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호(요한)

 

이명호 요한에 대하여는 자세히 나타난 기록이 없으므로 그의 고향이나 입교 전의 행적, 입교과정 등에 관하여는 알길이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인 이익운(李益運)이 남인으로서 경기감사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 집안이 상당한 지체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요한도 천주교를 앙ㄹ기 이전에는 유학을 공부하여 옛날부터 전해오는 학문에 상당히 길들여 있었다. 입교한 후 그는 지금까지 공부해 오던 모든 학문을 버리고, 자신의 괄괄한 성질을 없애기에 노력하였으며, 모든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서 조정하여 나갔다. 또한 식사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극기를 행하고, 세속적인 모임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서 따로 방을 구하여 교리를 실천하였다. 주일이 되어야만 집을 나가 몇몇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며 성서를 읽고 성인들의 거룩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서로를 권면하였다. 부친은 자식의 이러한 행동을 알고는 그로 인하여 집안 전체가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자식으로 하여금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별별 짓을 다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부친의 위협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교리를 실천하고 신심을 굳게 하는 데 정성을 다할 뿐이었다.


  신유교난의 박해가 더욱 심하여져서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받게 되었으나, 요한은 집안의 높은 지위로 말미암아 쉽사리 도망할 수도 없었다. 그느 이제 어떠한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 만을 기다리며 더욱 신앙을 굳혀 나갔다. 부친은 박해의 두려움과 자식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고 마침내는 요한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하였다. 자식을 죽게 하여 천주교인이 집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한 것이다. 그가 독약 마시기를 거절하자 부친은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 그를 붙들게 하고는 억지로 독약을 마시게 하였다. 이리하여 요한은 몇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의 공로는 하늘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가 언제 순교하였는지는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1801년 3월 29일(陰)의 관찬기록에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인 듯하다.






218.48.34.85 한태현: 이명호 요한은 본관은 연안이며 고향은 충남 아산이다. 부친 익운은 죽은 외아들 요한을 고향 선산에 묻지 아니하고 경기도 양평에 묻었으며 자신도 죽은 후에 아들 곁에 묻혔다. 순교 당시 요한은 결혼은 하였으나 자녀가 없었기에 후에 양자를 들여 요한의 대를 잇게 하였다. [03/15-19:55]
218.48.34.85 한태현: 80년대에 고 오기선 신부님이 양평에 있는 순교자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다. [03/15-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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