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프랑스 대혁명과 교회의 세속화
근세에 들어오면서 국가중의의 발달로 그리스도교적 보편주의는 사라지고 이른바 전제군주의 절대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교회에 성실하던 국가는 부국강병을 위해 도리어 교회를 이용하고자 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박해하여 야망을 채우려 하였다. 여타국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프랑스도 국가정책을 위해 국내 종교를 좌우하려 하였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교회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은 그러한 절대군주를 타도하는 역사상 시민혁명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당시의 최고 계급인 성직자들의 공헌이 많았다. 혁명에서 주창된 인권선언을 인간의 불가양 불가침 자연권으로서 평등권, 신체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소유권의 보장 등을 규정한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기념비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인권선언은 1781년 프랑스 헌법에 그래도 채택되어 후에 각국 헌법의 모범이 되었다. 자유.평등.박애를 이념하는 프랑스 혁명은 차츰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독재와 공포정치로 변하여 자유의 이름하에 자유가 억압되었다. 그리하여 끝내는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제정(帝政)를 수립함으로써 혁명은 실패하고 그 의의만 후세에 높이 찬양받게 되었다. 프랑스 국민의회의 과격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교회재산으로 국가의 재정적인 결함을 매우고자 하였다. 국민회의는 전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공립학교 비용에 창당하자는 딸레랑 주교의 제안을 채택했으며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제의를 반대하여 의회에서 퇴장하였다.
이후 국민의회는 교회에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으며 1790년 2월에는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 14일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재산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7월 14일에는 이른바 프랑스 ‘성직자 공민헌장’이라는 새 헌장이 반포됨으로써 프랑스 교회는 로마와 분리되어 국가적 기반 위에서 새로 구성되고 프랑스 국가에 편입되었으나 아직 신앙과 윤리는 침애받지 않았다.
이 법에 의하면 교수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어 세속관리로 바뀌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교황이 비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에게 공민헌장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고, 전체 성직자의 3분의 2가량이 이 요구를 거절함으로서 박해가 일어나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되거나 국외로 추방 또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 박해는 선량한 많은 국민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작자편에 몰리게 한 결과를 초대하였고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1791년 10월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회되었는데 9월 학살과 더불어 시작된 공포정치의 시작으로 끝을 맺었다.
이 공포정치 시대에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를 비롯 성직자, 귀족, 의회의원 시민들이 처형되었다. 독재 칭치가들을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여기에 ‘이성의 공경’으로 대체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이 제1집정관으로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여 질서가 회복되자 비로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었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정치적인 요인으로 다루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1801년 교황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이 조약의 전문에서 가톨릭적, 사도적 로마적 종교가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신앙이고 또한 회복된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동시에 교회는 몰수된 교회 재산을 단념하였고 그 대신에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정교조약에 77개의 ‘기초조항’을 비밀리에 첨부하였는데 그것은 정교조약의 일부를 다시 취소하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7세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프랑스 황제로 선출하게 했으며 교황이 그를 도유하였고 대관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하였다. 1808년 그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자 교황은 파문으로 응수하였으나 1821년 나폴레옹은 교황을 퐁텐불로에 감금시키고 협박하여 바티칸시의 포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러시아 원정(1812)년의 실패로 그에 의한 지배가 붕괴되고 또한 연합군이 파리를 정복하였으므로 비인회의(1814-1815)년 유럽의 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침입할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교회재산의 몰수는 독일을 위해서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180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독일제국 대표자회의는 22개의 대교구와 80개의 제국직속 대수도원 및 2백여 수도원의 몰수와 국유화를 결의하였다. 이 때문에 독일 교회는 그 물질적 기반과 국가의 지원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부정적인 면 뒤에는 긍적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고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고, 또 중세기 봉건주의의 소산인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와 심한 차별의식이 사라졌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어 대중을 위한 교회가 19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던 제국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을 로마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가톨릭의 공동체 의식이 각성되었다.
1848년의 새로운 헌법으로 가톨릭교회도 활동의 자유와 자립의 기운이 일어났다. 곧 신자 대중을 위한 대묵상회가 개최되었고 숱한 순례와 신심행사가 발전하였으며 도처에서 새로운 교회생활이 나타났다. 1852년 처음으로 가톨릭의원들이 프로이센의 연방회의에서 ‘가톨릭당’을 결성하였고 그것은 1858년 이래 ‘중앙당’으로 불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