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의 위타성

예수 그리스도의 위타성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래서 세계 안에서 다른 실재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타 인격체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인간존재의 초월성으로 인해서 절대자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권리”라는 대립이 발생하는데, 관계의 내적인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모습을 초월성을 매개로하여 마련해 보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절대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미근원인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세로운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하게 의미의 도출을 의도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정립하려는 것이다. “위타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그러한 삶에로 불리움 받은 우리의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1. 위타적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위타성은 그의 삶 전체에서 드러나지만 핵심적으로 그의 죽음에서 결정적이고도 핵심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위타성의 가장 핵심인 죽음의 의미를 더욱 확고히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죽음의 의미를 선행해서 알아보려 한다. 그 전제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난 위타성을 파악해 본다.

1.1. 죽음 이해의 분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죽음이라고 일컫는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죽음로 이해한다. 죽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죽는다는 것 외에 죽음을 이해하는 다른 견해들이 연구되었다. 이 새로운 견해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살펴볼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새로운 이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견해의 죽음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이해된 죽음의 의미와 함께 정리하고 분류하여, 그 이해를 도우려 한다.

1.1.1. 통속적인 이해
죽음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M. Weber의 견해를 중심으로 요약한다. 그는 통속적인 죽음의 이해를 4가지로 분류했다. 1) 육체의 죽음으로 삶이 끝난다는 태도다. 이는 주로 무신론자들의 견해로서 죽음은 고작해야 생명이 사라져가는 과정만을 기술할 뿐이고, 죽음의 형이상학적차원은 아예 처음부터 이들에게서 가려져 있다. 또한 “쾌락주의자나 자살자의 구조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萬事體矣 또는 절멸을 의미한다.” P. 반리섭, 죽음의 이해, 기독교 사상, 1974 참조.
2) 죽어봐야 안다는 태도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불가지론자(Agnostic)와 실증주의자(Positivist)들로서 사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으로서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이다. 3) 사람은 죽어도 그 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존재하리라는 태도이다. 죽음과 더불어 영혼은 개성적 생명(Vita individualis)을 상실한다는 범신론자와 윤회를 통해 정화되어 간다는 윤회론자, 또는 어딘가 모르게 죽은 혼이 있어 교류한다는 심령주의자 등이 이에 속한다. 죽은 자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한국인의 민간신앙은 이러한 태도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김정우, 죽음의 이해,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영성신학연구소, 1995 대구 참조. 한국 및 동양권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추월하지도 않는, 죽음과의 연결(Death-Communication)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죽음 이해로서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관념 외에도 다른 견해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견해들을 서술한다.
4) 죽음은 삶의 관문이라는 태도이다. 이는 죽음을 찬미하는 신비가들의 태도로써, 이들에게 죽음은 참된 삶에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 신비가들은 육체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신이 제한 받게 되는 이 현세 생활을 귀양살이로 느끼고, 죽음을 우리가 이 귀양살이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도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삶의 시작이라는 것으로 영혼불멸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미래지향적인데 이 세상에서 사라져감은 곧 하느님 곁으로 가서 다음 세계에 사는 영생의 한 과정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이 외에도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는 죽음을 자연을 극복,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을 일깨워 주는 불유쾌한 사실로 간주하기도 한다.

1.1.2. 의학적인(생물학적) 이해
생물학적으로 생명현상이란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원형질이 쉬지 않고 일으키는 화학변화를 말하며, 죽음은 연속적인 화학변화의 중단을 의미하는데 생물체가 활동을 멈춘 상태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김정우, 위의 책 참조.
그런데 엄밀한 의미로 보아 생물학적 죽음은 자연계에 있어서 필요한 현상으로서 자연계의 균형과 개체의 보존하기 위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의학적으로 생명이란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고, 뇌가 건전하고, 전 세포가 자기의 맡은 바 신진대사를 수행함으로서 한 유기체의 역할을 이행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곧 죽음이라는 것은 이러한 조직에서 여러 사망징후들이 서로 순환관계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생물학이나 의학에서 죽음은 생의 단절 혹은 파괴로 인식된다.

1.1.3 심리학적 이해
죽음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에 있어서 S. Freud는, 인간이나 동물에게는 삶의 방향으로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삶의 본능(Eros)과 죽음을 향한 쪽으로의 성향을 가진 죽음의 본능(Thanatos)이 있는데, 삶의 과정을 두 본능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투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 무생물의 상태로 삶의 존재를 충동질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견해를 보인다.그러므로서 Freud는 죽음이 삶의 최종적인 것이며, 곧 해당하는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K. Jung은 인생이 어떤 궁극에로의 준비로 보통 인간은 인생의 상승기를 거쳐 정상에 이르면 거기에 멈추어 서게 된다. 이러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죽음은 자기 실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1.1.4 철학적인 이해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수세기 동안 다루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체계적이고도 세부적으로 취급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겠다는 사고보다는 죽음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죽음을 고찰하였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너무도 접근을 가볍게 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초기의 인식은 죽음이 몰고오는 공포를 어떻게 완화 내지 극복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고대의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들이 이러한 사고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죽음의 의미를 다루지조차 않았고, 이후 철학은 소멸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구체적인 ‘삶’과 ‘지금 여기 이 사람’으로서의 현존재 또는 실존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실존철학은 이러한 관심에서 죽음의 의미를 가장 절실하게 추구하였다. 실존철학에서 죽음의 문제는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말하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죽음을 자각한 때부터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중 대표적인 학자로 하이덱거(M. Heidegger)를 들 수 있다. 하이덱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이란 언젠가 닥쳐오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현존재의 구성 요소이다. 즉 죽음은 정지된 시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그는 죽음이 시간적으로 보아 다만 하나의 “아직 아니”가 아니라 하나의 “벌써”의 의미로서 현존재를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인 계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1.2. 새로운 죽음의 이해
죽음의 문제는 인간 누구에게나 일어날 중대한 사건으로,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문제삼지 않는다 해도 죽음의 문제가 스스로 엄청난 문제를 제기해 오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하였고, 인간은 이로 인해 언제나 이 공포나 두려움을 완화하거나 극복하려고만 하였고,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기존에 이해되어진 이러한 죽음의 의미는 죽음의 새로운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적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새로운 죽음의 의미도 육체적 죽음의 한 시점으로 규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하이덱거는 죽음의 이해를 좀 더 새롭게 이해한다. 그는 죽음을 현존재의 구성요소로서 현존재를 규정해 나가는 의미로서 ‘존재의 은신처’라고 한다. 그래서 이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죽음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보았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죽음에 관한 인식을 개발하도록 촉구하였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인간에게 자기의 존재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은 죽음의 공포가 우리 앞에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살아가는 용기와 일하는 의욕과 힘을 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격어야할 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신의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실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초월성의 매개로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여느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절과 파멸의 죽음이 아닌 부활과 영원을 향한 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해야한다는 그 실존적 의미에 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계시의 완성이요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고 이해해 봄으로서, 인류에 던진 그 실존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추종할 수 있는 것이다. 계시에 관한 이해에 대해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 문헌 “Dei Verbum”(계시헌장) 1장 4항 참조 ; 제랄드 오콜린스, 계시란 무엇인가, 김광식 譯, 가톨릭출판사, 1993 서울 참조.

2. 예수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역사적 의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이 죽음의 의미로해서 우리 실존은 규정되어지고 방향 지워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의 죽음은 성자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규정하게 되고, 이 실존적 의미는 인류에게 실존적 의미로 계시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는 관념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완전하고도 확실한 하나의 역사로서 세상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예수와 복음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Horst G. Pöhlmann, 교의학, 이신건 譯, 한국신학연구소, 1995 서울 참조. 현대 그리스도론의 동향은 교회의 근거와 의미인 정체(identity), 세계에 있어서의 과제인 참여(involvment)를 모두 밝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된 역사적이요 인격적인 하나의 존재론을 구상하는 것이다.

2.1. 사건의 줄거리
나자렛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에 속하는 가장 확실한 사실들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인 연구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쳐형일자(언제 처형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일부터가 벌써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네 복음서의 일치된 보도에 의하면 그 처형일자는 유대교의 해방절 주간의 금요일이었다. Walter Kasper, <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譯, 분도 출판사, 1996 참조. 그 금요일일 니산달(Nisan月, 우리 양력 3~4월에 해당된다) 14일이었느냐 혹은 15일 이었느냐는 아직도 토론되고 있다. 왜냐하면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의 두 보도에는 어떤 신학적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허나 여러가지 사실과 그밖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역산(曆算)을 해보면, 예수의 사망일(死亡日)로서 역사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날짜는 기원후 30년 4월 7일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의 처형방법 중에 하나였다. 이 십자가 형벌은 누구보다도 먼저 노예들에게 적용된 형벌로서, 매우 잔인하였을 뿐만아니라 사형수를 차별하는 방법이었다. 로마인들은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려다가 붙잡힌 ‘자유의 투사’들을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서 그들이 자유의 투사가 아닌 노예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잔인하게 우롱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관행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 반란자의 명목으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십자가의 패(titulus crucis)에 새긴 조목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서 예수를 열성당원들과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반도들의 두령이었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와 열성당원들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놓고 볼 때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당시 팔레스티나의 정치적 정세가 매우 불안했던 만큼, 어떠한 형태의 대중집회나 소요라도 이를 미심쩍게 보고 우려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또한 로마의 군인들이라고 해서 남다른 신학적인 정확한 분별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를 걸어 그를 빌라도에게 고발할 수 있는 구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예수가 빌라도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느냐는 질문보다도 대답하기 난해한 질문은 , 무슨 이유로 유대교의 최고 의회가 예수를 유죄로 선고하였는가라는 질문이다. 성서 <신약 성서> 마태 26, 57-68 ; 마르 14, 53-65 ; 루가 22, 54-55 ; 요한 18, 12-18 참조.
에서의 보도에 따르면 최고의회 앞에서의 예수의 재판에서는 두 가지가 문제되었던 것 같다. 하나는 메시아 문제였는데, 이것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데 매우 중요하였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헐어버리겠다는 예수의 말씀이었다. 이 두 가지가 입증되는 경우에는 거짓 예언자요 하느님의 모독자로서 예수의 유죄는 성립되어진다는 것이다. <구약성서> 레위 24, 16 ; 신명 13, 5 이하 ; 18, 20 ; 예레 14, 4 이하 ; 28, 15-17.
예수를 조롱하는 두 장면은 예수에 대한 예수에 대한 유죄입증의 경위가 이상과 같았으리라는 것을 밑받침 해준다.
예수는 유대교의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였고 역시 유대교의 정결례 계율을 위반하였으며 종교의식적으로 부정한 사람들과 사귀었고 율법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곧 유대교의 근본원리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다만 예수 당대 최고의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보통 때는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았던 로마의 주둔군과 협잡하고 결탁한 끝에 그들의 손을 빌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역사라는 무대의 전면(前面)에서 연출된 것이다.” W. Kasper, 앞의 책, 199면 참조.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는 예수의 죽음에는 좀더 깊은 차원이 있고, 그러므로해서 이 죽음의 정치적 오해와 정치적 차원만을 강조한다든가, 예수를 율법 위반자나 비타협주의자로 보고는 반대자들한테 제거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신약성서가 보는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업적이요, 예수의 자발적인 자기희생 내지 자기헌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나 자신의 실패와 좌초에 어떤 해석과 의의를 부여하였는가라는 문제를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2.2. 종말론적 전망(展望)
예수의 어록자료(Logienquelle)에 수난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암시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단지 폭력의 희생이 되어 최후를 마치라라는 예언자들의 운명, 그리고 이 운명이 예수에게도 닥치리라는 암시가 고작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신약성서> 마태 23, 34-36 ; 루가 11, 49 ; 13, 15 참조.
이상과 같은 대목에서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어떤 본격적인 구원 의미를 명백하게 시인하고 있지 않다. 예수 자신의 수난예고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이는 죽음을 감수하는 예수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밖에 수난예고들은 예수의 고난을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하나의 필연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적어도 현존상태에서의 수난예고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부활 이후의 해석이지, 예수의 참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통설인 것이다.
네 복음서에 전해지는 수난기사들은 적어도 여타의 전승자료들을 전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더한 일치를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의 경위를 상당히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여기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개별 질문들보다는, 수난 전승이 아주 분명하게 몇몇 신학적 관심에서 규정되었다는 사실 확인이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이 신학적 관심들로서는 호교론적, 교의적(敎義的), 그리고 교화적 동기들이 발견된다. 한마디로 수난 보도는 하나의 사실 보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복음 선포이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수난 보도는 예수의 수난을 비추어 이미 해석한다. 자료의 실태가 이러니만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 자신의 해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들을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구약성서와 유대교에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할 만한 신학적 해석주들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하였다. <구약성서> 2마카 7, 18. 38이하 ; 4마카 1, 11 ; 6, 29 ; 9, 23이하 ; 17, 22 참조.
이것은 정확하고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상 그렇게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느냐”가 아니라 “이해하였느냐”에 있었다. 자료의 실태를 보고 정작 곤혹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사실 여부의 문제>quaestio facti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한 사람은 슈바이쩌(A. Schweitzer)이다.
슈바이쩌는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와 종말론적 재난,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 고난의 시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고난과 박해라는 재난은 예수에게는 분명히 하느님 나라의 두 모습- 비하와 은폐 -에 속하며, 그런 연유로해서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는 거의 직선적으로 그의 고난의 신비에 귀결된다고 하였다. 이 해석은 예수의 생애가 거쳐간 사실상의 경위와도 잘 들어맞는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폭력의 희생이 되어 횡사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했고 예수까지도 이 사실을 예상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이 예언자들의 운명에 미리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당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에 대한 판가름이 나야했던 것이다. 예수에게는 그것이 최종적이요, 종말론적 위기였고, 은총과 심판을 가름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슈바이쩌가 추측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가 결단을 강요하고 그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강제로 재촉하려 했을 리가 없다. 실상 예수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환호하는 일종의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시위는 장안의 이목을 끌 만큼 규모가 컸었다. 어쩌면 민중의 소요로 번졌을 것이다. 성전 내에서 예수와 기득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신약성서> 마태 21, 10-17 ; 마르 11, 15이하 ; 루가 19, 45-48 ; 요한 2, 13-22 참조.
그러나 그것을 예수 지지자들에 의한 성전 고지 탈환이라는, 일종의 혁명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성전 정화는 예언자적인 상징 동작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구약성서> 이사 56, 7 ; 예레 7, 11 참조.
와 관련지어 볼 때, 이 동작은 세말의 때가 시작했다는 것, 묵은 성전이 끝나고 새로운 성전이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을 둘러싼 분규는 묵은 기원과 새 기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충돌의 일환이었고, 예수는 이 충돌을 그 마지막 결과에 이르기까지 원하셨고 긍정하셨다.
이 종말론적 전망은 최후만찬을 전하는 본문에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영철, 십자가 신학, 성바오로 출판사, 1996 서울, 13-18면 ; <구약성서> 1코린 11, 23-25 ; <신약성서> 마태 26, 20-25 ; 마르 14, 17-25 ; 루가 22, 14 . 21-23 : 요한 13, 21-30 참조.
이 본문들은 후대의 전례에 끼여들어 온 것이 아니고, 따라서 본래부터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는 전해진다고 여길 수 있다. 당신 제자들과 나눈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하나의 종말론적 상징 동작이었다. 예수는 최후만찬 때에 임박한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이 죽음과 함께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미리 내다본다. 그의 죽음은 나라의 도래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 마르코와 마태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가 숨을 거두면서 외쳤다는 그 마지막 말씀도 결국 같은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이상의 것을 총괄해서 말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시련을 대기(待機)한다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예수의 메시지는 지금이라는 세대(Äon)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요구한다. 이 요구에 응하려다 보면 때로는 그 극단적 결과로서 죽음까지도 수락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와 범위내에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과감했던 그분의 공적 활동에서 빚어진 결과일 뿐 아니라, 예수 메시지의 총괄이요 요약인 셈이다. 이 죽음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현세대의 조건들 한가운데서 실현된 모습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의 도래나 종말론적인 시련과 죽음은 현재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있어서 그 죽음이 가져올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죽음과 그에 의해서 “벌써,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현재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우리에게서 완성되지 못한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되어지며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이 완성,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은 곧 구원을 의미하게 된다.

2.3. 구원론적 의의
예수의 죽음은 부활 이후의 초창기 전승층에서 이미 ‘우리를 위한’ 그리고 ‘많은 이를 위한’ 구원의 죽음,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되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을 야훼의 종에 관한 넷째 노래에 비추어서 이해하였다. <구약성서> 이사 53, 1-12 참조.
야훼의 수난하는 종에 관한 이 노래는, 1 코린 15, 3-5에 전해진 오랜 신앙고백 형식과 이에 못지않게 오래된 성만찬 전승에서 벌써, 예수의 죽음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해석은 구속 전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를 위한 근본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은 이 해석의 정당성을 문제시하였다. 실상 예수가 최후 만찬에서 ‘많은 이들을 위함’이라는 이 정식을 당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서 사용했는지의 여부를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복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예수의 죽음이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께 바쳐드린 속죄의 헌신이었다고 하는 이 해석이 예수의 죽음에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신화나 이데올로기로 변모할 위험이 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어떤 구원론적 의의를 부여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수의 몇몇 ipsissima verba(몸소 하신 말씀)의 범위를 넘어 바람직한 수확을 얻어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매우 불안하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으려면, 어떤 집합논증의 길을 통하여, 개별적인 말씀들을 떠받치고 있는 예수의 전반적 지향을 밝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두가지로 가능하다. 우선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에 관한 자신의 메시지와 연관지어 이해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원의 총괄개념이고,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잠재적으로 인식한 구원론이라는 말을 통해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관점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예수 안에서 봉사라는 모습을 띠고 인격적으로 실현되다는 사실 확인에서 비롯된다. <신약성서> 루가 22, 27 참조.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 마치 시중드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 봉사를 단순한 인도주의적 형태로 보아서는 안된다. 또한 당시의 죄인들 및 말단 인생들과 나누신 예수의 친교는 그 자체로서 그들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었고, 그 해방감의 본질적 의미는 하느님 앞에서의 죄책의 사면이었다. 그가 가져다주고 세워 준 새로운 친교는 다름아닌 하느님과의 친교였던 것이다. 봉사, 원수의 사랑에까지 이르는 사랑, 한마디로 이 위타존재야말로 그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룬다. 그는 이 위타존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인격적 화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열어주고 가능하게 해준 새로운 존재방식이다.” W. Kasper, 앞의 책, 212면 참조.
그의 생애 전체는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자기의 죽는 순간까지 이러한 이해를 고수했을 공산(公算)은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볼 때, 논란이 되고 있는 토막 말씀도 어느정도의 역사적 개연성을 인정받게 된다. 예수의 수난예고 말씀들이 성자로서 자신의 자의식으로 직접 행해진 참된 말씀이 아니라, 부활 후에 신학적인 의미를 주기 위해 첨가된 것이라는 논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지향을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최후만찬의 말씀에도 흔히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개연성을 시인할 수 있을 것이다.

2.4. 구원을 위한 연대성
성서에 있어서 인간이 하느님 앞에 고립된 개인으로 서 있는 존재로 생각된 적은 일찌기 없었다. 오히려 죄에 못지 않은 구원의 사회적 차원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은 혈통 및 운명의 공동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주어진 공동체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행은 언제나 한 민족 전체가 져야 할 부담이다. 따라서 죄인은 매우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에 위태로운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제의 공동체는 죄인을 성대하고도 공개적으로 멀리하였으며, 그것으로서 죄인과의 연대성을 부인해야 했다. 이것은 추방과 저주의 의식으로 집행되었다. 이러한 속죄에 의해서만 백성은 하느님과 다시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속죄는 어떤 대리적인 보상행위로도 이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대리 행위에 대한 이해는 예언자들의 설교를 통하여 근본적으로 심화되었는데 이들은 의식적인 속죄행위, 즉 내면의 회심이 결여된 의식이 헛된 것임을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자선과 시사, 고통과 죽음을 참을성있게 견뎌내는 것이 속죄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마카베오 시대에는 의인들의 무고한 고통과 죽음이야말로 대리속죄의 의의를 갖는다는 관념이 확고하게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고하게 당하는 의인의 고통과 죽음은 반구원의 인연을 깨뜨리고 이로서 하느님의 자비의 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약성서> 2이사 52, 13-52, 12 참조. 대리 수난에 관한 이 신학의 전무후무한 절정을 이루는 것이 2 이사야가 전하는 야훼 종의 넷째 노래이다.
이 주님의 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는데, 어떤 역사적 인물도 이 종에 해당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인물은 장차 오실 분을 가리키는 예표(豫表)가 된다. 유대교에서는 여기의 수난예언을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구약성서의 이러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그의 대리수난과 대리죽음에 관한 신약성서의 언명들이란 부활 이후의 교회의 설교에 불과한 지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그러나 슈바이쩌의 견해대로 우리는 예수에게서 일종의 잠재적 대속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추종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러자면 그 길을 우리에게 터주고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한다. 즉 이 추종이 이루어지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그러므로서 추종의 외침에는 대속사상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 이후의 교회의 설교는 이 ‘우리를 위하심’(ὑπἑρ ὴμϖν) 그리고 ‘많은 이를 위하심’(ὑπἑρ πολλϖν)이라는 짤막한 정식을 예수의 역사 및 그 운명을 해석하기 위한 중심으로 삼았고 이로써 예수를 “위타인간” 이 표현은 D. Bonhoeffer의 것이다.
으로 정의하였다.
바울로는 이 대속의 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킨다. 바울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참된 교환이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유리하게 입장이 뒤바뀐다. 이 교환을 바울로는 화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反구원의 세상은 하느님에 의하여 당신자신과 화해하게 되었고, 상황이 뒤바꿔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이들을 위해서 죽으셨으니 살아 있는 이들은 더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네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기 위함입니다.” <신약성서> 2코린 5, 15 참조.
대리속죄에 의한 화해는 그러기에 다른 이를 위한 대속적 현존을 살아가도록 우리가 파견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화해의 업적으로 해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랑으로 규정되었으며 서로 상대방을 위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이 연대성은 바로 새로은 창조의 현실인 것이다. 공관복음 사가들이 전하는 사상도 결국은 같은 내용이지만 그 표현은 매우 시각적이고 조형성이 풍부하다.
이와같이 성서의 여러가지 말씀들을 개관할 때 우리는 예수의 예수의 인간적 모습의 기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당신의 본질이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독존적 자재(獨存的 自在)를 말하는 것이다.
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본질은 “자기희생”이고 “자기포기”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서는 사람, 그들을 위하기에 그들과 더불어 자원으로 인연을 맺는 사람이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으로서 그의 본질은 사랑과 헌신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 사랑이라는 것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구체적인 현존양식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실현된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연대성은 인간들 사이에 어떤 새로운 상호연대성을 세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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