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띠노, 1752 – 1801)

 

전라도의 사도 유 항검(아우구스띠노, 1752 – 1801)


  유 항검은 전라도 전주에서 부유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운 종교가 이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천주교인이 된 저명한 인사들에 대한 명성을 듣고 경기도 양근 지방의 권 일신에게 찾아가 교리를 설명 듣고 그 위대한 진리에 승복하여 입교 결심을 하였다. 그는 곧이어 권 일신에게 ‘아우구스띠노’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시켜 전라도의 천주교회가 확고한 자리를 잡게 하였다.


  유 항검은 가성직 교계의 교회 시대에 이 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받고 전라도에서 성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가지 교리서들을 정독한 후에 이러한 성직 활동이 독성죄라는 사실을 알고서 즉시 이 승훈에게 성사 집행, 미사 성제의 봉헌, 설교 등을 중단하고 북경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문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라도는 윤 지충이 1791년에 순교한 이후에 평온해지면서 유 항검의 선교활동으로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 4월 초에 신유대박해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구속되었다. 이 때에 200여 명이 체포되어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거나 귀양을 갔다. 유 항검은 주 문모 신부의 영입 운동에 가담하였고 전라도 천주교의 영수였기 때문에 한양 의금부로 송치되었다. 그는 다른 네 명의 신자들과 함께 국가 전복 음모죄로 기소되어 오랜 재판 끝에 9월에 역적으로 판결받았다.


  유 항검은 같이 체포, 판결받은 동생 유 관검과 함께 다시 9월 17일에 전주로 내려와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능지처참(陵遲處斬)의 극형을 받았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유 항검은 노모와 아내, 그리고 여섯 자녀들을 남겨두고 치명하였다. 당시의 관례대로 그의 가족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고,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여 근처에 있는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그뿐 아니라 유 황검이 역적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10월 6일, 법에 의하여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하는 명령을 내려 3일 후에 그의 장남인 유 중철(요한)과 차남 유 문철(요한)이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다른 가족들은 귀양의 언도를 받고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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