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9세 교황 Pius 9.

 294. 비오 9세 교황 Pius Ⅸ.  1846~1878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서거 후 추기경들은 1846년 6월 16일 조반니(Giovanni Conte Mastai-Ferretti)를 교황 – 비오 9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792년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 출생하였으며, 1819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27년 스폴레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832년에는 이몰라(Imol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840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신심이 돈독하였으며, 정중하고 자선의 정신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교회 국가와 이탈리아 전역에는 혁명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 전쟁과 통일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은 모든 국민의 계층을 위해 목자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교황 비오 9세는 조국의 적으로 비난받았고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혁명을 주도한 자들은 교황으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기를 요구하였고,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퀴리날레 궁에 교황을 감금시켰다.


  1848년 11월 24일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떠나 가에타(Gaeta)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1849년 2월 9일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50년 4월 12일 교황 비오 9세는 프랑스 군대의 보호 아래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탈리아 군대는 교회 국가에 속하였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였고, 교황 비오 9세가 교회 국가를 포기할 경우 로마 도시의 주권을 보장하고 연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정부는 스스로 교회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즉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교황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연금을 지불하며, 바티칸 궁과 라테라노 성당 그리고 카스텔간돌포(Castelgandolfo) 별장을 교황의 재산으로 보장한다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1871년 5월 15일 교황 비오 9세는 이 법률의 제정을 비난하였다. 이때부터 교황은 ꡐ바티칸의 포로ꡑ로서 살아야만 했다. 1929년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은 바티칸을 떠날 수 없었다.


  이러한 외적인 사건을 교회 내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즉 이러한 외적인 사건의 이면에는 이른바 교황의 중앙 집권주의에 대한 경향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849년 교황 비오 9세는 전 세계의 주교들에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을 새롭게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바 있었다. 대다수의 주교들은 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그 결과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전 세계에서 모인 200여 명의 주교들 앞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을 도그마로 반포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864년 시대의 오류를 지적한 내용을 담고 있는 회칙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이 회칙은 범신론, 자연주의, 합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스도교의 결혼에 대한 오류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리에 대한 오류 등을 종합하고 있다.


  교황 비오 9세 재임 중에 교회 내적으로 남긴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86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추기경들에게 공의회 개최 구상을 밝혔고, 1865년에는 공의회의 의제를 준비하는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1867년 6월 26일 공의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였고, 공식적으로는 1868년 6월 29일 소집되었다. 동방 교회도 초대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분명하게 해명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규율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목적이 제시되었다. 1869년 12월 8일 공의회는 장엄하게 개최되었고, 개회 당시에 이미 642명의 교부들이 참석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의 숫자는 700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공의회는 세계 교회의 모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교황의 무류성을 도그마화하는 데 반대하는 소수의 주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1870년 7월 13일 대다수의 주교들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도그마화를 의제로 다룰 것에 동의하였다. 1870년 7월 18일 교황 비오 9세는 이 의제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을 교의 헌장의 형식으로 선언하였다. 교황 비오 9세의 선언 이전에 이미 로마를 떠났던 주교들 – 이 주교들은 반대 의견을 표시하였던 소수에 속했다 – 도 공의회의 결정과 교황을 통한 선언을 승인하였다.


  1870년 7월 19일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주교들이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 도시를 점령하였고, 그 결과 교회 국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870년 10월 20일 교황 비오 9세는 공의회의 정회와 연기를 선언하였다.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공의회가 일찍 정회됨으로써 무류성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다루어야 할 교회에 대한 중요한 논의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공의회는 더 이상 속개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인 결속력과 로마가 세계 교회의 중심지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여러 국가에서는 구(舊)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세계 교회를 위한 교황 비오 9세의 위상이 강화되었고, 영국의 경우 가톨릭의 교계 제도가 다시금 설정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종교 개혁을 통해 파괴되었던 네덜란드의 교계 제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미국의 경우 가톨릭 교회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교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세계 선교를 위한 활동을 매우 강조하였고, 소련과의 정교 조약(1847년), 스페인(1851년), 오스트리아(1855년), 포르투갈(1857년) 그리고 중미의 여러 국가들과의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ꡐ비오 협회ꡑ와 독일 가톨릭 단체의 결합 등으로 가톨릭의 연합 운동이 일어났다. 1848년 이래로 독일의 주교들은 매년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왔다. 독일의 경우 교회 정치적인 입장은 매우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며, 1870년에는 독일 가톨릭의 정치적 관심사를 대표하는 중앙 기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제후에 의해 (1871년부터) 시작된 ꡐ문화 투쟁ꡑ(Kulturkampf)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국가 사이의 화해에 대한 기대는 파괴되고 말았다. 1872년부터 독일 내에서 예수회, 구속회 그리고 라자로회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이러한 활동의 금지에 대해 교황 비오 9세는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1873년부터 통과된 「5월 법」(Mai-Gesetze)에 대해서도 항의하였다. 이 법은 국가가 주교들과 본당 사제들의 후견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토 비스마르크는 하나의 독일 국가 교회를 설정하기를 원하였다.


  교황 비오 9세가 1875년 2월 5일 반포한 회칙을 통해 「5월 법」에대해 항의하자 교회를 거스르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다. 1878년 프로이센의 경우 정부는 전체 주교들 가운데 2/3 이상의 주교들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1,000여 개 이상의 본당이 사목자 없는 본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ꡐ문화 투쟁ꡑ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정치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ꡐ문화 투쟁ꡑ은 기대했던 것처럼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878년 2월 7일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9세기에 재임하였던 교황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교황이었고, 독일에서는 교황 비오 9세를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ꡐ인내심이 많은 교황ꡑ(Dulderpapst)이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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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 비오 9세 교황 Pius Ⅸ.  1846~1878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서거 후 추기경들은 1846년 6월 16일 조반니(Giovanni Conte Mastai-Ferretti)를 교황 – 비오 9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792년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 출생하였으며, 1819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27년 스폴레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832년에는 이몰라(Imol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840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신심이 돈독하였으며, 정중하고 자선의 정신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교회 국가와 이탈리아 전역에는 혁명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 전쟁과 통일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은 모든 국민의 계층을 위해 목자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교황 비오 9세는 조국의 적으로 비난받았고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혁명을 주도한 자들은 교황으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기를 요구하였고,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퀴리날레 궁에 교황을 감금시켰다.

      1848년 11월 24일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떠나 가에타(Gaeta)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1849년 2월 9일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50년 4월 12일 교황 비오 9세는 프랑스 군대의 보호 아래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탈리아 군대는 교회 국가에 속하였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였고, 교황 비오 9세가 교회 국가를 포기할 경우 로마 도시의 주권을 보장하고 연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정부는 스스로 교회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즉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교황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연금을 지불하며, 바티칸 궁과 라테라노 성당 그리고 카스텔간돌포(Castelgandolfo) 별장을 교황의 재산으로 보장한다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1871년 5월 15일 교황 비오 9세는 이 법률의 제정을 비난하였다. 이때부터 교황은 ꡐ바티칸의 포로ꡑ로서 살아야만 했다. 1929년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은 바티칸을 떠날 수 없었다.

      이러한 외적인 사건을 교회 내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즉 이러한 외적인 사건의 이면에는 이른바 교황의 중앙 집권주의에 대한 경향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849년 교황 비오 9세는 전 세계의 주교들에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을 새롭게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바 있었다. 대다수의 주교들은 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그 결과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전 세계에서 모인 200여 명의 주교들 앞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을 도그마로 반포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864년 시대의 오류를 지적한 내용을 담고 있는 회칙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이 회칙은 범신론, 자연주의, 합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스도교의 결혼에 대한 오류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리에 대한 오류 등을 종합하고 있다.

      교황 비오 9세 재임 중에 교회 내적으로 남긴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86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추기경들에게 공의회 개최 구상을 밝혔고, 1865년에는 공의회의 의제를 준비하는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1867년 6월 26일 공의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였고, 공식적으로는 1868년 6월 29일 소집되었다. 동방 교회도 초대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분명하게 해명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규율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목적이 제시되었다. 1869년 12월 8일 공의회는 장엄하게 개최되었고, 개회 당시에 이미 642명의 교부들이 참석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의 숫자는 700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공의회는 세계 교회의 모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교황의 무류성을 도그마화하는 데 반대하는 소수의 주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1870년 7월 13일 대다수의 주교들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도그마화를 의제로 다룰 것에 동의하였다. 1870년 7월 18일 교황 비오 9세는 이 의제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을 교의 헌장의 형식으로 선언하였다. 교황 비오 9세의 선언 이전에 이미 로마를 떠났던 주교들 – 이 주교들은 반대 의견을 표시하였던 소수에 속했다 – 도 공의회의 결정과 교황을 통한 선언을 승인하였다.

      1870년 7월 19일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주교들이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 도시를 점령하였고, 그 결과 교회 국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870년 10월 20일 교황 비오 9세는 공의회의 정회와 연기를 선언하였다.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공의회가 일찍 정회됨으로써 무류성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다루어야 할 교회에 대한 중요한 논의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공의회는 더 이상 속개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인 결속력과 로마가 세계 교회의 중심지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여러 국가에서는 구(舊)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세계 교회를 위한 교황 비오 9세의 위상이 강화되었고, 영국의 경우 가톨릭의 교계 제도가 다시금 설정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종교 개혁을 통해 파괴되었던 네덜란드의 교계 제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미국의 경우 가톨릭 교회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교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세계 선교를 위한 활동을 매우 강조하였고, 소련과의 정교 조약(1847년), 스페인(1851년), 오스트리아(1855년), 포르투갈(1857년) 그리고 중미의 여러 국가들과의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ꡐ비오 협회ꡑ와 독일 가톨릭 단체의 결합 등으로 가톨릭의 연합 운동이 일어났다. 1848년 이래로 독일의 주교들은 매년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왔다. 독일의 경우 교회 정치적인 입장은 매우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며, 1870년에는 독일 가톨릭의 정치적 관심사를 대표하는 중앙 기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제후에 의해 (1871년부터) 시작된 ꡐ문화 투쟁ꡑ(Kulturkampf)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국가 사이의 화해에 대한 기대는 파괴되고 말았다. 1872년부터 독일 내에서 예수회, 구속회 그리고 라자로회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이러한 활동의 금지에 대해 교황 비오 9세는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1873년부터 통과된 「5월 법」(Mai-Gesetze)에 대해서도 항의하였다. 이 법은 국가가 주교들과 본당 사제들의 후견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토 비스마르크는 하나의 독일 국가 교회를 설정하기를 원하였다.

      교황 비오 9세가 1875년 2월 5일 반포한 회칙을 통해 「5월 법」에대해 항의하자 교회를 거스르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다. 1878년 프로이센의 경우 정부는 전체 주교들 가운데 2/3 이상의 주교들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1,000여 개 이상의 본당이 사목자 없는 본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ꡐ문화 투쟁ꡑ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정치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ꡐ문화 투쟁ꡑ은 기대했던 것처럼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878년 2월 7일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19세기에 재임하였던 교황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교황이었고, 독일에서는 교황 비오 9세를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ꡐ인내심이 많은 교황ꡑ(Dulderpapst)이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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