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 교회(1962년-현재)
교황 요한 23세(1958-1963년)는 1962년 3월 10일에 12개의 대목구를 정식교구로 승격시켰고 서울, 대구, 광주 등 3대목구들을 대주교 교구(대교구)로 설정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교계 체제가 확립된 자치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 수원교구(1963년 10월 7일), 원주교구(1965년 3월 22일), 마산교구(1966년 2월 15일), 안동교구(1969년 5월 29일), 제주교구(1977년 3월 21일)가 신설되어 오늘날 3개의 대교구 관구에 13개의 교구와 1개의 민속구(덕원)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69년 3월 28일에 서울 대교구장 김 수환(金壽煥 : 스테파노)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한편으로 1981년 11월 11일에 ‘한국 외방 선교회’는 파푸아 뉴기니아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년-)는 5월 6일에 103위의 한국 순교 복자들을 성인품에 올렸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선교 지방의 받는 교회에서 세계 교회로 등장하여 자립 교회로 발전하였다. 아울러 한국 교회에는 입교자가 계속 급증하여 1970년에 78만8천82명의 신자수가 1980년에 1백32만1천2백93명에 이르렀고 1985년에는 1백99만5천9백5명으로 증가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교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1964년에 전례 위원회를 설치하고 미사 경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1965년 1월 1일부터 모국어로 미사 성제를 봉헌하였다. 이후로 성사 전례서도 점차로 한국어로 번역, 사용되었고 현대 산업 사회에 적응하여 1971년부터는 토요 특전 미사가 시행되었다.
또한 공의회의 정신과 교황청의 훈령에 의해 한국 교회는 1966년 4월에 일치 위원회를 발족시켜 일치 기도 주간(매년 1월 18-25일)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기도하였고, 1968년에는 몇몇 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합동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1968년 1월 일치 위원회는 개신교와 ‘성서 번역 공동 위원회’를 조직하여 1977년에 「공동번역 성서」가 간행되었다. 한편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통해서 평신도의 위치와 사명을 밝혔고 이에 따라 한국 교회도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 경주(傾注)하고자 1968년 7월에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오늘날 평신도들은 교구 및 본당에서 조직을 통해 자문의 임무를 수행하고 전례에 있어서 성서 낭독 또는 성체 분배에 참여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였다.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영혼과 육신을 갖춘 인간, 그리고 인간 사회에 대한 구원을 사명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한국 교회는 근로 대중과 농민의 권익 옹호, 사회 정의의 구현, 사회 부조리의 척결, 인권의 보장, 민주 회복 등을 주창하면서 현실 참여에 긍정적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정부 당국과 긴장 또는 마찰을 일으켰고 교회는 기도회와 시위 그리고 주교단의 교서, 성명서, 메시지 등을 통해서 입장을 밝혔다. 특히 박 정희 유신 정권의 지 학순 주교 구속 사건(1974년) 직후에 등장한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이른바 ‘구국 사제단’은 현실 참여가 정치 활동으로 변모된다고 간주하여 신중론을 내세웠다. 두 사제단의 견해 차이로 인해 교회는 교회의 참여와 그 한계,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한 문제를 두고 양분되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태 이후 이 양극화 현상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라앉았다. 이어서 출발한 ‘제5공화국’은 과거에 교회가 내세웠던 사회 정의의 구현과 같은 의미를 지닌 정의 사회의 구현을 내세웠으나 교회와 정부의 긴장 상황은 오늘날에도 엿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