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하느님-신약성서(예수의 하느님-하느님의 나라와 그 다스림)

 

1.2. 신약성서




1.2.1. 예수의 하느님




1.2.1.1. 하느님의 나라와 그 다스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heb) malkoth, (gr) basileia tou theou]와 그 ‘다스림’을 당신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 구약성서에서 이미 우리는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왕’(시편 47,6-9 ; 93,1 ; 이사 43,14이하 ; 44,6참조)이시라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윗과 살로몬을 비롯하여 지상의 왕들이 그 분의 대리자처럼 소개된다. ‘메시아-왕’이라는 주제도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야훼에 의해 권한이 부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시편 2,7). 이러한 생각이 바탕이 되어 후기 유다이즘에서는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 ‘다스림’ 이라는 표현이 추상화되어 나타난다. 이 개념들이 중재되어 새로이 하느님의 창조와 능력 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출애굽의 형태로 미래를 그리면서 역사의 완성을 지향한다. 역사의 종말에, 하느님은 이중적인 의미 안에서 그분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는데, 한편으로는 ‘다스림’으로 표현되는 진행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사건의 의미로 제시되고 –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라는 말에 부응하는 신적 주권에 의해 변화된 인간 사회공동체의 최종 상태라는 의미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최종적으로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다스림’이 점진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R. Schnackenburg).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양상 설명을 설교 주제로 삼으면서,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나타나는 여러 행위들을 성취하는 데에 불림을 받았다고 스스로 인식하셨다. 아직 그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하느님의 ‘다스림’이 충만한 상태이다. 예수님의 공적 설교의 첫 말씀이 이러한 행위들로 구성된다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하느님의 나라는 주어진 것이다(마태 21,43 ; 루가 12,32). 하느님만이 이 나라를 이루실 수 있으시고 예수로 하여금 그 나라를 이루게 하신다(루가 22,29). 인간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10 ; 루가 11,2)라고 기도하도록 초대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일한 조건은 하는님의 나라 도래에 대한 자기 준비이다. 믿음을 통해 인간은 자기 정신과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의 나라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마르 1,3 ; 마태 3,3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먼저 당신의 호의를 한없이 베푸시는 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당신의 권한을 강요하시기보다는 제안하신다. 그분은 인간을 우선 신앙에 초대하시면서, 인간의 자유에 신뢰를 두신다. 복음에 부합되든 반대되든 그 결정은 신앙에 맡겨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모세로서 새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를 거쳐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신다(마르 1,12이하 참조). 이것이 새 출애굽의 모형이다.


예수께서 몸소 말씀하시고 당신의 적극적인 육화로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영의 표지 아래 현존한다. 하느님의 영이 나자렛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완성시키신 하느님 말씀과 함께 한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에 대해 아주 강하게 주장한다(4,1.14.18 ; 10,21 ; 11,13참조). 특히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며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선포하실 때, 야훼의 위격화된 영이 거기에 작용하는 힘처럼 나타난다(마태 12,28). 이러한 의미에서 오리게네스를 비롯해 희랍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나라 자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몸소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나자렛 예수께서는 랍비 문학 장르의 전통아래서 하느님의 신비를 말하기 위해 여러 비유들을 사용하신다. 이 세상의 삶을 구성하는 사물에 대한 크나큰 사랑으로 갈릴레아를 무대로 활동하신 이분은 그 땅의 목동들과 농부들에게 ‘신학적인 장’이 되었던 자연, 동.식물들을 비유자료로 사용하신다. 거기서는 하느님을 특별히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 성서적인 전통에 따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을 삼가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는 양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일상 안에서 중재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얼마나 육체 조건적이고 지상적이고 인간 실존적인가? 이러한 설명 방법은 듣는 각자에게 질문과 해답이 열려 있다. 일상의 구체적인 사실이 각자의 삶에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실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은 구약성서에서처럼 그분의 ‘양면성’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동시에 가까이 계시면서도 멀리 계시고, 구체적이시면서도 손에 잡히시지 않으시며, 친숙하시면서도 두려우시며, 안심을 시켜 주시면서도 다그치시며, 빛을 발하시면서도 어둠에 쌓여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사라짐 중에 나타나시며 나타나심 중에 사라지신다. 모든 순간에 그분은 문제를 제기하시고 각자의 신앙은 그 해답을 찾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복음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어떤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동의어들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생명’의 개념이 그 첫 자리를 차지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되며(마르 9,43.45.47 등), 예수께서는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으로 소개된다(마태 7,14). 요한 복음서는 이를 ‘영원한 생명’으로 묘사한다(3,3이하.13이하).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생명으로 상속받게 된다고 한다(마태 25,34 ; 마르 10,17 등). 그 외에 ‘자기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마태 25,21.23), ‘영광에 참여하는 것’(마르 10,37참조), ‘빛의 자녀가 되는 것’(루가 16,8참조)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결국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분’이 ‘몸소 하느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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