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순(요사팟)

 

  김건순(요사팟)은 당시 천주교의 전파를 반대하는 노론(老論) 안동 김씨 집안의 자손이었다. 1776년(영조 52)에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던 종가 집안으로 양자 감으로써 벼슬과 명예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요사팟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조숙한 지능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그는 아홉 살적부터 죽지 않는 길을 열어 준다고 하는 노자(老子)의 도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그의 집에는 북경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입문서가 있었다. 요사팟은 열살인가 열두 살 때에 그 책을 매우 즐겨 읽었고, 오래지 않아 천당 지옥과 그 존재의 필요성과 그 책에 다루어진 다른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대신 지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장하면서 그는 학문을 광범하게 하였으니, 경서(經書)․역사․불고와 노자의 도리․의술․음양서(陰陽書)․병서에까지 그가 배우고 익히지 않은 바가 없었다.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그의 재질을 보여 줄 기회를 얻었다. 그가 18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에 양부(養父)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법적인 장례가 송(宋) 때의 의식을 따라 행하여졌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요사팟은 그때 아직 천주교인이 되지 않았던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에게 문의하였고 여기에서 어떤 예식들은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그것들을 그릇된 것이라고 배척하여 아버지 장례에 행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이렇게 풍습을 어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맹렬히 항의하였다. 요사팟은 곧 자기의 행동을 변호하기 위하여 긴 변호문을 썼는데, 거기에는 수많은 인용과 증거가 대단히 조리있게 쓰여져, 그때 나라의 첫째 가는 학자로 통하던 이가환(李家煥)도 자기는 그와 비슷한 것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요사팟은 집에 있을 때에 효성이 두터웠고 매우 점잖았으며, 또한 성실과 너그러움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집안이 부유하므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을 위해 희사하는 데 썼으며, 자기 자신의 옷과 음식에 대하여는 아주 필요한 것만으로 한정하여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서울에 갈 때면 그가 머무르는 집 앞에 교군과 말이 몰려들었다고도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한번이라도 그를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이중배(李中培․마르띠노)와 몇몇 다른 친구와 함께 바다를 건너 북경에 가서 서양 학자들에게 문의하고, 그들에게서 유익한 지식을 많이 얻어다가 그것을 전파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요사팟은 천주교에 대하여 극히 간접적으로 밖에는 듣지 못하여 정확한 개념이 없었다. 강이천(姜彛天)을 포함한 몇몇 친구와 협력하여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의 비밀과 비상한 비방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강이천이란 사람은 마음씨가 고약하고 꾀가 많은 소북(小北)의 이름있는 선비였다. 머지 않아 왕조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하고, 그는 기묘한 비방을 탐구하고 마술을 연구하여 성공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요사팟은 이 사람과 교제하면서 그의 내심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과 실제로 복음의 도리를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진실한 희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속하여 있는 노론에서는 고명한 천주교인을 볼 수 없었으므로 남인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에게 사람을 보내어 종교 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자고 청하였다. 이 양반 교우는 기꺼이 요사팟의 말에 동의하였다. 다만 두 집안의 세습적인 적대 관계로 공공연하게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밤에 암브로시오를 찾아 갔다.


  처음 몇 번 만나 보고 나서 그는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의 뜻을 어렵지 않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강생(降生)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그의 모든 생각을 뒤엎어 놓아 그는 근심하고 낙담하였다. 그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벼락을 맞거나 다른 어떤 천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여러 날 동안 다시 가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죽이지 않으시는 것을 본 요사팟은 다시 교리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성신의 은총이 그 마음을 움직여 그는 자기의 이성을 신앙에 굴복시키고 굳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이후 요사팟의 마음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복음의 참 정신을 알리고 신기한 물건이나 마술적인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도록 하였다. 요사팟은 감격하여 이전에 그가 몰두하였던 연구를 결연히 포기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당시 그의 친구 중 거의 모두가 그의 본을 따랐다. 여주읍에서 참수당하는 것을 본 바 있는 영광스러운 순교자 이중배(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요한)와 의희영(李喜英) 등은 그의 전교에 따라 개종하였다. 강이천만이 믿지 않고 그 어느때 보다도 더 깊숙이 자기의 야심적인 꿈과 환상적인 연구에 빠져들어갔다. 두달이 겨우 지났을까 말까 한데 이 자와 그의 동료들의 계획이 드러나, 정부는 그들의 행동에서 ‘반역의 성향과 백성들 가운데 소요를 일으킬 위험이 농후하다’고 생각하고서 그들을 체포하였으나, 때는 1797년이었다.


  즉, 강이천이 김건순 등과 왕래하며, 소위 ꡒ해도병마등설(海島兵馬等設)ꡓ의 황당무계한 말을 퍼뜨렸다는 김정국(金鼎國)의 밀고로 형조에 잡혀 유배되었던 것이다. 요사팟도 강이천과 전에 교제를 하였던 탓으로 관련이 있게 되었다. 다행히 그의 훌륭한 자질과 정직이 이미 임금에게 알려져 있어서, 임금은 그를 전적으로 존중하고 보호하여 이 사건에 연루하는 것을 막았다.


  1799년 6월에 그는 신부에게서 영세를 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의 열심은 훨씬 더하여졌다. 그는 자기가 천주교인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친척과 친구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고하며,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여주 고을과 그 근방에서는 많은 외교인들이 신앙의 은혜를 얻은 것은 그의 노력이 컸던 탓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내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거기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다. 이에 여러 해 동안 요사팟은 매우 괴로운 가정의 박해를 당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을 충실히 지켜 나갔다. 그는 정약용(丁若鏞․요한)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ꡒ배교문에 서명을 하였다ꡓ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나타냈으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출생과 사회적 지위로 세속과 조정의 많은 일에 관련된 것에 비해 그가 천주교회의 일을 지도하는 데 큰 몫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정조의 승하로 권력을 잡은 자기 당파가 박해를 준비하고 예고할 때 그가 천주교인들과 약간 소원(疎遠)하였음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과 협력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순서 있고 체계 있게 설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책을 반 정도 저술했다고 하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는다.


  요사팟의 행동은 그가 영세한 뒤로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이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의 희생자로 지목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부모 친척과 친구들은 그로부터 심약한 배교 한마디를 얻어 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 말을 하지 않았고, 이에 얼마 안 되어 조정의 체포영장이 그에게 내려졌다. 그리하여 1801년 3월 16일 포졸들은 그를 잡으러 서울에 있는 그의 생부의 집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 밥을 먹고 있다가 ꡒ내 아들은 오늘 과거를 보러갔네. 그 아이는 이러저러한 나무밑에 앉아 있을 것이니, 이러저러한 표로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네. 아무런 의심도 일으키지 말고 자네들 임무를 다하게ꡓ라고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하며 그는 목소리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요사팟은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유죄 판결을 막기 위하여 권력 있는 그의 집안은 어떤 의미있는 표시를 함으로써 이 양반 죄수가 석방되어 나오도록 모든 것을 조처하였다. 필연적으로 그와 주문모 신부를 대질시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신부를 모른다고 주장만 한다면 즉시 석방이 되도록 관원들과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의 끈기를 흔들리게 하기 위하여 ꡒ최소한 집안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온 집안의 명령을 피하지 말도록 하라ꡓ고 간청하는 그들을 보았을때, 요사팟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를 신부 앞으로 데려가, ꡒ이 사람을 아느냐ꡓ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대답을 주저하였기 때문이다.


  주 신부는 그에 대한 유혹을 깨닫고 ꡒ아, 그대도 소국의 소인임을 보이려 하는구먼ꡓ하고 말하였다. 조선 양반의 자존심은 이 말로 자극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쇠고랑을 차고 있는 사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은총이 합함으로써 다시 용기를 내어 자기의 신앙을 과감하게 고백하였다.


  심문을 당할 때에 요사팟은 여러번 천주교를 변호하고, 그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 나라의 경서에서 뽑은 많은 구절을 인용하였다. 관리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ꡒ어떻게 그렇게도 고귀한 집에서 난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가 있느냐? 너도 사도(邪道)를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 경서를 사용하고자 하니, 죽어 마땅하다.ꡓ 


  요사팟은 이에 ꡒ나는 온 조정과 나라의 대관(大官)들이 백성의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임금께 무궁함을 빌어 드리기 위하여 이 종교를 신봉하기를 바랍니다ꡓ라고 대답하였다. 모든 방편이 다 쓰여졌는데도 그의 끈기는 변함이 없었으며, 결국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것이다.


  6월 1일 그는 서소문 밖에 있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의 고귀함과 덕행과 명성으로 인하여 거기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형장으로 가는 동안 요사팟은 침착과 위엄을 보존하였고 형장에 도착하자 모여 있는 군중에게 ꡒ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오. 나도 약간의 명성이 있고 높은 벼슬도 얻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헛되고 거짓됨을 알고 원치를 않았소. 천주교만이 진리요. 그래서 내가 천주교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 모두 그것을 잘 생각하고 내 본을 따르시오ꡓ라고 말하고는, 그의 복된 영혼을 보장하여 주는 칼을 받았다. 이렇게 그가 참수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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