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3.3. 근세


종교개혁 이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쟁론을 벌리는 가운데 점점 더 반(反) 마리아적 입장으로 경직되어 갔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 측에서는 마리아 신심이 점차로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17,18세기, 즉 계몽주의 시대에는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의 사상가들도 마리아론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잇단 마리아의 발현보도1)로 인해서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과 공경이 새롭게 소생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미 고대교회에 등장하여 중세에 토론의 대상이 되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마리아론의 주제들, 즉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성모 몽소 승천에 대해 신학적으로 더 깊이 논의하려는 관심이 일깨워졌다.


트리엔트 공희회의 교부들은 (원죄론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한 가르침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물음에 의식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DS 1516). 17세기에 이르러 이를 믿을 교리로 규정해 달라는 신자들의 거센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황은 거절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30)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 문제가 새롭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교서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DS 2800-2804)를 통해서 교도권적으로 이 가르침을 수용하였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은(特恩)과 특대(特待)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는 확고한 가르침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되었고,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이 굳건하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DS 2803).


이 교서는 신학적으로 둔스 스코투스의 논거를 수용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를 미리 앞당기는 “선행구속”이란 신학적 개념은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가 모든 인간의 구원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의 보편성과 합치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영혼과 육신 모두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신앙적 확신은 이미 중세에도 그렇게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적으로 결정한 사건은 이제 곧 성모 승천도 믿을 교리로 선포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이미 반 종교개혁 시대에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기에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 (assumpta quia immaculata)”는 논거가 형성되었는데, 이 논거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전후로 신학적 관심이 다른 데로 쏠렸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 성모 승천 교의는 1950년에 이르러서야 교의적으로 교황 비오 12세의 교서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DS 3900-3904)를 통해서 반포되었다. 그 구조와 논리 전개에 있어서 1854년의 교서와 흡사한 점이 많은 이 교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원죄가 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 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 계시된 믿을 교리이다”(DS 3903).


교황들은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와 성모 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신학서적과 특히 전례적 실천에 기록된 오랜 교회의 전통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 교리 선포에 이어서 계속된 논의에서 제기된 질문,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corredemptrix)”라고 교의적 선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근거로 들 수가 없었다. 벨기에의 추기경 메르씨에(Mercier)는 1913년 하느님의 모친의 중재성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라는 요청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러한 착상의 근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는 중재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성부의 활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재자와 그 중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류의 활동도 아울러 필요하다는 데에 있다. 마리아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께 “예”라고 수락함으로써 이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로써 본질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포괄적으로 구속자를 위하여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중재자이며, 공동 구속자라고 지칭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쉽사리 오해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고, 그래서 구속자, 중보자라는 명칭은 완전한 의미로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해당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교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중심적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손상할 위험이 있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일치 11)가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황 비오 12세의 재위기간(1939-1958)은 마리아론을 위해서는 특별하고도 풍요한 시기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렬한 마리아 공경자였으며 마리아 교리와 마리아 공경을 강력하게 촉진시키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비오 12세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세계를 원죄에 물들지 않는 마리아의 성심께 봉헌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마리아 여왕 축일을 정하였다. 1953년에는 마리아 성년이 선포되었으며 교황의 주재하에 마리아 아카데미 기관과 학부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마리아 연구를 위한 연합기구가 결성되고, 마리아에 관한 저서가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의 절정은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된 성모승천의 교의화였다.


그러나 50년대 말엽에는 마리아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과열된 마리아 공경을 힘자라는 한 조절하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서 파티마 성모상이 이탈리아 일주를 통해 이탈리아를 마리아께 봉헌하려고 운동을 벌리던 ‘기적의 순례단’을 맞이하여, 교황은 신자들이 생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명백하게 강조하면서도 계획된 봉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신학적으로는 20세가 초반의 교부학의 부흥에 영향을 받아서 교부들의 유형론적 사고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마리아와 교회가 유형론적으로 일치한다는 데에 점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렇게 마리아론을 교회론과 연결지어서 고찰하는 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수용되었다. 1950년에 성모 몽소승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 것은 이른바 “특권 마리아론”의 정점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서 20세기의 마리아론의 경향은 마리아의 유형론적 의미와 그녀의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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