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사도시대에는 두 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다교 사상에 젖어 생활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비 유다인으로 구성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1.1.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A.D 30년경 성신 강림 사건 이후에 복음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복음 선포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과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화하여 성령을 받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호교적 내용 이외에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예수의 생애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은 사도들의 선포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실천하려 하였다(산상설교).


이러한 복음 선포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신도들로 구성되었다. 첫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다교 종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었지만 그들은 특유한 공동체 즉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의미하는 Ecclesia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며 그들의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다교의 공동기도에 참여한 다음 개인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는 훈시와 예절로 나누어졌는데 훈시는 예비자 교리교육, 신도들을 위한 강론,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권유, 윤리교육등을 하였고, 예절은 성찬례, 감사기도, 축복을 하였고, 성찬례 후에는 기도하였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생활상 중에서 가장 특이한 모습은 상부상조의 경제 조직이다. 이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뿐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종말론적 사상과 현세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예루살렘 모교회는 성직계급의 질서를 갖춘 공동체 였다. 즉 복음선포, 교회관리, 영적지도, 성사집행등의 직무를 맡던 사도단, 사도들의 보조단체로 히브리인 신도들을 돌보던 장로단(대표는 야고보)과 헬레니스트의 신도들을 책임지던 부제단(대표는 스테파노)이었다.  그러나 37년 스테파노의 순교와 헬레니스트에 대한 박해 그리고 사도단 밖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장로단이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성직자단을 형성하였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자 이 교회는 더욱 유다주의가 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다. 그러나 62년 야고보 순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다 민족주의에 승복하기를 거부하여 제 1 차 유다 전쟁(66-70년) 중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강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완전한 결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2.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1.2.1. 시리아 교회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주로 팔레스티나의 본토 유다인들과 ‘디아스포라’ 가운데 성장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크게 발전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이방계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중대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공동체로서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가 있다.




다마스커스 교회


다마스커스 교회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의 순교(37년) 이후 유다인들의 박해로 물러나온 헬레니스트들이 다마스커스 지역인 페니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11,19). 38년에 사울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파견되었다가(사도9,1-2) 도중에 개종한 후 그는 유다인의 회당에서 선포하였다.(사도9,20). 또한 이 다마스커스 신도들 중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사도9,10)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모든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사도22,12). 따라서 다마스커스 공동체는 37년에 설립되었고 헬레니스트들과 유다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성서 이외에 다른 문헌 즉 사해 문서의 꿈란(Qumran) 사본에 속하는 자독(Zadok) 문헌 또는 다마스커스 문헌에 의하면 에세네파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도들도 첫 다마스커스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다마스커스 공동체와 쿰란 공동체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데 스테파노의 설교 중에 인용되고 있는 아모스서의 한구절이(5,25-27) 다마스커스 문헌에서도 발견되었고, 또 에세네 그리스도교 개종자의 저서인 12성조의 성약서는 다마스커스 문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본거지는 다마스커스에서 페트라에 이르는 나바테아 왕국의 한 마을인 코크바였다. 이 마을은 다마스커스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져 있었는데 바울로가 개종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38-41) 지낸 곳이(갈라1,17-18) 바로 자독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마을인 코크바였던 곳으로 생각된다.




안티오키아 교회


안티오키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37년 예루살렘에서 나온 헬레니스트들은 이 도시의 주민들 중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여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 이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공동체로 등장하여 40년에 예루살렘의 사도단은 바르나바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황제 글라우디오(41-54) 시대에 처음으로 이교회의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교회는 예언자 또는 교사라고 불리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항상 그의 선교 여행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병존하기 시작하였다.




1.2.2. 로마교회


황제 글라우디오는 로마에서 유다교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도들 사이에서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50년에 유다인들을 축출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축출된 신도들 중에서 아퀼라와 브리스칼라 부부를 51년에 고린토에서 만나 로마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또한 그가 57-58년 겨울에 로마 신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크게 성장하여 있었다. 아울러 성신 강림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이들 중에 로마인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초기에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과 전승된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그는 43년 옥중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가(사도 12,17) 49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15,7). 성서 문헌은 43년부터 49년 사이의 베드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44년에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25년간 머물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43-49년에 베드로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63-64년에 그의 첫째 편지를 썼고(베드로전서5,19)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베드로는 로마 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자리에 놓여 있는 로마 교회의 창설 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해 온 주교들의 명단은 160년경에 헤제십푸스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리옹의 이레네우스 역시 180년경에 로마에서 이러한 명단을 찾아 냈다. 그런데 두사람은  모두 로마 주교의 명단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역사 및 연대기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교리상의 목적에 의해서 였다.  이단을 반박하여 그리스도교가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을 로마 교회의 사도적 전승을 통해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 주교 명단의 순서는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초기 로마 주교들의 재위 기간이 기입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는 데 놀랄 필요는 없다. 로마 주교 명단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4세기 초에 생긴 것이며 교회사가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로마 주교들의 재위 기간을 기입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로부터 15대 교황인 제피리누스(199-217)까지는 연대가 확실치 않고 그 이후는 상대적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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