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토마스(토마스 )

 



  조 토마스의 세속 이름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부친은 경기도 양근(楊根, 現 楊平) 지방의 유명한 교우인 조동성(趙東성) 유스띠노로 처음에는 열렬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나, 훗날 체포되어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 신앙에 복귀하여 1830년(純組 30)에 선종(善終)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토마스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과 접하였으며, 부친의 열렬했던 신앙생활을 본받아 교리를 실천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양근 지방의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훌륭한 성격과 효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입교한지 얼마 안되어 덕행과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0년(正祖 24) 부친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부친을 따라가 옥에서 10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매일 여러번씩 읍내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힘을 다하여 그를 위로해 드렸다. 그후 부친이 서울로 이송되자 토마스는 다시 부친의 뒤를 따라 낮이고 밤이고 떠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9일(陰, 2월 7일), 그의 부친은 금부로 옮겨져 일시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게 되었다. 배교한 결과로 그는 죽음을 면하고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종성(鍾城)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사학징의(邪學徵義)」에서는 그의 유배지가 무산(茂山)이라고도 한다.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유스띠노는 나이와 상처와, 그리고 힘든 여행의 피로로 쇠약하여져서 중병이 들었다. 토마스는 항상 그의 곁에 있으면서 정성스럽게 그를 섬겼으며, 이를 본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여 그런 효성을 일찌기 본 일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한다.


  당시 양근의 군수는 유스띠노를 죽이지 못한 데 화가 나서 그의 아들 토마스를 잡아다 형벌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가 부친을 따라 먼 지방으로 갔기 때문에 그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에 양근 군수는 조정에 여러번의 청원서를 내는 동시에 권력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토마스에 대한 체포 명령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 해 여름에 포졸들은 부친의 유배지에 있는 토마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유스띠노의 병은 나아 있었고, 그들 부자는 서로 위로하며 생활하고 있던 중이었다. 공포와 경악의 시간이 지나자 유스띠노는 아들 토마스에게 ꡒ그래,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ꡓ하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이제 체포되어 가면 늙으신 아버지를 혼자 버려둘 수밖에 없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또한 아버지에게 너무 괴로운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깊은 근심을 나타내지 않고, ꡒ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ꡓ라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이제 토마스는 성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순교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ꡒ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안심하고 후회 없이 보내겠다.ꡓ라고 말하며,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토마스에게 하였다.


  토마스가 포졸에게 압송되어 양근에 도착하자 군수는 곧 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군수는 우선 토마스의 부친에 대한 질문으로 ꡒ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있느냐?ꡓ고 물었다. 이에 그는 ꡒ사또께서는 어떻게 인륜을 무시하는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저의 부친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저의 부친께서 당하시는 처지는 제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ꡓ라고 차분히 반문하였다. 화가 몹시 난 군수는 더 이상 신문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배교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끈기있게 모든 것을 참아 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토마스는 두달동안 거의 날마다 끌려나가 형벌과 유혹을 받았지만 절대로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반복된 형벌을 견디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1801년 11월 중순 경에 토마스는 옥중에서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토마스는 오래 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또한 그는 체포된 후 형벌을 받는 데 익숙해지기 위하여 오랫동안 자기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도 한다. 물론 그는 칼아래 순교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옥사함으로써도 그의 영혼은 천상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니, 이것은 그의 용감한 극기(克己)에서 얻어진 영관(榮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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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토마스(토마스 )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조 토마스의 세속 이름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부친은 경기도 양근(楊根, 現 楊平) 지방의 유명한 교우인 조동성(趙東성) 유스띠노로 처음에는 열렬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나, 훗날 체포되어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 신앙에 복귀하여 1830년(純組 30)에 선종(善終)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토마스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과 접하였으며, 부친의 열렬했던 신앙생활을 본받아 교리를 실천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양근 지방의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훌륭한 성격과 효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입교한지 얼마 안되어 덕행과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0년(正祖 24) 부친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부친을 따라가 옥에서 10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매일 여러번씩 읍내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힘을 다하여 그를 위로해 드렸다. 그후 부친이 서울로 이송되자 토마스는 다시 부친의 뒤를 따라 낮이고 밤이고 떠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9일(陰, 2월 7일), 그의 부친은 금부로 옮겨져 일시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게 되었다. 배교한 결과로 그는 죽음을 면하고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종성(鍾城)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사학징의(邪學徵義)」에서는 그의 유배지가 무산(茂山)이라고도 한다.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유스띠노는 나이와 상처와, 그리고 힘든 여행의 피로로 쇠약하여져서 중병이 들었다. 토마스는 항상 그의 곁에 있으면서 정성스럽게 그를 섬겼으며, 이를 본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여 그런 효성을 일찌기 본 일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한다.

      당시 양근의 군수는 유스띠노를 죽이지 못한 데 화가 나서 그의 아들 토마스를 잡아다 형벌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가 부친을 따라 먼 지방으로 갔기 때문에 그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에 양근 군수는 조정에 여러번의 청원서를 내는 동시에 권력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토마스에 대한 체포 명령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 해 여름에 포졸들은 부친의 유배지에 있는 토마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유스띠노의 병은 나아 있었고, 그들 부자는 서로 위로하며 생활하고 있던 중이었다. 공포와 경악의 시간이 지나자 유스띠노는 아들 토마스에게 ꡒ그래,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ꡓ하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이제 체포되어 가면 늙으신 아버지를 혼자 버려둘 수밖에 없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또한 아버지에게 너무 괴로운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깊은 근심을 나타내지 않고, ꡒ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ꡓ라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이제 토마스는 성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순교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ꡒ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안심하고 후회 없이 보내겠다.ꡓ라고 말하며,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토마스에게 하였다.

      토마스가 포졸에게 압송되어 양근에 도착하자 군수는 곧 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군수는 우선 토마스의 부친에 대한 질문으로 ꡒ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있느냐?ꡓ고 물었다. 이에 그는 ꡒ사또께서는 어떻게 인륜을 무시하는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저의 부친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저의 부친께서 당하시는 처지는 제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ꡓ라고 차분히 반문하였다. 화가 몹시 난 군수는 더 이상 신문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배교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끈기있게 모든 것을 참아 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토마스는 두달동안 거의 날마다 끌려나가 형벌과 유혹을 받았지만 절대로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반복된 형벌을 견디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1801년 11월 중순 경에 토마스는 옥중에서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토마스는 오래 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또한 그는 체포된 후 형벌을 받는 데 익숙해지기 위하여 오랫동안 자기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도 한다. 물론 그는 칼아래 순교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옥사함으로써도 그의 영혼은 천상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니, 이것은 그의 용감한 극기(克己)에서 얻어진 영관(榮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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