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느님의 현존의 방식을 자신들 방식에 맞추려고 한다. 내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결국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공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어렵게 되면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한다.
“당신이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왜! 당신이….”
어쩌면 승훈의 고백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듯 싶다. 승훈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이 고통속에서는 자꾸만 의심이 든다네. 천주님께서는 왜 우리의 고통을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천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주님께 기도해야 할까? 천주님이 안계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천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는 계시지만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는, 힘이 없는 그런 분은 아니실까?
신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이 그것이라네. 신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천주님께서 즐기실 리는 없을 진데 세상은 변하는 것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라네.
그렇다고 내가 천주님을 만나 뵌 것도 아니질 않는가? 나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려.”
“형님! 왜 그리도 약한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천주님께서 안 계셨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 마음도 내가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천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형님! 우리의 삶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영생을 믿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천주님을 증거하다가 우리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천주님을 생각해 본다면 이 고통 또한 이겨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금이나 은이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불로 달련을 받듯이 우리의 고통도 천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아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을 위한 디딤돌인 것입니다.
사실 천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해주신다면 이 고통을 안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보고야 믿었던 토마스 사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 않사옵니까?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형님! 처음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님을 통해서 뿌려진 신앙의 뿌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주님께서 형님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형님은 결코 이 나라에 신앙의 씨를 뿌리지 못하셨을 것이옵니다.“
승훈은 말이 없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승훈의 긴 한숨 소리가 감옥 안에 쌓인 어둠을 뚫고 빠져나갔다. 그 긴 한 숨 속에는 최초의 영세자로서의 자부심과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교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그리고 미약하게 남아있는 믿음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승훈의 긴 한 숨소리를 다른 이들도 듣고 있었다. 승훈과 약종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승훈과 약종의 소곤거리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마음 한편에서는 승훈의 마음이 용솟음쳤고, 그 마음을 달래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용솟음치는 약종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