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의 신비로서 계시로 알려지는 진리이고,계시를 떠나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또 계시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남김없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성삼위 신비는 창조계를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것이므로 창조된 사물에 비유하는 것은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삼위일체 신앙의 발단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성을 드러내주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하느님에 대한 역사적인 체험을  소화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났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험에서 그 사건의 계시를 절정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비적 신체험에 이어서   성령체험을 아울러 겪었다.


이처럼 역사 안에서 삼중형태를 지닌 신과 마주하게 되면서 이 체험을 어떻게 일찌기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받는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어떻게 융화시킬 수 있는가를 궁리하게 되었으며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구약에서는 위격이나 삼위일체를 기대하는것은 무리다. 역사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구약의 많은 본문을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그래서 창세기1,26절의 우리라는 말마디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인물의 방문(창 18,1-16)이사야의 삼중찬미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드러내는계시라고 보았지만 그 신빙성은 약하다.구약은 신약 계시의 준비일 뿐이다. 구약을 바탕으로 삼위일체의 신학적 전개는 어렵다. 하지만 구약의 계시가 궁극적인 신약의 계시를 지향하고 있는 경향을보여주고 있다.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측량을 뛰어넘는 파악할 수없는 하느님의 충만한 풍요성이다.     


신약성서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 정식은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는 분명한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일찌기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무엇보다도 신약성서는 삼위일체 신비가 그리스도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말해준다. 다시말해 성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결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창조,구원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얻어낸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명백하게 게시되는 정도에 따라 그 분명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체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비가 이성적으로 남김없이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본다.



삼위일체 신앙의 형성과정


초대 교회는 일찌기 입교자들과 신자들의 교리교육 때문에 사도적 복음선포를 요약된 형식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겼다.그리고 호교론자들은 이단과 영지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신앙 교리를 성문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삼위일체 신앙을 저해할 첫 위험은 성서 전통을 강하게 고수하며 성서적 유일신론을 옹호하려는 종교 철학적 조류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주론으로 불리우는 사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입양적 유주론과 양식적 유주론으로 나뉜다.


입양적 유주론은 (테오도토스)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으로서 세례 때 특별히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느님의 아들의 위치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양식론적 유주론은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현 양식으로 보았다.그들은 유일신 사상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서로 조화하기 위해서는 성부와 성자를 동일시 함으로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유주론자들과 달리 하느님안에 세 위격을 받아 들이기는 하지만 제2위와 제 3위격인 성자와 성령에게 같은 본질의 동일성을 거부하는 종속론이 또한 삼위일체론을 위협하였다.아리우스 논쟁 역시 이 부류의 경향을 띠고 있다.


결국 아리아니즘을 둘러싼 논쟁은 니체아 공의회를 개회하도록 이끌었으며,공의회 교부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출생하여 성부와 본질이 같다 라는 가르침으로 처음으로 성자의 참된 신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만을 동일본질성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구별성도 분명하지 않다. 이렇게 부족한 니체아의 삼위일체 교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교부들은 바실리오,니싸의 그레고리오,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였다. 이들은 삼위일체 신비를 해설하는데 성부,성자,성령 세위의 구별점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본질 단일성에 이르고자 시도하였다.


세 위격의 개체적인 표징들은 성부의 원천성,비출생성과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출생성,성령의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성으로부터 드러난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종래의 어느 신경보다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설되어 있는데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창조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그렇다고 세 하느님이 아니고 한 하는미이 계신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삼위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삼위의 구별성을


성부의 비출산성,비발출성,성자의 출산성,성신의 발출성에서 찾아내고 동일한 영광,동일한 위엄,동일한 신성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


1.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의 하느님이시며 이 위격들은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


2.세 위격들이 구별된다. 성부 위격은 무근원적 위격이고,성자의 위격은 성부로부터 출생되는 위격이며,성신의 위격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리고 출생과 발출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래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3.이 하느님의 세 관계적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유일성이 강조된다.


4.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 안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는 하나의 역사 원리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격언


기본속성은 다섯 개,관계들은 넷,위격들은 셋,발출은 둘,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증명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성삼위일체이다.


5. 출산되지 않음,출산함,출산됨.발출함,발출됨


4. 하느님이 출산한다.그가 아들로서 출산된다.그가 성령을 발출하며,성령으로서 발출된다.


3.성부,성자,성신      2-로고스의 발출,성령의 발출  1.한분이신 하느님


삼위일체론의 중심 사상과 그 적극적 의미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결단의 기본적 관점은


1.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어떤 반신 반인같은 중간적 존재로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제대로 중재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2.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는철저한 유일신론적 신앙고백에 그 바탕을 두     고 있다.


3.하느님과 인간의 역사를 진지하게 고려하자는 노력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적극적 의미는


1.위격은 세이요,본체는 하나이신 하느님 이라는 설명은


        단일성과 다수성의 본뜻에 대한 물음을 이야기 한다.


2.위격으로는셋이요 ,본체로는 하나이신 하느님이라는 설명은


        위격개념과 상관된 것이다.


3.위격으로는셋이요 ,본체로는 하나이신 하느님이라는 설명은


        상대와 상관의 절대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먼저 이러한 공식은 하나의 언어규정이다. persona란 다양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용어로서 사용하자는 규정하게서 쓰인 용어이고 반대로 substantia란 용어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자는 규정하게서 사용된 개념이다.




부정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


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비는 어쩌면 부정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이렇다가 아니라,이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이다.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느님을 설명할 수없다.(도덕경 1장 생각해보고)말하자면 암시이지 설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부분이 더크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물론 무작정 그분을 받아 들이는 무비판적 입장을 거부한다.이것은 참 신앙의 자세도 아닐 뿐더러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자세도 아니다.신앙이란 야곱처럼 부단하게 하느님과의 한판의 씨름이라 할 수 있다.요즘시대를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느님과 말하려는 사람은 적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아는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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