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예언된 마리아

 

2. 구약에서 예언된 마리아


16C의 가톨릭 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성서가 마리아에 관하여 거의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거의 일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일치된 의견으로부터 서로 상이한 결론을 도출시켰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 사실을 마리아에 관하여 더 잘 파헤치라는 계기로 삼았는가 하면,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마리아를 어둠 속에 방치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근거로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마리아론에 충분하고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는 성전(聖傳 : Traditio)을 지적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성서에서조차도 마리아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다는 이유로 마리아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서를 피상적으로 대하고 마리아에 관한 보도를 순전히 양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신약에 있어서 조차도 마리아에 관한 보도는 빈약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마리아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하겠다.1)


마리아는 구약 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구약이 서술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의 내림과 함께 구세주의 모친인 한 여인의 모습이 점차적으로 묘사되어 왔고2) 그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살피는 제2부 55항에서 이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55항에서 제시하고 있는 마리아에 관한 4가지 성서적 증거를 중심으로 구원 역사 안에서 예언된 마리아의 모습을 살피고자 한다.




2.1. 뱀에 대한 승리


창세기 3,1-24의 설화 속에서 나타나는 뱀은 지식과 교활로 무장한 “모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하며”(창세 3,1), “거대한 유혹자”(창세 3,13)로서 그 첫 출현부터 인간 본성의 원수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설화자가 뱀 자체를 악의 세력과 동일시하거나 더욱이 사탄의 상징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악의 기원을 파헤치려 한 것은 아니다. “악의 기원에 대한 원인론은 없다”(Westermann, z, St).3) 설화자의 주된 관심은 인간과 인간의 죄책만이 문제이다. 성서의 저자는 일종의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뱀을 통하여 형상화된 악을 보았으며, 그 악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피조 세계 안에 기존해 있는 것으로서 바로 인간을 노리며 숨어서 엿보는 그리고 도처에서 인간과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는 악이다. 그리고 뱀과 인간의 불가해한 관계 안에서 인간이 대처하고 있는 악과 인간의 관계를 볼 수 있다.4) 3,155)에서는 인류의 지극히 자애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어머니 마리아가 예언되고 동시에 악의 형상화인 뱀과 그에 대한 여인의 후손의 승리가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가장 밀접히 성자와 일치하고 가장 완전히 죄와 죽음을 쳐 이기신 여성이다.6)


교회헌장은 창세 3,15의 이 예언적 기록의 문헌가치가 자의적, 명시적, 또는 함축적 또는 표상적 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만 구세주의 어머니는 <예언적으로 암시되어 있다(prophetice adumbratur)>(교회 55)고 특별한 뉘앙스를 갖고 제시하고 있다.7)




2.2. 동정녀 잉태


동정녀 잉태에 관한 이사 7,14의 기사는 마태 1,22-23과 연관되어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 탄생에 관한 은밀한 예언이라고 생각된다.8) 이사야 예언자의 첫 등장은 기원전 8C경 팽창하는 앗시리아의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방국가인 시리아와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이 유다도 여기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유다 땅을 침공했을 때(시리아-에프라임 침략전쟁/733-732)이다. 이사야는 동맹 가담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앗시리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막아 보려는 아하즈의 계획도 저지하려 하였다. 이사야는 그와 같은 동맹들이 유다의 정치, 종교적 자유를 위태롭게 할 것임을 분명히 통찰했기 때문이었다. 이사야는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야훼의 행동을 볼 수도 없는 백성에게 가서 말하라는 사명을 받는다(6,9). 이사야는 왕이 어떠한 징조를 요구하든 그 징조를 통해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실증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아하즈는 실리를 추구하여 신앙을 저버린다.9) 그리하여 이사야는 신앙을 저버린 처사에 분노하여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고 선언한다. 


이 임마누엘 예언에 관해서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쏟아 왔다. 여기서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almah는 미혼 여성의 처녀성을 가리킨다(예를 들면 창세 24,43; 출애 2,8; 잠언 30,19).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뜻의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질 아기의 출생이 이사야의 시대와는 먼 미래의 인물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고 9,1-7의 시가 아직 메시아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이사야 후기의 것이라 하지만 다윗의 왕좌에 분명히 앉게 되리라고 예언되고 있는(9,6) 이 아기가 ‘메시아적’인물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10) 따라서 이 구절은 신약의 마태 1,22-23과 연관되어 구세사 안에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11)


미가 5,1-212)에서도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태어날 메시아적 인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함락(B.C.721년) 이전에 쓰여진 미가 1,6과 예레 26,18을 참조한다면 미가의 예언활동은 늦어도 아하즈(B.C.742-725)나 히즈키야(B.C.725-697) 통치기간에 이루어 졌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사야와 동시대 인물임에 틀림없고(이사 1,1; 미가 1,1 참조) 시대적 배경도 같다고 할 수 있다.13) 미가는 당시의 고난을 메시아 출생에 연결한다. 메시아가 나타남으로써 재난은 사라지고 구원받은 자들은 회복된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에 다시 속하게 될 것이다. 미가는 메시아에 관한 개개표상 재료들을 스스로 창작해 낸 것이 아니라 ‘남은자의 귀환’이나 ‘아기의 출생’에 관한 사상은 이사야 7장 3절 14절에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의 제의 전승에서 이어 받은 것 같다.14) 따라서 이 구절도 이사야서의 동정녀 잉태에 관한 예언과 함께 구약에서의 마리아적 가치가 있는 성서본문으로 취급된다.




2.3. 가난한 자(ANAWIM)


구약성서 안에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아나뷤’(anawim)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아나뷤’이란 단어는 주님의 ‘겸손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란 뜻으로 처음에는 물질적 빈곤만을 가리키는 단어였다.15)


그러나 점차 그 표현은 아주 깊은 종교적 의미로 갈아입는다. 마치 하느님의 영이 창조 이전의 원초적인 암흑 시기에 만물의 존재를 생성키 위해 움직였던 것같이, 야훼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가난을 펼치신다. 팔레스티나 원주민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신 분은 야훼였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과 기업을 주신 분도 야훼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많은 경우에 자신들의 노력에만 의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지만, 야훼께는 지극히 불충하고 완고한 마음을 갖도록 하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이를 수 없는 질책을 받았고 또 야훼 하느님의 징계도 받았다. 이윽고 예언자들은 야훼께 충실하고 약속의 상속인이 될 소위 이스라엘의 ‘남은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이사 6,13; 37,31; 미가 4,6-7).


점차적으로 이 ‘남은자’에 대한 사상은 ‘야훼의 가난한 이’, ‘아나뷤’에 대한 사상으로 통합되었다. 구약에서 가난한 이의 완전한 모범은 예레미야 예언자였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소명을 결코 방심하지 않았으나, 예언자의 능변은 갖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그는 주님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에 전했고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리하여 그의 삶은 희망과 사랑으로 충실했던 야훼의 모든 가난한 이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예레 20,13 참조).16) “이처럼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겸손한 이들 그리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계시하는 것을 부유하고 권세 있는 이들에게 계시하는 것보다 더 즐겨 하신다. 즉 ‘아나뷤’ 안에 보다 순수한 이스라엘의 종교성을 집중시키시고 이들 안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희망과 성실성을 길러 주고 계신다.”17)


신약에서 마리아가 영보 사건 후에 엘리사벳을 찾았을 때 그녀의 사촌은 이렇게 외쳤다.:“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리니”(루가 1,45). 또 예수께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첫 제자이자 야훼의 가난한 이의 대표자로, 겸손한 이들의 영적 승리자이며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의 희망의 실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도우러 오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아나뷤’의 노래를 묘사한 것이다(루가 1,46-55). 이 위대한 찬미가인 마니피캇(Mangnificat)은 구약의 온갖 ‘아나뷤’의 테마가 한데 어울려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나뷤 한사람 한사람, 참 이스라엘 한사람 한사람은 마리아를 준비해 왔고 마리아를 소리 높여 외쳐 온 것이다.18)




2.4. 시온의 딸(Filia Sion)


‘시온의 딸’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3번 언급되어 있다.19) 원래 ‘‧‧‧‧의 딸’이라는 표현은 미가서(B.C.740)에서 맨 먼저 나오는데 그 기원은 인구통계에서 사용된 말이다. 도시에 이 말이 적용될 때에는 ‘‧‧‧‧의 부산물’, ‘‧‧‧‧의 위성도시’를 뜻했다. 미가는 ‘시온의 딸’이라는 용어를 북왕국의 마지막 날에 재난을 피해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온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구역을 가리켜 사용하였다.


성벽 북쪽, 성전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이 새로운 구역은 예루살렘과는 다른 지역이지만, 전적으로 예루살렘에 의지하고 있었다. 미가와 스바니야가 언급한 참 ‘시온의 딸’은 이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은 성문 주의를 따라 빈곤하고 착취된 무단 출입자로서 정착했다. 미가 이후 거의 일세기 동안 성문 주위의 체류자들은 부랑인 취급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은 북왕국의 운명을 피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앗시리아 군주들과 계속 연계를 가진 반면, 북쪽에서 피난 온 성문 밖 체류자들을 조롱하였다.


이런 현상을 두고 스바니아(B.C.640)가 예언을 하게 되었고 그 내용은 하느님과의 화해가 권세 있는 자와 특권층인 도시 거주자들로부터 오지 않는 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20), 반면에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는 야훼의 가난한 자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었다.21)


유배 이후 이사야의 제자들은 야훼께서 당신의 신부로 ‘시온의 딸’을 다시 간택하는 날을 시온·예루살렘에 알리면서 스바니야 예언자의 예언을 재확인하고 있다.22)


이러한 구약의 ‘시온의 딸’에 관한 예언은 신약의 루가복음서의 빛을 따른다면 마리아를 통하여 성취되고 있다. 루가의 1,28-33은 전적으로 스바니야 3,14-18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다음의 [표 1)]를 참고한다면 더 명확해 진다.














[표 1)]  스바니야서와 루가복음의 비교

[표 1)]  스바니야서와 루가복음의 비교


스바니야 3,14-18


루가 1,28-33


환성을 올려라

시온의 딸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시니

시온아, 두려워 말라

너를 구해 내신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기뻐하여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태중에 아이를 가질 것이다.


예수(곧 구세주)

그는 왕이 되리라


이 비교로 루가의 성모영보 설화는 ‘시온의 딸’과 마리아를 동일화시키려 하였음이 분명해진다. 즉, 루가는 마리아를 남은자이며 가난한 자인 이스라엘과 동일화시키고, 더 나아가 마리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마리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재 일치하게 되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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