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헌

 



김풍헌은 충청도 청양고을 중인(中人)가정에서 태어나 약간의 교육을 받았다. 훙헌이란 면장이나 세금징수관의 직위이다. 그는 곧고 꿋꿋한 성격으로 동향인의 존경을 받았고, 풍헌이 된 것도 그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천주교인이 되어서도 자기 직책을 계속했다. 그는 열심으로 교회의 본분을 지키고 기도와 信心서적을 읽는데에 전심하였으며 가족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며 살았다. 병진(丙辰–1796)년에 붙잡힌 그는 청양 관가로 압송되어 가서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다. 마른 쑥잎을 항문에 얹어놓고 태우기까지 하였으나 아무것도 그에게 신앙을 배반하게는 못하였다. 보습을 빨갛게 달구어 버선을 벗고 그 위을 걸어가라고 명하였다. 그가 그대로 하려고 하는 참인데, 그를 미쳤다고 말하며 제지하였다. 그것은 십자가에의 거룩한 미침이었다. 김 토마스는 사형언도를 받았다. 사형이 집행되기 사흘 전에 그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북소리에 맞추어 장마당을 세 번 돌게 하였다. 그러는 중에 청양(靑陽) 현감(縣監)이 파면되어, 김 토마스가 사형집행을 간청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은 신관(新官)의 부임까지 연기되었다. 新官은 재판기록을 검토한 후 증거자를 옥에서 내놓고 보석 (保釋)을 하여 어떤 개인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며칠 후에는 자기 고을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마스는 순교의 영관(榮冠)을 받지 못한 것을 슬퍼 탄식하며 나가서는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자기는 행복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 그에게는 나라와 집과 가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차례로 부여(扶餘), 금산(錦山), 고산(高山)등 고을에서 살면서 교우들을 열심으로 가르치고 아무것도 없는 극빈 생활을 하였다. 신자들이 옷이나 새 신을 주면 그는 아름다운 옷은 교만을 길러준다고 말하며, 거지를 만나면 이내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는 흔히 하루에 한끼밖에 먹지 않았으며, 그가 먹는 음식이란 아주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1801년에 박해가 더 치열하여졌으므로 김 토마스는 자기 가족을 산골로 데리고 가서 말하였다. “여기서 섭리의 명령을 기다려라. 나는 순교하지 못한 것을 늘 마음 속으로 원통히 생각해왔는데, 기회가 좋으니 자수하련다.” 사람들은 그가 없으면 그의 가족이 모두 굶어죽을 것이며 그 뿐 아니라 그 역시 천주의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임을 상기시켜 겨우 그를 말리기에 성공하였다. 그는 순교의 은혜를 받을 희망을 늘 품고 있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의 원을 달리 들어 주셨다. 며칠후인 같은 해 1801년 7월에 그는 용표(龍漂)고을 한고기에서 병이 들었다. 죽기 전날 그는 자기가 다음 날 죽을 것이라고 미리 말하였다. 시간이 되자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집마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여 무릎을 꿇고 그런 겸손한 자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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