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가톨릭 교회(4)

 

19세기의 가톨릭 교회(4)






가톨릭 사회주의의 등장




대중사회와 사회문제 :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9세기 유럽에 중대한 사회변동을 초래하였다. 산업화에 따른 변동 중의 하나는 일반 대중이 정치적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회와 그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사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대중사회가 성립된 요인은 유럽 인구의 급속적 증가,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 민주주의 등장이다. 특히 민주주의 등장은 모든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고 대중은 정치적 권력 형성에 참여하였다.


더우기 산업화한 대중사회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대규모의 산업체가 성장함으로써 생긴 경제 자유주의, 자유체제의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받는 공장 근로자들의 문제였다. 근로조건에 있어서 노동자, 특히 노동력의 2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18세 이하의 청소년 근로자들은 최저 임금으로 하루에 12~15시간의 노동에 종사하면서 봉급의 60~80퍼센트를 주식비에 사용하였다.


여기서 근로 계급의 분노와 불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에 달하였고, 경제적 위기로 인하여 유럽과 미국의 곳곳에서는 파업 사태가 속출하였다. 근로자들은 비참한 생활로 말미암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더우기 확산되어가는 사회주의에는 반그리스도교적인 유물사관의 무신론인 칼 마르크스(1818-1883)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사회주의의 기원 : 19세기 초에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은 근로 대중의 문제를 분석하고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를 높혔다. 일부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회문제의 중대성을 깨닫고 이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가 아닌 가난 자체에 대해서 논의해야 되며 이를 위해서 사회의 구조적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당국의 공식 태도는 사회적 관심에 소극적이었다.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은 소극적인 자선활동에 만족하였고 정의구현을 위한 사회 참여에는 무관심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종교적 자유사상(자유주의 신학)은 단죄하였지만 사회의 불행 또는 악을 조장할 수 있는 경제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톨릭 사회주의는 일부 지방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안목과 식견이 높은 소수의 평신도, 신부, 주교들은 비참한 근로 대중의 문제가 사회정의의 문제인 것을 자각하고 사회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더우기 마르크스의 반종교적 사회주의가 19세기 중엽 이후 발전하여, 산업체의 근로자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이제 교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게 노동자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다.


여기서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가톨릭 신자는 자선활동 이상의 사회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사회윤리의 기본적 정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세째로 신학자들은 항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고 평신도들은 이 원칙들을 적용, 실천하는 임무를 갖는다.


아울러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이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서 사회정의의 업무를 수행하는데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로 온정주의, 즉 고용주에게 근로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과 엄한 지도를 촉구하는 자세이다. 둘째로 협동주의, 즉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의 공동 협력을 의무화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세째로 급진주의, 즉 근로자들이 주도권을 쥐고서 그들의 행복 증진과 지위 향상을 하는 도모할 권리가 있다는 자세로, 근로 계급이 자기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사회적 발전의 실질적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외면상으로는 민주주의적 이념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정치와 연결되는 운동이었다(따라서 후에 교회는 가톨릭 사회주의의 급진파들을 배격하였다).


가톨릭 사회주의의 지도자들로는 독일의 케틀러 주교(1811-1877), 영국의 헨리 에드워드 매닝(1808-1892), 미국의 기본스 추기경(1834-1921), 스위스의 메르미요 추기경(1824-1892), 프랑스의 알베르 드 뮌(1841-1914)과 르네 드라 뚜르 뒤 펭(1834-1925) 등이 있다. 이들은 근로층의 그리스도교 정신을 부흥하기 위해 사회문제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정신을 보여주었고 노조 결성, 근로 시간, 미성년 근로자 보호 등을 위한 근로법 제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은 노사분쟁에 있어서 국가의 조정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이 근로자의 편에서 중재 역할을 하였다.


레오 13세의 「노동헌장」반포 :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1891년 5월 15일에 ꡐ노동헌장ꡑ또는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ꡑ이라고 불리우는 칙서, 「새로운 사태」를 반포함으로써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교황은 이 칙서에서 근로 대중이 사회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비인간적 경영주에 의한 노예 취급 등의 사회악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레오 13세의 주장이 사회주의와 동일한 견해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다. 사회주의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부유한 이들에 대한 증오심을 자극시키고 모든 재산의 공유화를 주장하고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를 우선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사회주의자들을 반박하여 개인의 재산 소유권을 옹호하였고 가정은 국가에 우선하는 사회의 첫 구성 단위라고 주장하였으며, 계급투쟁을 배격하였다.


레오 13세는 세 가지 입장에서 사회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윤리법에 호소하여 근로자는 고용주를 존경하면서 노동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을 노예로 대하지 말고 그들에게 힘겨운 임무를 지우지 말며 정당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은 국가 또는 정부에게 사회복지의 증진과 분배, 정의의 실현을 수행할 임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가는 근로 조건을 통제하고 노사분쟁에 개입하여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경영주와 노동자에게 서로 일치, 협력하여 어려운 노사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면하였다. 아울러 사회문제에 있어서 사회불의와 계층간의 증오심 조장과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레오 13세의 칙서는 근로 대중에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완전히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중대한 사회적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가톨릭 사회주의의 두 가지 결실, 즉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민주정당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근로자와 접근하기 위해서 노동사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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