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와 고해성사, 고백성사

 

1.3.프로테스탄트와  고해성사


고해성사를 참된 성사로 보는가에 대한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사실 정통 루터교에서는 개별고백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특히 독일의 경우). 그러면 과연 이들이 성세성사와 성체성사를 성사로 받아들인 것처럼 고백을 성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1.3.1. 루터의 견해


  루터는 모든 성사에 대해 ‘Signum efficas’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을 객관적으로 실현시켜 주어서가 아니라 더욱 강한 신앙을 자극하고 그 신앙을 새겨주기 때문이다. 즉 루터는 ‘표징’을 구원의 도구가 아닌 신앙을 자극하는 인식의 도구로 보고, 이것의 기능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에로 인도해 주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루터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성세성사, 성체성사와 함께 고해성사를 말하기도 하고 제외하기도 한다. 그 자신 안에도 혼돈적 견해가 있음을 말해준다. 즉, 루터는 개별적 고백의 형태안에 실시되는 고해성사는 엄격한 의미에서 성세성사나 성체성사와 같은 성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부터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규정된 정확한 표징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여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고해성사는 그 자체로 거룩한 표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제가 주는 ‘absolutio’가 그리스도가 교회에 준 맺고 푸는 권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529년 루터는 「Grand Catechisme」에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입에 ‘absolutio’를 넣어 주었고, 우리 죄에서 우리를 풀어주도록 명하셨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느끼고 위로를 갈망할 때, 인간의 직무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를 죄에서부터 풀어주고 사해줌을 알게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고해성사를 성세성사와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 성세성사로 옛 인간의 죽음이 시작되었다면, 고해성사는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켜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신앙에 의해서 성세성사 때 받은 효력이 다시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고해성사를 성세성사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다.


         


  1.3.2.칼빈의 견해


  칼빈은 고해의 성사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데 이는 고해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설립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열쇠의 권한과 맺고 푸는 권한에 대한 약속은 교회가 죄인들을 용서하거나 혹은 그대로 두는 교회의 사죄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신적 용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데 관계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사제가 ‘absolutio’를 내리는 것은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를 다시 선포하는 것이지, 사죄경을 통해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것은 성세성사에 대한 기억과 쇄신의 의미, 그리스도께 일치할 수 있도록 신앙을 자극하는 기능만 수행하지 성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그도 고해가 교회에 유익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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