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十字架 앞에선 인간
十字架 信仰의 意味에 대한 前理解로써 인간은 먼저 자기자신에게로 물음을 던져야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인간관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거기에는 절대 확실한 대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관이라고 할 적에 그것이 하나의 “觀”인 이상 보는 사람에 따라여러 가지로 달리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의 다양함과 다의성이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래적인 관점에서 끄집어 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이고 본래적인 입장이란 “성서”에서 물을 수밖에 없다. 성서야 말로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보는 “인간”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신 앞에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을 神 앞에 선 인간이라고 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은 神의 피조물이다. 둘째, 인간은 神앞에서 죄인이다. 이 두 명제는 조직 신학적 차원에서 표면화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전개에 의도가 있지 않고, 인간의 삶의 實存性과 그 歷史性을 밝히는데 근본적인 의도가 있다. 성서적 인간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救援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둘째 명제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이 죄인이라면,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인간의 救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에게 救援을 열어주는 것이 그의 궁극적 시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救援을 지향하지 않는 인간관은 사실상 인간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송기득, 「인간」, 한국신학연구소, 1991, 60-65면 참조.
본 단원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교 인간관을 前理解로하여 十字架의 意味를 전개할 것이다.
十字架는 救援 사건일 뿐 아니라 啓示 사건이기도 하다. 十字架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하느님에 관한 진리, 인간에 관한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을 찿으시는 하느님을 啓示하며 하느님 앞에 서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十字架가 啓示 사건인 까닭은 하느님이 十字架에서 이룩하신 일을 통하여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상 죽음 안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 또 인간에 대해 啓示하신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十字架에 대한 이론적 해석은 세 가지 관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초자연적 상태로 불리움받고 있으며 罪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의 벗이다. 그러나 罪로 인하여 자신을 상실하고 파멸할 독소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十字架 신학은 그리스도교 인간학과 관련하여 유한한 피조물(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받은 존재(하느님의 벗), 罪에 물든 처지(罪人)를 고려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짊어져야될 十字架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단원은 十字架에 대한 가톨릭적 반성을 정립하면서 十字架 신학을 인간학에 결부시킨, M. FLICK – Z. AISEGHY, Il Mistero della Croce, Brescia 1978, 247-439면에 의존하여 쓴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현대가톨릭사상」, 6호(1992),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편집부, 73-102면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겠다.
1.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과 十字架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이 몸소 창조했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창세 1, 26-27 참조). 송기득, 앞의 책, 1991, 95-106면은 ‘하느님의 모상’에 관한 신학적․형이상학적 해석과 성서적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시각에서 十字架의 意味에 다가갈 것이다. 창조주의 활동은 그의 모상인 인간이 善을 바라는 창조주의 뜻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창조적 사랑에 대한 이해’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창조주께서 창조적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교리가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실재 앞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창조를 진화로 여기는 진화론적 세계관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의 접근으로 이 문제를 살펴 가겠다. 자신과 세상의 부조리로부터 ‘하느님 모상’을 회복하는 일은 十字架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1) 창조적 사랑
그리스도적 세계관은 하느님이 세상에 가지시는 사랑에 대한 信仰(참조. 요한 3, 16; 1요한 4, 16)에 의해 결정된다. 세상내의 惡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밝혀지고 그것으로부터 이해된다. 창조주는 인간을 원수나 경쟁자로 절대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존재와 운동과 생명을 인간에게 계속 전달하신다(참조. 사도 17, 28). 성서 안에는 인간의 창조로써 절정에 이르는 우주 창조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명백히 서술되어 있고, 하느님이 자기 피조물에 대해 惡을 바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세상은 아주 훌륭히 창조되었다(창세 1, 31 참조). 그러나 惡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罪 때문이다. 하느님은 罪를 거부하면서 인간에게 救援을 약속하신다. 성서의 창조 개념은 하느님이 파괴자 또는 惡의 근원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분이 자기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惡의 원리와 끊임없이 대결해야 한다는 이원론적 사고와 전혀 부합될 수 없다. W. BEINERT, 「창조신앙」, 심상태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1, 21-71면 참조.
창조적 활동과 피조물의 선을 바라보는 창조주의 뜻은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데 그같은 불가분의 관계는 창조적 사랑에 대한 이해로써 밝혀진다. 피조물의 사랑의 동기는 사랑의 대상과 사랑하는 주체의 선 사이에 있는 역동적 연관이다. 이에반해 하느님은 동기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사랑하는 피조물의 행동동기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제 1 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적 가르침을 따라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행복을 증가 시키거나 획득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DS 3002). J. RATZINGER, Il Mondo come creazione, Assisi, 1977, 136-141면(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76면에서 재인용). 정통 신학은 ‘하느님의 영광’ 개념으로써 창조가 하느님의 자기 전달, 양도임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맹목적이거나 임의적인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계획이나 지혜에 따라 행동하신다. 즉 어떤 실재의 생산은 하느님 자신이 의도하신 가치에 부합되는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의미를 가질수 있도록 되어있다. 피조물은 받으려는 욕구로 구성된 존재이므로 얻겠다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데 반해서 충만의 근원인 하느님은 자신을 전해주려는 것을 행동 동기로 삼는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광’은 우주를 충만히 채우는 하느님의 전율적이고 매혹적인 실재이다. 이는 또한 피조물들이 참여하고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降生하신 말씀의 인간성 안에 특별히 반영되며 그분 안에 동참해 있는 자들과,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 안에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로 불리움받고 있는 모든이들 안에서, 또한 창조주의 흔적을 반영하는 피조물들 안에서 빛난다. 그러므로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미의 모상을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에 협력한다. 창조 계획에 협력하는 인간의 활동은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설정되어 있다.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린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흠숭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인식, 사랑, 찬양, 봉사, 신적 생명의 활력에 동참하는 것은 三位一體 하느님의 생명에 가장 완전하게 동참하는 것이고, 이는 하느님이 획득하려는 이득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전달하려는 선의 원의에서 나온 것이다. 최영철, 위의 글, 76면.
2) 창조주와 十字架
하느님께서 자유로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교리가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실재 앞에서 무색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가톨릭 전통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 질서 안에서 발견되는 악은 본시 선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세계 질서의 아름다움은 서로 상반되는 이 악 속에서 더욱 찬란히 빛난다. 현존하는 세계는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좋은 세계 가운데 가장 좋은 세계이다(참조. 위의 글, “十字架와 인간”, 77면).
특히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세계를 진화론적인 체계로 이해하고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이해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본 단락에서는 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十字架의 개념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十字架를 언급하겠다. 이홍근,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세계괸에서 본 十字架 개념”, 「신학전망」 68호(1985년 봄),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95-96면에서 떼이야르는 진화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구원의 도구’로서의 十字架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태초의 원초적 혼돈에서 우주가 창조되었듯이 창조적 합일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 부산물인 惡이 완전히 극복될 때 비로소 새 세계가 탄생된다는 주장이다.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惡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고 ‘十字架’를 우주화 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十字架상 죽음이 만물의 통일․새 세계의 탄생에 필요한 진통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고통의 신비를 우주론적으로 설명한다.
진화론적 세계 안에서 선의 일정한 결핍, 즉 ‘형이상학적 惡’은 불가피한 존재이다. 만일 모든 것이 각기 완전한 상태의 균형 속에서 존재한다면 현 상황을 극복함으로써 진화하려는 가능성은 전혀 있지 아니할 것이다. 더욱이 진화하는 세계 안에서는 진화 중에 발생하는 거대한 형태의 실패가 있을 수 있으며 또 그 영향력이 엄청난 것이므로 그와 같은 물리적 惡은 피할 수 없다. 하느님은 피조물을 대신하여 또 세상 안에서 변화를 직접 초래함으로써 일련의 부차적인 원인들을 세상 안에서 야기시킴으로써 활동하시지 않고, 그대신 존재 안에 있는 본래의 원인들(즉 창조할 때에 존재들 안에 심어 놓았던 원인들)을 보존하고 움직이게 하며 진화 법칙에 상응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즉 진화 체계를 변경하고 또 창조의 효율적 계획에 모순될 수 있을 기적적 행위들로써 하느님이 세상의 발전에 계속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 진화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유한한 존재들에게 맡겨진 세상 안에서는 실제로 총체적이며 순수한 선을 포기하고 부분적인 선 또는 외형상 선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하므로써 실수와 잘못들이 저질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화하는 창조 세계는 의로운 사람이건 罪있는 사람이건 간에 모든 인간 존재 안에 내재해 있는 차원인 惡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인격의 역동적 존재, 즉 역사적 존재는 어쩔 수 없이 十字架에 연루되어 있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78면.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A. DONDEYNE, 「세상에 열린 신앙」,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7, 61-64면은 인간을 역사적 존재가 되게 해주는 역사성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자유, 육화된 정신, 상호 주관성, 시간 등이다 ; 인간을 도외시하고 역사를 이해할 수 없고, 역사를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정달용, “인간과 역사의 문제”, 「신학전망」 44호(1979년 봄),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2-15면 참조).
역사의 과정 안에서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존재이다. 역사란 개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가 완결된 것이 아니라 개방된 과정이다. 이 개방된 역사의 내적 근거는 자유이다. 심상태, 「속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989, 66면 :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역사가 가능하고, 인간은 역사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변화 무쌍한 이 세계 과정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느님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생겨나도록 주어진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창조는 전능한 사랑이 이룩한 기적이다. 이 사랑이 인간과 그의 세계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인간의 자유에 의하여 하느님 자신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 있게 해주는 전능한 힘이다.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자유 그리고 진화 과정 속에서 건설되어 가는 세계의 진화는 하느님의 전능한 사랑의 가장 구체적 표지이다. 그런데 인간과 세계는 惡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는다. 인간이 겪는 고난의 원인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있고 따라서 역사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된 사실 자체에 있다. 인간은 자기의 원의와 상관없이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또 불완전한 삶을 영위하도록 규정되었다. 원초의 창조 활동이 처음부터 善과 惡의 역사에 열려져 있었다. 善과 惡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세상의 창조는 하느님의 사랑이 감행한 모험이다. 이 모험에서 빚어지는 모든 결과까지도 책임지기로하고 하느님은 진화하는 세상의 정점으로서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을 창조하셨다. 十字架는 자유로운 창조에서 연유되는 비극적 결과를 떠맡으시는 하느님의 책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참조. 최영철, “十字架에 대한 신학적 이해”, 「가톨릭사상」 4호(1990년),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편집부, 1991, 90-95면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는 데서 빚어지는 결과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의 자유와 책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완전히 거룩한 분으로서 惡을 절대 원하시지 않았으나 자유로운 조물과 진화하는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惡과 苦痛의 발생 가능성을 허용하였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79면.
하느님께서 무죄한 자의 苦痛과 실패를 직접 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苦痛으로 느끼게 되는 일종의 결핍을 원하신다는 것은 창조주의 선과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요구 사항이기도 하다. 苦痛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선의 결핍은 자극이며 역사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그 때문에 개별 인간들과 인간 단체들은 심리학적, 공동체적 및 우주적 균형을 점차로 이루어 나간다. 육화된 정신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본능적으로 절대화시키려는 유혹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기 존재의 다양한 국면들 사이의 균형을 실현하지 못한다. 인간은 단체를 위해 개인을 그리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단체를 도구화하려는 온갖 시도를 거슬러 대항하지 않고서는 공동체적 존재로서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공동체적으로 조직된 노고의 희생을 감수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 역사의 배경에 보다 적절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사실 잠정적 惡은 점진적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심리적, 공동체적, 우주적 균형을 이루기로 되어 있는 인간의 행복과 발전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되기도 한다.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惡 그 자체는 그러한 발전을 자극하고 유도하며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 위의 글, 80면.
2. 하느님 벗으로서의 인간과 十字架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창조질서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창조질서란 인간이 던지워진 그때 그때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에서 기획과 선택과 결단을 하면서 세상이 救援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세상의 救援을 위해 인간을 창조의 중심자리에 두셨다. 즉, 하느님은 세상의 救援을 위해 인간을 단짝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하느님의 벗이다.
하느님과의 友情은 인간 존재의 새로운 기층을 형성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우정의 관계는 降生의 신비로 더욱 분명하게 된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후 세상에서 오시어 스스로 인간을 벗으로 대하시고 벗으로 불러 주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友情의 關係에 비추어 十字架의 상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가장 출중한 하느님의 벗, 十字架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실재에 더욱 접근하게 된다. 겉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맞물려 있는 두 측면, 즉 하느님과의 友情과 十字架를 져야 할 필요성을 자신 안에 통합시키는 인간의 소명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 80면 참조.
1) 하느님과 友情
友情에 관한 啓示는 상호 통합되는 두 노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다음과 같다. 의인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 계약, 그 다음에 평화, 혈연 관계, 마침내 부자 관계와 부부 관계 및 혼인 관계 따위의 유비들로 표현되는 사랑의 일치에로 발전해 간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友情이 율법을 준수하는 현인들, 선택된 백성,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인간에게까지 확대되어 간다. 인간의 이같은 새로운 조건은 그리스도와의 상봉 안에서 밝혀진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인간 세계에 보내심으로써 당신이 사람들의 벗이심을 보여 주신다. 그분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救援자이신 하느님의 자애와 인간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나타났다”(디도 3, 4). 하느님은 두가지 방식으로 犧牲과 聖靈을 부어주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友情을 드러내셨다.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디도 2, 14) 그리스도의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위 행위로 말미암아 획득된 자비, 聖靈으로 인한 새로운 탄생, 변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聖靈을 우리 救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바라는 대로 영원한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 3, 6-7).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聖靈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하느님께서 수립하시려는 友情이 신약성서 전편을 관통한다. 聖子의 봉헌으로 인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 안에서도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하느님이 명하시는 바를 행함으로써 그 자신을 봉헌하는 두 인격의 만남은 友情을 이룬다(참조. 요한 15, 12-16). 이리하여 상호 자신을 봉헌하는 두 인격의 만남은 友情을 이룬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 友情은 ‘사랑의 十字架’와 ‘信仰의 十字架’를 요구한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자녀다운 友情 안에 살도록 불리움받은 반면에 하느님의 벗인 그는 苦痛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로부터, 苦痛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충만한 발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긍정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보다 명백히 드러날 수 있다. 위의 글, 81면.
2) 사랑과 信仰의 十字架
友情은 한 주체가 그 안에서 피동적으로만 머무는 비인격적이고 외적인 상태가 아니다. 우정은 인간의 인격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인간만의 고유한 사랑이며 인격적으로 계발될 수 있기 때문에 인격적 사랑이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된다. 우정 안에서 인간이 자유로이 주도권을 잡고 자신을 선사하므로 자신을 능동적으로 드러낸다 : 참조.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221-230면.
友情에 본질적인 것은 능동적이고 활발한 상호 관계이며, 이 교환 작용 때문에 友情은 받아들여지고 서로 교환되는 것이다. 友情은 자유로이 선물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유로이 그것을 교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대여나 물질의 선사로써만 이루어질 수 없고 자아 증여가 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이기심의 한계를 부단히 초월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은 당신 벗에게서 자기 이탈을 기대하신다. 사랑하고 또 자연적인 자애심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는 사람은 이것을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극복은 자신의 사사로운 선을 절대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개인적 충족을 추구하려는 인간 심리의 욕구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기이고 또 이런 점에서 十字架이다. 하느님은 초자연적 생명의 충만한 성숙 상태, 즉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상태에로 인간을 창조하여 있게 하시지 않고, 인간 자신이 은총의 도움 아래서 자기 생명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친구를 위해서 자신을 투신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며, 또한 이 헌신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만 보다 완전해진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인간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그의 삶에 어쩔 수 없이 十字架를 놓아 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친구이기 때문에” 또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友情 안에서 살며 완성에 이르도록 이끌기를 원하시므로 그에게서 十字架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82면.
하느님의 벗이 된 인간의 자기 봉헌은 信仰 안에서 구체화 된다. 信仰은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분의 권위에 근거하여 일련의 진실을 시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신 啓示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그분에게 자유로이 의탁하는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계시헌장” 5항. 신앙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순종과 신뢰의 정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당신 사랑을 절대적으로 증거하심으로써 우리에게도 당신 자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요구하신다(로마 5, 8-10; 8, 31-39).
신뢰에 찬 의탁은 하느님이 당신과 友情의 삶을 영위하려는 인간에게 거듭 요구하시는 인격적 추종이다. 하느님과의 友情은 우리에게 벗으로서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믿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탁, 신뢰는 자기 이탈을 요구한다.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자신을 열고 모험의 길에, 즉 하느님이 가리키시는 미래에 투신하는 것이다. 나아가 하느님과의 友情 안에서 성숙할수록 더욱 큰 信仰이 필요하다. 이 信仰은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고 信仰이 자기 인격을 위대한 상대방의 인격(하느님)에 주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택이야 말로 탈피를 능가하는 희생을 요구하는 거창한 결단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태도를 포기하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나를 죽이는 것이다. 신앙은 새 세계에로의 진입을 위하여 묵은 세계와 절연하는 것이다.
미래를 여는 하느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신실하고 돈독한 信仰을 한층 더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볼 때 信仰 그 자체가 十字架이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83면.
인간은 信仰을 통하여 자기 폐쇄, 고독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벗이 된다. 이 友情은 하느님의 내면적 생명 안에 잠겨듦으로써만 가능하다. 聖靈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불완전하지만 실제적인 방식으로 三位一體 하느님의 친교 안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각 信仰人들 안에 살아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긴밀히 결합되어 영위되는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애심의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이웃들과의 친교를 발견하게 된다. 信仰은 하느님과의 友情을 통하여 이기심과 고립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이 해방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救援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페 2,11-18 에 나오는 찬가 전체는 그리스도와의 우정과 모든 사람들과의 화해 사이의 일치를 역설한다.
信仰이 희생을 치루지 않았다면 하느님과의 友情, 사람들과의 친교, 또한 인격 해방을 위한 근거가 되는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초대를 수락함으로써 그분에게 신뢰를 둘 때에 그분의 벗이 된다. 그리고 위험이나 일종의 불안이나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참 신뢰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자연적 생명 전체와 마찬가지로 信仰도 十字架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바로 그때 그 때문에 그것은 인간을 완성에로 향하여 향상시킨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 12, 24-25).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84면.
결국 그리스도교 信仰의 뿌리는 十字架 信仰에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벗으로서 생명 마저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의 뿌리는 十字架 信仰위에서만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