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과 나

 

그분들과 나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고,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청에 대희년 전대사를 연장해 달라고 청원을 하였다. 그리고 성청 내사원이 한국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2002년 2월 4일까지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이 해가,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린 신앙의 선조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을 성인품에 올려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분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것과 나와는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으로 판명되어 뼈가 부스러지고 살점이 뜯겨 나가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던 그분들.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으로 감옥 안의 멍석자락은 썩어 들어갔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어 보려고 썩어 문드러진 멍석자락을 뜯어먹어야만 했고, 감옥 안에 들끓고 있는 이까지도 먹어야만 했던 그분들. 그리고 마침내 휘광이의 칼날 아래 목이 잘리면서까지도 배교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그분들. 그런데 그분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나무가 뿌리 없이 어떻게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부모 없이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분들이 그렇게 신앙을 증거했기에 나 또한 고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신앙을 내가 이어 받았건만 그분들의 모습을 나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분들의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 그분들께 전구를 청하며 나 또한 그분과 같아지려고 노력할 때 그분들의 피가 헛되지 않는 것이며 내 안에서 그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리.


  불란서의 어느 지방에서는 외국에 나가 선교하시다 순교하신 신부님의 시성을 위해그분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고 그분을 알리며 그분을 통해서 신심생활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즉 순교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그분들에 대한 기도와 신심이 무르익는다면 시성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신 분들은 둘째치고, 이미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 순교 성인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분들을 본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분들이 순교하신 성지는 찾아보지만 그곳에서 그분들을 찾지는 않는 것이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또한 우리가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짓는 것은 나 또한 그분처럼 살겠노라고, 그렇게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처음에는 우리의 순교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짓는 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이름이 ‘촌스럽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면서 꺼리고 있다.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이름이 세련되어서 성인품에 올랐을까? 얼굴이 잘생겨서, 아니면 세상에 살 때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성인품에 오른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분들께서 성인품에 오르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이며,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들이 촌스럽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103위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몇 분이나 알고 있을까? 아마도 자신 있게 두 분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적어도 이분들은 기도문에 나오기 때문에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03위의 성인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성인품에 오르신 분들에 대한 공경도 이 정도인데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신 분들에 대한 공경이야 오죽하겠는가?


올해는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신유박해를 기리기 위해서 대희년 전대사를 연장 받았다. 그런데 신유박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신유박해의 전대사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마치 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100만원짜리 수표를 쥐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든다. 그러나 아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것은 1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든 하지 않던 간에 그분들은 이미 하늘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니 우리는 그분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분들을 공경해야 한다.


신유박해. 우리는 그분들을 알고 더 큰 공경을 드리기 위해 20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겠다.  200년 전으로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그중 한 인물이 되어,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박해를 받았어야만 했으며 무엇 때문에 그들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를 느껴보아야 한다. 200년 전 박해의 현장에서…,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해서 조금은 온화하게 대하던 정조의 죽음으로부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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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과 나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그분들과 나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고,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청에 대희년 전대사를 연장해 달라고 청원을 하였다. 그리고 성청 내사원이 한국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2002년 2월 4일까지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이 해가,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린 신앙의 선조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을 성인품에 올려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분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것과 나와는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으로 판명되어 뼈가 부스러지고 살점이 뜯겨 나가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던 그분들.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으로 감옥 안의 멍석자락은 썩어 들어갔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어 보려고 썩어 문드러진 멍석자락을 뜯어먹어야만 했고, 감옥 안에 들끓고 있는 이까지도 먹어야만 했던 그분들. 그리고 마침내 휘광이의 칼날 아래 목이 잘리면서까지도 배교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그분들. 그런데 그분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나무가 뿌리 없이 어떻게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부모 없이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분들이 그렇게 신앙을 증거했기에 나 또한 고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신앙을 내가 이어 받았건만 그분들의 모습을 나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분들의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 그분들께 전구를 청하며 나 또한 그분과 같아지려고 노력할 때 그분들의 피가 헛되지 않는 것이며 내 안에서 그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리.

      불란서의 어느 지방에서는 외국에 나가 선교하시다 순교하신 신부님의 시성을 위해그분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고 그분을 알리며 그분을 통해서 신심생활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즉 순교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그분들에 대한 기도와 신심이 무르익는다면 시성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신 분들은 둘째치고, 이미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 순교 성인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분들을 본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분들이 순교하신 성지는 찾아보지만 그곳에서 그분들을 찾지는 않는 것이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또한 우리가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짓는 것은 나 또한 그분처럼 살겠노라고, 그렇게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처음에는 우리의 순교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짓는 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이름이 ‘촌스럽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면서 꺼리고 있다.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이름이 세련되어서 성인품에 올랐을까? 얼굴이 잘생겨서, 아니면 세상에 살 때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성인품에 오른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분들께서 성인품에 오르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이며,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들이 촌스럽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103위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몇 분이나 알고 있을까? 아마도 자신 있게 두 분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적어도 이분들은 기도문에 나오기 때문에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03위의 성인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성인품에 오르신 분들에 대한 공경도 이 정도인데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신 분들에 대한 공경이야 오죽하겠는가?

    올해는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신유박해를 기리기 위해서 대희년 전대사를 연장 받았다. 그런데 신유박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신유박해의 전대사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마치 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100만원짜리 수표를 쥐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든다. 그러나 아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것은 1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든 하지 않던 간에 그분들은 이미 하늘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니 우리는 그분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분들을 공경해야 한다.

    신유박해. 우리는 그분들을 알고 더 큰 공경을 드리기 위해 20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겠다.  200년 전으로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그중 한 인물이 되어,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박해를 받았어야만 했으며 무엇 때문에 그들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를 느껴보아야 한다. 200년 전 박해의 현장에서…,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해서 조금은 온화하게 대하던 정조의 죽음으로부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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