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첫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1761-1801)

 

한국교회의 첫 여회장 강 완숙(골롬바, 1761-1801)


13.1.2 입교


  강 완숙은 1761년에 충청도 여산의 지방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언변과 통찰력, 고상한 이상과 취미를 갖고 있었고 강직하고 고결한 마음과 인내심을 지니고 있었다. 한때 강 완숙은 불교에 심취하여 속가를 떠나 스님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10여 세가 되어서 불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고서는 신봉하기를 포기하였다.


  혼인할 나이에 이른 강 완숙은 인근 마을 덕산에 사는 지방 양반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는 남편과의 커다란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의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은 까다로운 시어머니의 사랑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가정 생활 속에서 강 완숙은 남편의 친척이 되는 천주교인을 통하여 충청도 지방에 천주교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떤 심오한 영감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느끼던 종교적 갈망이 천주교에서 충족시켜지리라고 생각하였다. 강 완숙은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올바르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라고 확신하였다. 곧이어 그는 그 교우를 통해서 천주교 서적을 빌어다가 탐독하면서 이 종교의 위대하고 오묘한 교리의 진실성을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강 완숙은 입교한 즉시 영웅적 극기의 덕행을 갈망하여 신자로서의 개인적 신심생활을 경건하게 실천한 동시에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주저하던 시어머니와 전실 소생의 아들 홍 필주(필립보) 그리고 친정 부모를 입교시켰다. 강 완숙의 전교 대상 중에 주요 인물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 지영은 변덕이 심하여 아내가 교리를 설명해 주고 입교를 권유하면 즉시 받아들일 결심을 했으나, 천주교를 비방하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서는 결심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강 완숙은 자기의 노력에 대해 아무런 효과도 없음을 깨닫고 남편에게 전교하기를 포기, 이웃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열성적 활동에 대한 소문은 인근 동네에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13.1.3 교회 활동


  1791년에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강 완숙은 용감하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음식도 장만하여 갖다 주었다. 한편 그는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아들인 홍 필주 및 자기의 딸을 데리고 상경하였다. 강 완숙은 남편에게 쫓겨났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열렬한 천주교 신자인 아내 때문에 남편인 자기도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양에 도착하여 창골에 자리를 잡고 지도급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가담하여 지원하였고 그 결실로 이 땅은 첫 선교사인 중국인 주 문모(야고보) 신부를 맞이하였다.


  1795년 1월에 한양에 도착한 주 문모 신부는 헌신적인 여신도 강 완숙을 발견하고 그에게 골롬바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주고 여신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강 골롬바는 지혜롭게 열심을 다하여 여회장으로서의 본분을 완수하였다. 성직자의 입국 사실과 거처가 배교자 한 영익의 밀고로 조정에 알려지자 골롬바는 조선 왕조의 사회 풍습을 이용하여 주 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은익하기로 결심하였다. 양반집은 관헌의 사찰과 가택 수색을 받지 않으며,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부 남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당시의 풍습으로 강 완숙의 집에 주 신부가 숨어 있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처음에 신부를 자기 집 나무광에 피신시키고 식구까지 모르게 석 달 동안 지낸 강 완숙은 주 신부에게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해 괴로와하다가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려고 이곳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피하실 곳이 없으십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이 생각을 할 때에 어찌 몹시 괴롭지 않겠읍니까?”


  시어머니는 이러한 며느리의 괴로운 심정을 듣고 신부를 편안하게 모실 것을 허락하였다. 따라서 골롬바는 기쁜 마음으로 주 신부를 안채에 딸린 사랑방에 모시고 6년 동안 정성스럽게 시중들었다.


  강 완숙은 주 문모 신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성직자의 사목활동을 돕고 교회 운영에 필요한 사무를 지혜롭게 완수하였다. 주 신부가 성무 수행을 위해 외출하였을 때에도 강 완숙만이 행선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성직자의 신변 안전에도 신중하게 유념하였다. 아울러 그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도 열성적이고 성실하였다. 넓은 견식과 출중한 언변을 통해서 많은 부녀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지체 놓은 양반집 부인들도 많았다.


  그의 사도직 활동은 매우 대담하여 국사범으로 몰려 사형 또는 귀양의 벌을 받은 왕족의 부인들이 신자임을 알고 방문하여 위로하였다. 이들의 처소인 상제궁은 역적의 집이라고 하여 폐궁이라고 불렸고 피해를 받을까봐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지만 강 완숙은 신부까지 모셔다가 이들에게 성사를 받게 하여 신앙을 북돋아 주었고 그들의 하녀들까지도 세례를 받게금 하였다. 그뿐 아니라 처녀들을 모아 엄격한 종교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이 언성적 복음 전파자가 되어 각기 집집마다 방문하여 하느님을 권유하게 하였고, 결혼한 다음에는 천주교 신앙을 전하여 부모 친척과 친지들을 입교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주 신부가 입국한 지 몇 년 만에 신자의 수가 6천여 명이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교세 확장은 강 완숙의 끊임없는 선교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당대의 신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주장하였다.


  골롬바를 잘 알고 있던 황 사영은 그의 활발한 포교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강 완숙은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켜 조금도 편안하게 잘 때가 없었다. 이치에 통달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설명해 주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다. 또한 비상한 정력과 활동력을 타고났고, 하늘(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도움을 받은 골롬바는 모든 자선사업을 고무하고 지도하였다.”교우들 또한 한결같이 그녀에 대해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갖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골롬바는 힘차고 슬기롭고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남자들 중에 열심한 교우가 많았으나 모두가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고 정확하게 그의 의견에 따랐다. 골롬바는 애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잡한 일과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때라도 그녀는 능란하고 위엄을 갖추고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였다.”




13.1.4 순교


  1800년 말에 배교자 김 여삼의 밀고로 강 골롬바의 집에 머물고 있던 주 문모 신부가 체포될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 한 신자가 이를 알아차리고 신부에게 보고하여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 대박해로 천주교인들이 구속되어 취조 받으면서 점차로 주 신부와 관계되는 신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신부를 숨겨 사목 활동을 하게 한 강 완숙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같은 해 2월 24일(음력)에 포졸들이 조선 왕조의 사회 관습을 깨뜨리고 강 골롬바 집에 들어와서 집주인과 그의 아들 홍 필주(필립보)를 연행하였다.


  강 완숙은 문초 중에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 문모 신부의 피신처는 물론 다른 신자들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심문관은 상제궁의 하녀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주 신부의 은익 활동을 자백받고, 다시 골롬바에게 신부에 대해 추궁하였다. 이때에 그는 “저희 집에 신부님이 계셨던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얼마 전에 집을 나가셨고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관리는 여섯 차례에 걸쳐 두 발목을 하나로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 비트는 형벌인 주리를 틀었으나, 강 완숙은 무서운 형벌에 못 이겨 여자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라고주장하면서 호교적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천주교 박해를 사상적으로 볼 때에 조선 왕조의 전통적 유교 관념과 그리스도교의 관념에 대립되는 데에 기인한다고 보고 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였다. 심문하던 관리들은 이 여신도의 놀라운 지식에 탄복하였고 따라서 그녀를 배교시키려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골롬바는 다른 여신도들과 함께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면서 신심생활을 중실하게 수행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의 날을 기다렸다.


  1801년 5월 22일(음력)에 강 완숙은 4명의 여신도와 함께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나와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가는 도중에도 동료 여신도들을 격려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성가를 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인 서소문 밖에 이르러 골롬바는 십자 성호를 긋고 제일 먼저 형리에게 머리를 내밀어 40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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