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성사-신약성서에 나타난 사제상(!)

 

2.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제상




2.2.1.  모든 신자가 사제이다.


부활 후의 교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와는 구분된 신분으로서의 제의적인 사제(ιερευσ)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서로 형제이며 자매이고, 모두는 사제라고 지칭되었다. 베드로 전서에서는 출애급기 19장 6절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용한다. 모든 신자들이 왕이며 사제이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 왕다운 제관, 거룩한 겨례, 그분이 차지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 베드 2,9; 참조: 묵시 15 이하; 5,10). 요한 묵시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묵시 1,6; 참조: 5,9-10). 신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사제라는 구약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구약에서의 중요한 두 직책인 왕과 사제가 이제는 모든 신자들의 새로운 품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제물을 바칠 장소로 구분된 성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 현존의 장소, 즉 성전이 되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1고린 3,16; 참조: 2고린 3,12-18). 새로운 전례인 “빵을 나누는” 성찬례는 성전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제물에 대한 의미도 바뀐다. 구약에서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제물을 사제의 손을 통해서 바쳤다면,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이것이 곧 정신적인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예식적인 희생제사 대신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영적인 희생” (1베드 2,5)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는 직무를 맡은 일부 사람들의 사명이 아니라 신자 모두가 해야할 사명이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백성으로부터 구분된 직책이었던 사제와 그리고 이와 연결된 성전, 제사에 관해서 신약성서에서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즉 모든 신자들이 사제이며, 스스로가 성전이고, 모두가 자신의 삶을 바치는 희생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1).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부른 예수와 친교를 이룬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더 이상 위험스러운 대상이 아니고, 신자들을 시나이에서처럼 그에게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진정한 중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자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이며(요한 15,14-15), 서로는 형제와 자매들이다. 신자들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께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로마 8,14-15; 참조: 2고린 2,12-18). 이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 홀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백성들은 뒤에 머물러 있던 것이나, 성전에서 대사제만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이다.


그러나 베드로 전서는 신자들의 사제직을 긍정하면서도 목자의 직무를 인정하였다(1베드 5,2-3 참조). 이런 점에서 사제적 백성이란 관념이 목자의 직무와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2.2.2. 새로운 형태의 구분: 파견(missio)


(1) 예수는 레위 가문에 속한 사제가 아니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에서의 사제는 아니었고, 그런 기준으로 보면 “평신도”였다. 그러나 신약 성서 후기 서간,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를 대사제라고 일컫는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관,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히브 4,14). 이렇게 히브리서에서 예수를 대사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만, 이는 구약의 대사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질서에 의한 대사제라는 것이다(히브 4,14- 10,18).


이것은 예수의 사제직을 멜키세덱과 연결짓는 것에서 나타난다 (히브 5,5-10; 7,1-25). 구약에서의 사제직은 아론에서 시작된 레위지파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의 사제직을 아론이 아닌 멜키세덱이라는 인물, 구약에는 두 번만 (창세 14,17-24; 시편 110,4) 언급되는 인물과 연관을 짓는다. 내용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멜키세덱처럼 예수도 “정의의 왕”, “평화의 왕” (히브 7, 2)이며, 예수의 사제직은 가문의 대물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불멸의 삶 (부활)에 근거한다(히브 7, 16);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제로써 (히브 7,3) 구약에서처럼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사로 봉헌하였다 (히브7, 27; 9,11-28; 10,10.14).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흘림으로서가 아니라 기도(히브 5,7), 복종 (히브 5,8), 자기 봉헌 (히브 9,12-14)를 통하여 제사를 드렸다.2) 그는 이렇게 자신을 봉헌하는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써 새로운 성소인 하늘 (히브 6, 19; 9,11) 즉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런 “사제적인 직무”를 위한 근거는 아버지로부터의 파견에 있다(히브 5, 4-6; 요한 17).


(2) 하느님 아버지에게 유일한 방법으로 파견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한다(마르 6,6-13).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는 예를 행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였는데, 예수는 이를 통해서 열두 제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직무에 참여시켰다. 부활 후에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제자들을 새롭게 파견함으로써(마태 28,16-20), 그들을 자신의 사도, 즉 “파견된 자”로 삼는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마태 28,18-19; 참조: 요한 20,19-23; 요한 17,18; 로마 10,13; 1테살 4,2)3).


(3)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는 말씀에 대한 봉사인데(사도 6,2-4; 참조: 1고린 1,1.17), 이는 파견을 전제로 한다: “나 바울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따로 가려내어진 몸입니다” (로마 1,1).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5). 말씀에 대한 봉사(복음 선포)에 속하는 것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화해의 봉사가 있다. 심각한 분열의 어려움을 겪는 고린토 공동체에 바울로가 경고하기를: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저들에게 그 범법행위를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사절 구실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시오” (2고린 5,19-20).


“화해의 말씀”에는 권위를 갖고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공동체를 마주 대하면서 공동체에게 화해하도록 경고하는 사명도 포함된다(목자의 직무). 사도들에게 맡겨진 말씀과 화해의 봉사직에는 다음과 같이 측면이 더 첨가될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일꾼 (διακονοσ)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 (1고린 4,1 이하; 골로 1, 25 이하; 1베드4,10).


* 전권 (εχουσσια)4) (2고린 10,8; 13,10)을 지니고, 가르침을 주며 (1고린 7,6; 7,17. 25; 11,17), 공동체에서의 추방하는 판결을 내린다 (1고린 5,1-8). 이러한 사도 직무는 법적으로 확립된 직위가 아니라 “신앙에 바탕을 둔 권위” (1고린 4,6; 1데살 2,7)이다.


*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추종하는 전권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째의 자리에 놓여있다(1고린 4,9-13; 2고린 4,11).




2.2.3. 사도 다음 시대의 교회 공동체의 직무


(1) 바울로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각기 성령의 선물 (χαρισμα)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여러 카리스마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생동적인 공동체로 자라나고, 거기에서는 누가 상위에 속하고 하위에 속하는 것이 없다. 바울로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직무이다. 물론 바울로의 권위는 그가 공동체를 떠나 있다고 해도 고유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1 고린12,4-11.28-30; 더 나가서 로마 12,6-8; 1데살 5,12).


바울로계의 교회구조를 보면서 결론은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로 자신이 특별한 역활을 하였고, 그 당시에 아직도 “종말임박설”의 배경에서 살았다. 그리고 아직은 큰 교회로 자라나지 않은 상태이고 그저 소수의 몇몇 공동체가만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것을 참조한다면 과연 바울로계의 교회 모델을 후대를 위한 규범적인 모습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의문시 된다.


(2)) 유대 계통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회당 공동체를 본 따서 “장로들” (πρεσβυτεροι)의 단체를 지도 위원회로 삼았다. 예루살렘에서는 장로들이 나중에는 사도들로 일컬어진 열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사도 15,2.6.22 이하). 거기에서는 추가로 (분쟁의 결과로서) 일곱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열두 제자의 가르침의 활동과는 별개로 봉사의 직무가 맡겨졌다 (사도 6,2-4); 그러나 그들 중에서 -아마도 개인적인 재능에 근거해서- 스테파노와 필립보는 복음 선포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도 6,8-7, 53; 8,5-13.26-40).


(3) 희랍권에서는 세속의 市행정에서 감독자 (επισκοποσ)의 직무를 도입하였다. 추측컨대 감독자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필립 1,1에서는 복수로 2“επισκσποι”!), 나중에는 (사목서간) 혼자서 공동체를 이끌었다. 감독의 지도역활이 가장 강하게 부각된 곳은 이단으로 위협을 받았던 사목서간에 나오는 공동체이다. 거기에서 지도란 무엇보다도 “건전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 디모 1,10; 2 디모 4,2 이하; 디도 1,9; 2,1; 참조: 1디모 3,2; 디도 2,7).


그외에도 봉사자 (부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필립 1,1; 디모 3,8-13).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일곱”과 비슷하게) 사회적-봉사적인 직무을 담당하였고, 필립 1,1에 의하면 주교와 함께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대표하던 복음선포 외에) 봉사가 공동체의 기본실현임을 드러내었다.


(4) 장로와 감독을 동일시: 사도 20,17-35에 보면 바울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에 사람을 보내어 그곳 교회의 원로(장로)들을 불러모아서 그들과 이별을 나누는데 28절에서는 이들을 감독이라고 지칭한다. 그외에도 1베드 5,1 이하; 1디모 3,2; 디도 1,6-7 (장로제도와 감독제도의 두개의 상이한 전통이 합쳐진 것으로 추측된다. 교계제도적 순서인 감독(주교), 원로(사제), 부제는 신약성서 내에서 아직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공동협의 체제였다가 주교 단일 지도 체제로 변하는 데, 이는 2세기에 와서야 정착된다.


(5) 신약성서에 나타난 감독자와 원로들에게 부여된 직무는 대략 세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공동체를 보살피는 사목의 직무 (사도 20,28; 1베드 5,2), 둘째로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는 직무(사도 20,29; 1디모 1,3 이하; 3,15 이하; 4,6.13; 6,2 이하; 2디모 1,13; 2,2.14-16; 3,14; 4,1-5; 1디도 1,11; 2,1.6.15), 셋째로 병자들을 방문하여 기도해주는 직무 (야고 5,14)등이다.


   신약성서, 특히 사목서간에 의하면 교회 내에 직무가 형성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에 직면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분열의 위험에서 보호하며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5).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에서의 심각한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화해의 봉사직을 주장한다 (2고린 5,19 이하). 또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일치와 올바른 가르침에 대해 염려하라고 당부한다 (사도 20,17-32). 그리고 특별한 감독의 사명을 띤 디모테오에게 무엇보다도 일치를 보존하고 잘못된 교설의 위험에 직면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도록 당부를 한다 (1디모 4,1-11; 6,2-10; 2디모 2,14-4,8; 디도 1, 10-16; 3,9-11).


(6) 교회직무에 임명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주어서 파견하는 것은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도 6,6; 13,1-3; 14,23; 1디모 4,14; 5,22; 2디모 1,6)6).


(7) 여러가지 봉사직에서 여자들도 발견다: 예언자인 필립보의 네 딸들 (사도 21,9), 켄크레아 교회의 봉사자 (부제)인 페베 (로마 16,1 이하), 아드로니고의 아내라고 추정되는 유니아에 대해 바울로는 “사도들 가운데에서도 출중하다”고 말한다 (로마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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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성사-신약성서에 나타난 사제상(!)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제상


    2.2.1.  모든 신자가 사제이다.

    부활 후의 교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와는 구분된 신분으로서의 제의적인 사제(ιερευσ)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서로 형제이며 자매이고, 모두는 사제라고 지칭되었다. 베드로 전서에서는 출애급기 19장 6절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용한다. 모든 신자들이 왕이며 사제이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 왕다운 제관, 거룩한 겨례, 그분이 차지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 베드 2,9; 참조: 묵시 15 이하; 5,10). 요한 묵시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묵시 1,6; 참조: 5,9-10). 신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사제라는 구약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구약에서의 중요한 두 직책인 왕과 사제가 이제는 모든 신자들의 새로운 품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제물을 바칠 장소로 구분된 성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 현존의 장소, 즉 성전이 되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1고린 3,16; 참조: 2고린 3,12-18). 새로운 전례인 “빵을 나누는” 성찬례는 성전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제물에 대한 의미도 바뀐다. 구약에서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제물을 사제의 손을 통해서 바쳤다면,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이것이 곧 정신적인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예식적인 희생제사 대신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영적인 희생” (1베드 2,5)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는 직무를 맡은 일부 사람들의 사명이 아니라 신자 모두가 해야할 사명이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백성으로부터 구분된 직책이었던 사제와 그리고 이와 연결된 성전, 제사에 관해서 신약성서에서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즉 모든 신자들이 사제이며, 스스로가 성전이고, 모두가 자신의 삶을 바치는 희생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1).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부른 예수와 친교를 이룬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더 이상 위험스러운 대상이 아니고, 신자들을 시나이에서처럼 그에게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진정한 중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자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이며(요한 15,14-15), 서로는 형제와 자매들이다. 신자들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께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로마 8,14-15; 참조: 2고린 2,12-18). 이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 홀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백성들은 뒤에 머물러 있던 것이나, 성전에서 대사제만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이다.

    그러나 베드로 전서는 신자들의 사제직을 긍정하면서도 목자의 직무를 인정하였다(1베드 5,2-3 참조). 이런 점에서 사제적 백성이란 관념이 목자의 직무와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2.2.2. 새로운 형태의 구분: 파견(missio)

    (1) 예수는 레위 가문에 속한 사제가 아니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에서의 사제는 아니었고, 그런 기준으로 보면 “평신도”였다. 그러나 신약 성서 후기 서간,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를 대사제라고 일컫는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관,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히브 4,14). 이렇게 히브리서에서 예수를 대사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만, 이는 구약의 대사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질서에 의한 대사제라는 것이다(히브 4,14- 10,18).

    이것은 예수의 사제직을 멜키세덱과 연결짓는 것에서 나타난다 (히브 5,5-10; 7,1-25). 구약에서의 사제직은 아론에서 시작된 레위지파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의 사제직을 아론이 아닌 멜키세덱이라는 인물, 구약에는 두 번만 (창세 14,17-24; 시편 110,4) 언급되는 인물과 연관을 짓는다. 내용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멜키세덱처럼 예수도 “정의의 왕”, “평화의 왕” (히브 7, 2)이며, 예수의 사제직은 가문의 대물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불멸의 삶 (부활)에 근거한다(히브 7, 16);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제로써 (히브 7,3) 구약에서처럼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사로 봉헌하였다 (히브7, 27; 9,11-28; 10,10.14).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흘림으로서가 아니라 기도(히브 5,7), 복종 (히브 5,8), 자기 봉헌 (히브 9,12-14)를 통하여 제사를 드렸다.2) 그는 이렇게 자신을 봉헌하는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써 새로운 성소인 하늘 (히브 6, 19; 9,11) 즉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런 “사제적인 직무”를 위한 근거는 아버지로부터의 파견에 있다(히브 5, 4-6; 요한 17).

    (2) 하느님 아버지에게 유일한 방법으로 파견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한다(마르 6,6-13).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는 예를 행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였는데, 예수는 이를 통해서 열두 제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직무에 참여시켰다. 부활 후에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제자들을 새롭게 파견함으로써(마태 28,16-20), 그들을 자신의 사도, 즉 “파견된 자”로 삼는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마태 28,18-19; 참조: 요한 20,19-23; 요한 17,18; 로마 10,13; 1테살 4,2)3).

    (3)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는 말씀에 대한 봉사인데(사도 6,2-4; 참조: 1고린 1,1.17), 이는 파견을 전제로 한다: “나 바울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따로 가려내어진 몸입니다” (로마 1,1).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5). 말씀에 대한 봉사(복음 선포)에 속하는 것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화해의 봉사가 있다. 심각한 분열의 어려움을 겪는 고린토 공동체에 바울로가 경고하기를: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저들에게 그 범법행위를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사절 구실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시오” (2고린 5,19-20).

    “화해의 말씀”에는 권위를 갖고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공동체를 마주 대하면서 공동체에게 화해하도록 경고하는 사명도 포함된다(목자의 직무). 사도들에게 맡겨진 말씀과 화해의 봉사직에는 다음과 같이 측면이 더 첨가될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일꾼 (διακονοσ)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 (1고린 4,1 이하; 골로 1, 25 이하; 1베드4,10).

    * 전권 (εχουσσια)4) (2고린 10,8; 13,10)을 지니고, 가르침을 주며 (1고린 7,6; 7,17. 25; 11,17), 공동체에서의 추방하는 판결을 내린다 (1고린 5,1-8). 이러한 사도 직무는 법적으로 확립된 직위가 아니라 “신앙에 바탕을 둔 권위” (1고린 4,6; 1데살 2,7)이다.

    *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추종하는 전권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째의 자리에 놓여있다(1고린 4,9-13; 2고린 4,11).


    2.2.3. 사도 다음 시대의 교회 공동체의 직무

    (1) 바울로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각기 성령의 선물 (χαρισμα)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여러 카리스마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생동적인 공동체로 자라나고, 거기에서는 누가 상위에 속하고 하위에 속하는 것이 없다. 바울로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직무이다. 물론 바울로의 권위는 그가 공동체를 떠나 있다고 해도 고유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1 고린12,4-11.28-30; 더 나가서 로마 12,6-8; 1데살 5,12).

    바울로계의 교회구조를 보면서 결론은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로 자신이 특별한 역활을 하였고, 그 당시에 아직도 “종말임박설”의 배경에서 살았다. 그리고 아직은 큰 교회로 자라나지 않은 상태이고 그저 소수의 몇몇 공동체가만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것을 참조한다면 과연 바울로계의 교회 모델을 후대를 위한 규범적인 모습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의문시 된다.

    (2)) 유대 계통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회당 공동체를 본 따서 “장로들” (πρεσβυτεροι)의 단체를 지도 위원회로 삼았다. 예루살렘에서는 장로들이 나중에는 사도들로 일컬어진 열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사도 15,2.6.22 이하). 거기에서는 추가로 (분쟁의 결과로서) 일곱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열두 제자의 가르침의 활동과는 별개로 봉사의 직무가 맡겨졌다 (사도 6,2-4); 그러나 그들 중에서 -아마도 개인적인 재능에 근거해서- 스테파노와 필립보는 복음 선포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도 6,8-7, 53; 8,5-13.26-40).

    (3) 희랍권에서는 세속의 市행정에서 감독자 (επισκοποσ)의 직무를 도입하였다. 추측컨대 감독자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필립 1,1에서는 복수로 2“επισκσποι”!), 나중에는 (사목서간) 혼자서 공동체를 이끌었다. 감독의 지도역활이 가장 강하게 부각된 곳은 이단으로 위협을 받았던 사목서간에 나오는 공동체이다. 거기에서 지도란 무엇보다도 “건전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 디모 1,10; 2 디모 4,2 이하; 디도 1,9; 2,1; 참조: 1디모 3,2; 디도 2,7).

    그외에도 봉사자 (부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필립 1,1; 디모 3,8-13).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일곱”과 비슷하게) 사회적-봉사적인 직무을 담당하였고, 필립 1,1에 의하면 주교와 함께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대표하던 복음선포 외에) 봉사가 공동체의 기본실현임을 드러내었다.

    (4) 장로와 감독을 동일시: 사도 20,17-35에 보면 바울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에 사람을 보내어 그곳 교회의 원로(장로)들을 불러모아서 그들과 이별을 나누는데 28절에서는 이들을 감독이라고 지칭한다. 그외에도 1베드 5,1 이하; 1디모 3,2; 디도 1,6-7 (장로제도와 감독제도의 두개의 상이한 전통이 합쳐진 것으로 추측된다. 교계제도적 순서인 감독(주교), 원로(사제), 부제는 신약성서 내에서 아직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공동협의 체제였다가 주교 단일 지도 체제로 변하는 데, 이는 2세기에 와서야 정착된다.

    (5) 신약성서에 나타난 감독자와 원로들에게 부여된 직무는 대략 세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공동체를 보살피는 사목의 직무 (사도 20,28; 1베드 5,2), 둘째로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는 직무(사도 20,29; 1디모 1,3 이하; 3,15 이하; 4,6.13; 6,2 이하; 2디모 1,13; 2,2.14-16; 3,14; 4,1-5; 1디도 1,11; 2,1.6.15), 셋째로 병자들을 방문하여 기도해주는 직무 (야고 5,14)등이다.

       신약성서, 특히 사목서간에 의하면 교회 내에 직무가 형성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에 직면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분열의 위험에서 보호하며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5).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에서의 심각한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화해의 봉사직을 주장한다 (2고린 5,19 이하). 또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일치와 올바른 가르침에 대해 염려하라고 당부한다 (사도 20,17-32). 그리고 특별한 감독의 사명을 띤 디모테오에게 무엇보다도 일치를 보존하고 잘못된 교설의 위험에 직면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도록 당부를 한다 (1디모 4,1-11; 6,2-10; 2디모 2,14-4,8; 디도 1, 10-16; 3,9-11).

    (6) 교회직무에 임명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주어서 파견하는 것은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도 6,6; 13,1-3; 14,23; 1디모 4,14; 5,22; 2디모 1,6)6).

    (7) 여러가지 봉사직에서 여자들도 발견다: 예언자인 필립보의 네 딸들 (사도 21,9), 켄크레아 교회의 봉사자 (부제)인 페베 (로마 16,1 이하), 아드로니고의 아내라고 추정되는 유니아에 대해 바울로는 “사도들 가운데에서도 출중하다”고 말한다 (로마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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