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보게 될 때 삼위일체를 본다-사랑만이 신앙행위에 합당하다.

 

2 사랑만이 신앙행위에 합당하다.


[H. Urs von BALTHASAR, L’amour seul est digne de foi(Glaubhauft ist nur Liebe), 1966, 88-89.      103-104.]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일상적으로 미소를 보낼 때 그 어머니는 어느 한 순간 자기 아이로부터 처음으로 미소의 응답을 받는다. 어머니는 아이의 마음에 사랑을 일으키고 그 아이도 역시 사랑에 눈을 뜨면서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감각이 비어 있던 반응은 ‘너’라는 중심축 둘레로 모여들면서 의미를 갖게 된다. 초월적인 것에 의해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이루어진 사랑의 놀이가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에 직관과 개념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이 자기 놀이를 시작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 앞에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 사랑은 하느님 가정에서 흘러나온 빛처럼 발한다. 또한 사랑은 이 빛 덕분에 절대사랑을 소상하게 볼 수 있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자기 고유의 빛을 자리잡게 한다(2고린 4,6 참조)…..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존재의 근원자가 아버지로서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도 우리에게 미소를 보낸다. 우리가 피조물인 한 사랑의 싹이 하느님의 모상처럼 우리 안에 잠자고 있다……


순수한 포기로부터 오는 수용태도가 자기 자신만을 인식하는 모든 의지를 단념하고 뛰어넘는 사랑의 태도처럼 인지된다. 그래서 계시가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양상은 비인간적이고 하느님께도 당치 않다. 또한 신적 계시 자체도  인간 안에서 그와 같은 태도를 통해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사랑이란 선천적으로 사랑으로밖에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사랑이 텅 빈 상태로는 결코 조화나 일치를 이루어 낼 수 없다…..


사랑자체이시며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깊숙한 신비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자기비움(kenosis) 안에서이다. 비록 그것이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빛일지라도, 신적인 삼위일체가 현상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을 통해 – 주어진 것을 훼손하지 않고 – 그리스도의 현상을 밝혀 주는 유일한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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