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3.1.1 중국 선교의 계획


  몽고 제국이 멸망한 후에 유럽의 국가들과 중국의 무역이 끊어지면서 가톨릭의 선교활동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탐험시대에 들어서면서 인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좀더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514년에 중국 남부 지방에 위치한 광뚱(廣東)에까지 이르렀다. 1520년에는 포르투갈의 사절단이 교역 관계를 맺기 위해서 북경에 파견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성격을 갖고 있었고, 왜구(일본의 해적)의 침입과 약탈행위로 외국인에 대해 불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1550년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중국의 모든 항구에서 추방되어 광뚱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인 산첸(山川)으로 물러나와 일정한 시기에 중국인들과 개별적으로 물품을 교환하였다. 7년 후인 1557년, 포르투갈이 중국 해안 지방에서 해적들을 소탕한 공로로 항구 도시 마카오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마카오는 유럽인에게 극동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 상인들이 중국 정부와 무역 교섭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 때, 가톨릭 교회도 중국에 다시 진출하여 전교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예수회의 창설자이며 일본의 사도인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에게서 시작되었다. 사베리오는 일본에서 선교할 때에 중국 문화가 일본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인이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숭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다면 일본의 복음화가 빠르게 성취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1552년에 포르투갈 상인의 배를 타고 산첸 섬에 도착하여 중국 대륙에 들어갈 기회를 기다리던 중에 병들어 사망하였다.


  사베리오의 서거 이후에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많은 수도자(예수회원, 도미니꼬회원, 프란치스꼬회원, 아우구스띠노회원)들은 마카오와 마닐라를 선교활동의 근거지로 중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시도하면서 광뚱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 북부 지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또 광뚱에서도 언어의 어려움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3.1.2 선교사의 중국 입국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중국 선교의 염원은 1573년,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였던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발리냐노는 1573년에 일본으로 가던 도중에 마카오에서 중국 선교의 계획을 세우면서 중국 복음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선교사가 우선 중국어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년 후에 인도로 돌아온 그는 이딸리아 예수회원인 미켈레 루지에리를 마카오에 보내어 중국어를 배우면서 선교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루지에리가 중국 선교의 사명을 받고 1579년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어학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1582년에 마태오 릿치와 프란치스 파시오가 같은 임무를 받고 왔다. 1년 후에 파시오는 일본으로 떠났고, 1585년에 루지에리와 릿치는 중국 남부 지방에 들어가는 허가를 받았다. 루지에리는 중국의 복음화가 빠르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황제로부터 전교할 수 있는 윤허와 선교사의 신변 보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구의 가톨릭 국가의 북경 사절단 파견을 교섭하기 위해 1588년에 유럽으로 떠났다. 마태오 릿치는 점차로 북쪽 지방으로 올라가서 1599년에 남경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마침내 그가 1601년에 황제의 윤허를 받고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예수회의 중국 복음화 계획은 성공하였다. 릿치의 사망 후에도 예수회의 유능한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그러다 1631년에 도미니꼬 수도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으며, 1633년에는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입국하였다. 또한 명이 멸망하고 청 왕조가 수립된 후에도 종교 관용 정책으로 선교사들이 계속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1680년에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들어왔고, 1684년에는 빠리 외방 전교회가 진출하였다.




3.1.3 선교사의 전교활동


  마태오 릿치는 그의 임무인 선교 수행에 있어서 조급하게 서둘지 않았다. 우선 그는 외국인을 멀리하는 중국인들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불교 승려복을 입었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이 당시에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유학자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는 지배 계급임을 깨닫고 유학자의 복장으로 바꾸었다. 또한 그는 서양의 학문(수학, 천문학), 기술(세계지도 제작), 문물(자명종)을 이용하여 중국인의 유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행동은 예수회의 기본적 선교 정책의 표현이었고 현명한 처사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수요하려는 중국 지배층의 학자들을 사귈수 있었고, 그들의 지방에서 선교의 허가를 받아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들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마태오 릿치는 중국의 황실이 역법 제정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회 본부에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606년에 삽바티노 데 우르시스가 도착하여 황제의 요구로 신역법의 제정을 위임받았고, 중국인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천문역산서」를 번역하였다. 마태오 릿치를 비롯하여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학문적 공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의 복음화에 노력, 성공하였다. 선교사들은 황실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북경에 동서남북의 천주당을 설립하였다. 남천주당(남당)은 1601년에 마태오 릿치가 신종 황제를 알현하여 서구 문물을 헌상하고 택지를 하사받아 1년 후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동천주당(동당)은 아담 샬 신부가 청의 황제인 세조에게 땅을 받아 세운 성당이다. 북천주당(북당)은 1703년에 빠리 외방 전교회의 폰타네 신부가 학질로 고생하고 있는 성조 황제에게 키니네를 바치고 부지를 하사받아 지은 교회이다. 북당이 건립된 지 20년 후에(1723년) 라자로회의 페드리니 신부가 세종 황제의 윤허를 얻어 서천주당(서당)을 건립하였다. 선교사들은 4천주당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서양 문물을 전수하기 위해 각 천주당에 도서관을 부설하여, 유럽에서 많은 과학서와 교리서들을 구입하여 비치하는 동시에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한문에 능통, 중국의 고전을 정확하게 해독함으로써 중국인의 문물, 관습, 윤리, 제도를 연구할 수 있었다. 특히 유교사상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해설하는 수많은 교리서들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 또는 저술한 책들은 한역 서학서라고 불리며 이는 학술서와 종교서로 분류되고 있는데 종교서들 중에서 처음에 나타난 것은 미켈레 루지에리의 「성교실록」(1584)이며, 가장 유명한 책은 마태오 릿치의 「천주실의」이다.




3.1.4 조선 부연사의 선교사 접촉


  조선왕국은 건국 이래로 중국의 명과 청에 우호 관계를 맺는 의미에서 해마다 정기적, 또는 임시로 여러 가지 목적의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 부연사 파견은 쇄국 국가인 조선에 있어서 외래 문화를 접촉할 수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하여 관광하는 장소 중에는 천주당도 들어 있었다.


  4개의 천주당 중에서 조선 사신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남당과 동당인데 이는 조선 사절단의 숙소와 가까운 데에 위치하여 산책 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절단 일행의 천주당 관람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만나 필문필답을 통하여 서양의 학문에 대해 문의하거나 종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때에 선교사들은 조선 전교의 방법으로 떠나가는 사신들에게 서양 문물과 함께 종교 서적이나 성물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사신의 일행 중에 어떤 이들은, 천주당이 어떠한 장소인 줄을 모르고 떠들거나 호기심으로 성물을 함부로 만지고, 내부를 더럽혀 선교사들이 퇴장시키거나 조선인의 입당을 거절한 적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처음으로 1615년에 북경에 가서 「게12장」이란 기도문을 얻어와 천주교를 혼자서 신봉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5년 후에(1630) 정 두원이 역관을 데리고 가서 유럽의 천문학의 추산법을 습득하였고, 한역 천문학서와 세계지도 그리고 종교 서적들을 받아 갖고 귀국하였다. 또한 1720년에는 남천주당의 이냐시오 케에구레루와 요셉소레즈를 회견하였다. 두 선교사도 답례로 조선관을 방문하여 천문학과 역산, 천주교에 관한 한역 서학서들을 주었다.


  1766년에는 군관으로서 북경에 간 홍대용은 남천주당에 찾아가 천문대에서 흠천감정(천문대장)으로 있던 남천주당의 아우구스띠노 폰 할레스타인 신부와 안토니오 고가이슬 신부에게 회견을 요청하였으나, 먼저 온 사신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선교사들이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어서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역관 이 덕성과 함께 남천주당에 가서 두 선교사를 만나 대화를 원했으나 거절당하고 성당 구경만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홍대용은 귀국 전에 다시 두 차례에 걸쳐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에게 천문학과 역산술에 대해 문의하고 과학기구들도 구경했으며, 특히 천주학에 대해 토의하였다. 또 그는 서양의 글씨체는 필기체와 인쇄체가 있으며,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왕국의 사신들은 항상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문물과 서적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은 전래된 한역 서학서들을 연구하기에 이르렀으며 조선은 선교사 접촉에 이어 제2의 천주교 접촉 시대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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