
체험의 실천적 성격- 논증을 통해 이루어지는 간접적 지식은 탁상공론으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그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전통적인 신론이 비판되었다. 물론 여기엔 경험적인 입장이 강하게 작용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체험이 실천적으로 중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예컨대, 어린이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희망을 지닌다. 성숙하면서 실천적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다. 이처럼 수정과정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체험을 거듭하면서 어떤 입장을 더 폭넓게, 그리고 실천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체험의 역사적 성격- 우리가 현실화 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할 때, 영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목표는 항상 과거와 관련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여러가지 요소, 부모로부터, 가정환경, 학교교육, 주변 인물, 종교, 경제, 문화등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은 이미 우리 안에 체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험의 부정적 성격- 체험은 항상 어떤 상승선을 향해 직진하도록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던 선입견 내지 선지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므로써 그 실재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형성된다. 새로운 체험은 기존의 지식과 대립되는 데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런 체험이 우리에게 고통과 실망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체험의 긍정적 성격- 새로운 체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실재에 대한 강력한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 자신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인간의 체험, 이 체험의 축적으로 인간이 깨닫게 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은 유한하다”는 한계성의 인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한계없는 갈망을 체험한다. 인간의 한계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구되고 있는 무한성, 영원성에 대한 희망을 지닌다. 여기서도 우리는 체험을 바당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아기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2 신화의 신체험과 신이해
신화는 고대인간들이 체험한 신에 관한 진술이다. 다신론의 성격을 띠우고 있는 이런 진술은 이스라엘이 체험한 유일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만 그렇다. 고대인간에게 주어진, 짧은 신 지식의 기초 위에 그들이 체험하는 신적인 현상을 현상 하나 하나에 인격성을 부여한 점이 이스라엘이 체험한 유일신 진술과 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화가 시대적으로 구약에 앞선다고 볼 때, 구약은 이러한 다양한 신적 현상을 한분의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체험하면서 과거 각각의 신적현상을 각각의 다른 신들로부터 유래하게 되었다는 신화적 입장을 수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탈신화화작업, 또는 비신화화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 신화는 여러 제신들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의 최고의 권위에로 촛점을 향한다. 이런 점은 다신론 안에 어떤 유일신론에로의 내재적 경향을 보여준다. 신화의 다신론적 진술은 당시의 가부장적 제도을 반영해준다. 최고의 신이 있고, 그의 아내가 있고, 가족회의와 마찬가지로 제신들의 회의가 묘사된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그리이스 신화는 여러 제신과 아울러 악마를 운명의 이중적 지배자로 이해하였다. 말하자면 선과악의 원천이 서로 다른 이중적 구조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은 한분으로서 인간 이상의 어떤 능력은 비록 악일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업ㅂㅅ었다.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세를 죽이려 했던 악의 신은 다른 신이 아니라 야훼일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이 병적 조사로 잘못을 범했을 때에도 그 백성에게 불행을 초래하게 했던 신도 바로 야훼일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모든 구별, 모든 이원론적 원리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악마적인 것이 원래 야훼 자신 안에 거처를 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 이해에 있어서 초기 단계였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적으로 신의 단일성에 집착한 나머지 야훼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경신행위가 소홀해지는 경향을 보게 된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우상을 쳐부수는 일에 더 집착을 보이고 있다.
호머나 헤시오도는 신들에게 절도나, 간통, 살인등의 혐의를 부과하였다. 그래서 인간과 신이 혼동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그만큼 신체험이 인간의삶과 밀접한 관련속에 있었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
하센휫틀은 그리이스 신들에게는 호칭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이스 신은 2인칭 <너>로서가 아니라 3인칭 <그>로서 일컬어 졌다는 것이다. 일찌기 마틴 부버는 「너와 나」라는 저서에서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부버에 의하면, 진정한 만남은 <너와 나>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지, <나와 그>로서는 인격적인 만남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책에서 부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제 3인칭으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것을 의미한다며,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 직접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신을 믿는다”. 부버의 이말은 체험의 깊은 면모를 말하고 있다. 어떤 익명적인 하느님, 낯선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긴 하지만 신화가 드러내는 신의 속성으로는 시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불사불멸성,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인간창조, 인간 운명의 변경, 자연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천체운행(천둥, 번개, 비, 홍수, 가물 등)을 든다. 말하자면 고대인간들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체험했고, 따라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실재하고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고, 조정하고 있다고 체험한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선성, 아름다움등도 신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스라엘도 같은 문맥 안에서 한 민족공동체로서 신적 존재가 지배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과거 신화의 인간들보다는 수정된 차원에서 신의지배가 일방적인 권력 남용이라기 보다는 보호해 주시는 자비의 신으로 체험한 것, 또 근원적으로 그 지배권이 여럿이 아니라 한분이라고 보았던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신적 현상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은 그리이스 신화에서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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