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교회의 교계 체제 확립
랑글로아 신학교 교장 신부가 선교 지방의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1829년부터 파리 본부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회원들은 원칙적으로 조선 선교 참여에 대해 긍정적 대답을 보냈다. 그러나 선교사의 선택과 조선 입국 방법, 그리고 선교사 후원에 대한 보장 등의 문제가 남아 있어 신학교 당국은 망설였다. 이때에 교황청의 다급한 제안과 파리 본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조선 선교를 자원한 성직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샴(태국)의 부주교로 임명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애르 신부이다.
그는 1829년 5월 19일에 파리 신학교의 동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교황청의 제의에 주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첫째로 선교사의 부족은 조선의 선교를 망설이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 지망을 지원하는 젊은 성직자들이 증가하고 있고, 특히 파리 외방 전교회의 회보에 포교성성에서 보낸 조선 교회의 편지를 실어 프랑스의 신학교에 발송하여 호소하면 많은 선교사들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재정적 문제로 조선 선교를 주저하는 태도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자세이다. 왜냐하면 선교 활동 기금은 포교성성과 프랑스 선교 사업 후원회의 보조로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로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고 하지만 조선 선교가 급선무이다. 도움이 필요한 조선 교회의 신자들을 돕는 것은 애덕이며 교황청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애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파리 외방 전교회에 부여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조선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책임 지역이 아니라고 무관심하거나 선교 담당을 지연하지 말고 다른 선교 지역에서 한두 명을 빼내어도 상관이 없다.
네째, 입국이 어렵다고 조선 선교 지원을 주저하는 자세는 소극적이다. 이미 조선 교회의 편지에 의하면 중국인 주 문모 신부가 잠입하여 활동한 적이 있고 조선 교우들의 열성적 노력은 반드시 선교사의 입국을 성공시킬 것이다.
결과적으로 1829년 6월 9일에 브뤼기애르 신부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편지를 포교성성에 보냈다. 그런데 1830년 말에 조선 교회와 그 복음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포교성성 장관인 까뻴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16세(1830-1846)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1831년 9월 9일에 두 개의 교서를 반포하여 40년 만에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독립시켜 교황 대리 감목구로 설정하였고 조선교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애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브뤼기애르 주교는 이미 1829년 6월 29일에 까쁘사의 명의 주교로 축성되어 샴의 부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832년 7월 25일에 자기의 조선교구장 임명 소식을 북경에 있던 남경 교구장인 삐레스 주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1832년 9월 12일에 중국인 신자 왕 요셉과 함께 샴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마카오에 상륙하여 1832년 10월 21일에 임명장을 받았다. 그러나 브뤼기애르 소 주교는 3년 동안의 여행으로 지쳐 1835년 10월 20일에 만주 열하성 뻴리꾸라는 교우촌에서 뇌일혈로 졸도하여 43세로 선종, 끝내 그의 교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