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아우구스띠노, 1760-1801)

 

명도회 초대 회장 정 약종(아우구스띠노, 1760-1801)


12.1.2 입교


  정 약종은 1760년에 경기도 광주군 마재에서 남인계 양반 가문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학구 생활에 전념하여 후기 조선 왕조의 저명한 학자들로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의 동생 정 약용(요한)은 한국 지성사에 있어서 대학자로 손꼽히고 있는 인물로서 다방면의 저서들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내놓아 오늘날까지도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정 약종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과 꾸준한 탐구력을 지닌 청소년으로 시문과 경시에 능통하여 당시의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처음에 그는 유교 철학의 주자학과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주자학의 공리공론에 치우친 경향과 도가의 허무맹랑한 사상을 깨닫고 마침내 여기에 반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때마침 권 철신의 주최로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회가 열리자 19세의 정 약종도 이 모임에 참석하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784년에 이 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 신중한 청년 정 약종은 입교를 서두르지 않았다. 좀더 진지하게 교리서를 탐독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그는 1786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다. 영세 때에 그는 입교에 대한 자신의 망설임이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학자를 영세 주보로 모셨다.


  정 약종은 입교한 후로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독실하게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에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친지들이 교회를 떠나고 천주교 신앙 때문에 가족들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이 천주교를 비방하고 그 신봉을 엄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 아우구스띠노는 가족의 학대를 항구한 인내심으로 참아 받았고 효심을 끝까지 간직한 동시에 신앙인의 본분도 충실하게 완수하였다.          


12.1.3 교회 활동


  무엇보다도 정 약종은 그의 영세 주보인 초대교회의 학자 아우구스띠노 성인과 같이 항상 교회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진지하게 교리 연구와 강의, 그리고 교리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조그마한 교리 한 가지라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면 침식을 잊고 전심 전력으로 공부하여 알아내고야 말았다.


  정 약종은 집에서나 밖에서나 언제나 교리에 대한 명상에 잠기었고 자기가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누가 가르쳐주면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였다. 또한 아우구스띠노는 해박한 교리 지식을 통해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면서 돌보아주었다. 그는 세속 사정에는 어둡고 서툴렀으나 종교 진리를 연구하여 강론하기를 즐거워하였다.


  그는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나눈 다음에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무지한 사람을 만나면 종교 진리를 가르치고 타일러서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지경에 이르렀어도 싫증내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정 약종의 설명을 듣고서 깨닫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냉담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아우구스띠노는 교회 저술가로서도 활동하였는데 일반 대중을 위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이 교리서는 두 권으로 된 「주교요지」(主敎要指)로서 한국인이 처음으로 쓴 기초 신학에 대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주교요지」는 종교 진리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순수한 한글로 아주 쉽고 분명하게 해설하여 부녀자나 어린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다.


  양반 특수층에 속하는 학자로서 한문에 능통하였던 정 약종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한 사실은 그가 자부심을 갖고 한자만을 사용하던 지식층의 특권 의식을 버리고 인간의 평등사상을 터득하고 실천한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천주교의 광범위하고도 방대한 내용의 교리를 종합하여 순서 있게 체계적으로 해설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교리서의 출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신유대박해 때문에 절반도 채 초잡지 못하고 중단되어 완성하지 못하였다.


  1799년 여름, 조정에서는 한 대신이 임금에게 정 약종을 천주교인의 두목이라며 처벌을 요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800년 5월에 양근 지방에서 박해가 있자 정 약종은 한양으로 이사왔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그는 1795년에 입국하여 선교활동 중인 주 문모 신부와 자주 연락하였고 자기 집에 여러 번 모시고 전례 모임도 가졌다.


  주 신부는 정 약종의 출중한 교리 지식과 그의 저서인 「주교요지」를 격찬하였고, 이 책을 신자용 표준 교리서로 추천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교리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성에 탄복하여 평신도의 교리 연구 및 선교 단체인 ‘평도회’를 창설하여 정 약종을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1800년 말에 이르러 조선 왕국의 정부가 천주교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천주교의 괴수로 조정에 알려진 정 약종은 자신이 교난을 피할 수 없음을 예감하고 성물과 성서 그리고 주 신부의 편지 등 교회 관계 서류들을 상자에 넣어 포천의 홍 교만(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집에 맡겨두었다.


  그러나 책 상자를 보관하던 집도 위험하여 다시 1801년 1월 19일(음력)에 임 대인(토마스)이라는 교우가 나무 장사꾼으로 꾸며 상자를 나뭇짐 속에 넣어 짊어지고 아현의 황 사영(알렉산델)의 집으로 옮기던 중에 관리에게 불심 검문을 받았다. 밀도살을 단속하기 위해 거리에 나온 관리가 나뭇짐을 수상히 여겨 밀도살 쇠고기인 줄 알고 임대인을 관청으로 끌고 가 상자를 열어보고 천주교에 관한 물건임을 알고 포도청으로 보냈고 그것이 정 약종의 소유임이 확인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느 친구가 정 약종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의 옷에서 무수한 십자가들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것이 그가 곧 고통을 받으리라는 전조라고 예측하였는데 이 예연은 들어맞았다.




12.1.4 순교


  1801년 2월 11일(음력)에 정 약종이 마재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의금부 도사 일행이 옆응ㄹ 지나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기를 체포하러 마재로 가는 것이라고 추측한 정 약종은 하인을 보내어 물어보아 자신을 잡으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면 돌아오라고 일렀다.


  그의 추측은 들어맞아 아우구스띠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곧장 의금부에 구치되었다. 그는 신문관 앞에서 압수된 상자가 자기의 것임을 자백하였으나 주 문모 신부의 거처에 대한 심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신앙이 진실됨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배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여Tekj. 더 나아가 정 약종은 천주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교리를 설명하고 정부의 천주교 금압 정책이 부당하다고 용감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왕의 명령을 거스리는 불경죄로 단죄되었다. 그이 압수된 일기 속에는 세상, 마귀, 육신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대적해야 하는 세 가지 원수라는 교리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이 정부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간주되어 반역죄로 정죄되었다. 그가 체포된 지 2주일 후 정 약종은 이상의 두 가지 대역부도의 죄인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1801년 2월 26일(음력)에 정 약종이 감옥에서 나와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갈 때에 그의 얼굴은 매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심판 때에 천주교인의 슬픈 울음은 진정한 낙으로 변할 것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사형장에 도착한 후에도 정 약종은 형구 앞에 앉아 그것을 행복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나서 구경꾼들에게 다시 한 번 세상 만물을 창조하여 주재하시는 하느님을 공경할 것을 권유하고 자신의 처지가 결코 수치나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형리는 정 약종의 말을 중지시키고 그의 머리를 나무 토막 위에 대라고 명령하였다. 이 신앙의 증거자는 땅을 내려다 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내밀었다. 사형수의 당당한 모습을 본 형리는 벌벌 떨면서 자신 없이 칼을 내리쳤고 그 바람에 목이 절반 밖에 잘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아우구스띠노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라는 듯이 손을 벌려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처음 자세로 돌아가 마지막 칼을 받고 41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정 약종이 역적으로 처형되자 그의 집과 재산은 몰수되어 남은 가족들은 졸지에 거리로 쫓겨나는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기들에게 어떠한 피해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한 친척들은 버림받은 이 가족들을 마재에 데려와 도와주기를 거절하였다. 다만 아우구스띠노의 한 친구가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가족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왔을 때에 친척들은 차마 동네 밖으로 내쫓지는 못하였다. 정 약종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가난한 시련의 생활을 하였다. 정 약종은 이렇게 될 가족의 불행을 알고서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 모범을 그의 아들인 정 하상(바오로)이 계승하여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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