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 Gregor 1. der GroBe

 71.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  Gregor Ⅰ. der Groβe 590~604

540년경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 원로원의 의장으로 재직하였다. 2년 후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사저를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시칠리아까지 미치는 소유지를 여러 수도원의 창설을 위해 기부하였다.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를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했고, 그곳에서 그는 586년까지 6년간 머물렀다. 또한 황제의 궁정에서 수도자적인 소박한 삶을 살았다. 로마의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 그는 무엇보다도 동방 교회의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590년 9월 3일에 수도자로서 베드로좌에 즉위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 이전에 이미 부유한 가문들은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교회에 기부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교황령(敎皇領)이 생겨났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령을 새롭게 정리하여, 교황령에서 발생한 수익을 약탈로 인해 가난해진 로마 시민을 위해 사용했다.


  아울러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동방 교회와의 관계 개선과 교황 수위권 사상의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 재위기간 이전에는 교황의 수위권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에게로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교황 수위원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황제는 총대주교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ꡐ보편적 총대주교ꡑ라는 당당한 칭호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에 대하여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베드로에게 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상기시켰다(마태 16,18). 총대주교직의 칭호와는 달리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스스로를 ꡐ하느님의 종들의 종ꡑ이라는 칭호로 불렀으며, 그것은 그 이후 교황을 호칭하는 관용어로 정착하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의 교황좌 즉위 이전의 교황들은 로마를 위한 보호막을 찾아야만 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밀어닥치는 게르만 민족에 대항하여 로마를 보호할 수도 없었고 또한 지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이 592년 재차 로마를 위협하려고 했을 때 그들과 교섭했다. 엄청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을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을 비난했다.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서 약탈을 계속했다. 드디어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의 담판에 힘입어 598년, 적어도 수년간 전쟁을 중지시킨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랑고바륻족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를 로마의 대변자로 여겼고, 로마의 주민들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를 자신들의 보호자로 여겼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이제부터 게르만족으로 방향을 돌리는 방법을 모색했는데, 게르만족은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의미를 오래 전에 상실한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몇몇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즉 496년 성탄 대축일에 랭스에서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은 결국 독일 지방의 사도였던 보니파시오가 그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인도하기까지 오랫동안 보편 교회 안에서 하나의 특수 교회로 머물고 있었다. 스페인의 서고트 제국에서는 레카레드(Reccared) 왕이 589년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이로써 수에벤(Sueben)족의 민족 이동이 완료되었으며, 드디어 랑고바르드족의 이동도 완료되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영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위해서도 공헌하였다. 596년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의 수도원 장상인 아우구스티노를 40명의 수도자와 함께 앵그로색슨 지방으로 파견했고, 곧 에델버트(Ethelbert) 왕(그의 부인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은 세례를 받았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아우구스티노에게 개종한 이들의 삶의 방식을 고려하고 가능하면 그들의 생활 방식에 적응할 것을 지시하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아우구스티노를 597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고, 동시에 영국의 교계 제도를 설정할 수 있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광범위한 저술을 통해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그의 시대의 종교적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그 이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요한 복음서에 대한 35권의 주석서는 중세 윤리 신학의 기본적인 교과서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이 책은 Maralia라고 불린다). 4권으로 된 그의 저서 Dialogi(『대화』)는 종교의 힘을 증명하고 신앙 생활을 자극하는 대중적인 성인 전기였다. 끝으로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을 위한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의 헌신은 교황을 서방 수도자들의 제2의 대부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례와 관련해서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사용되는 양식을 로마 미사 전례서에 제공하였다. 이 모든 업적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에게 ꡐ大 ꡑ라는 별칭을 붙이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가 로마에서 주교로 서품된 날인 9월 3일을 그의 기념일로 지낸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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