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나)

2.1.2.8. 요약

구약성서의 계시는 그 중심을 야훼에게 두고 있는데, 야훼는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겪은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자신이 한 약속을 이루는 분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이해에서 독특한 점은 각각의 사건들이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내적인 관련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사건들은 항상 에집트에서의 탈출을 통해서 자유와 삶을 선사자로 자신을 체험하도록 했던 하느님의 새로운 표징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여기에 적용된 해석의 틀은 약속과 그 이행 그리고 심판과 용서이다.
이른바 성서의 역사적 텍스트들은 사실상 역사적 텍스트가 아니라 신학적 텍스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 사건들을 야훼 신앙과 밀접히 연관지어서 고찰하였다. 즉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단지 피상적으로 자연적 인과성(因果性)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야훼와의 관계에서 고찰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야훼가 주는 위로의 표징, 행복의 표징, 주의와 경고의 표징으로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이미 형성된 야훼 체험, 특히 출애급에서 형성된 체험은 그후의 야훼 체험에 대한 ‘원료’(Materia)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과거에 야훼로부터 얻은 구원의 체험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듭거듭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야훼께 둘 수 있는 근거와 본보기가 되었다.
아주 다양한 체험의 ‘돌’들을 모아 서로 연결지어서 하나의 ‘건물’을 형성한 것은 특별히 구약성서의 역사서의 업적이다. 이런 연관적 고찰에 대한 중요한 예는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전승들을 문학적으로 솜씨있게 요약한 신명 26,5b-10의 짧은 구원사적 신앙 고백이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 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징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에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로부터 받는 위협에 직면해서 조상들이 에집트에서 해방된 것과 약속된 땅에서 거주하게 된 것을 기억하면서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마련해 주신 삶의 터전을 다시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2.1.3. 야훼 신앙의 특색

지금까지의 서술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실존에서 중요한 시점들 머무르면서 거기에 숨겨진 야훼 체험을 밝혀내었다. 이제 이렇게 해서 밝혀진 야훼 체험을 바탕으로 야훼 신앙의 특색을 정리해보자. 이 특색은 예수의 야훼 하느님 신앙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어 나타나고,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에 포기할 수 없는 구성 요소로 자리 잡는다.

2.1.3.1. 야훼는 유일무이한 신(질투하는 신)

오늘날 구약 성서학은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엄밀한 의미의 유일신론은 바빌론 유배 시절에 작성된 성서 텍스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신명기계의 역사서의 마지막 편집(신명, 4,35 참조)에서, 특히 제2 이사야서(이사 44,6-8; 45,6.18 참조)가 그것이다. 一神숭배에서 유일신론으로.의 변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이스라엘 시조시대의 가족신의 숭배는 당연히 고대 근동 종교들의 다신론적 틀 속에서 움직였다. 모세의 무리들의 야훼 숭배는 가나안 종교의 특색들을 흡수하였다. 야훼 숭배자들에게 독특한 점은 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결합, 즉 다른 신들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고 오직 야훼만을 배타적으로 숭배한 것이다. 이들에게 전형적인 언어 구조는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같지 않다”는 말이다. 모세오경의 야훼스트 문헌층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런 야훼 일신숭배는 다윗과 솔로몬이 비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들의 통치권에 포함하기 시작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방인의 신들에 대한 숭배와 혼합주의가 확산되었는데, 이를 대항해서 ‘오직 야훼만을 숭배하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움직임의 첫째 단계(기원전 9세기)에는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아합 왕(기원전 874-853)시절 바알(Baal) 숭배에 대항해서 가르멜산에서 이루어진 야훼께 대한 신앙의 결단의 촉구(1 열왕 18,21)는 단지 배타적인 야훼 숭배의 요구일뿐이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의 첫 번째 증인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베틀레헴 근처 태코아 출신 아모스(기원전 760년 이후)는 가장 오래된 기록 예언자인데, 그에게서 야훼는 이방민족들의 역사도 조종하신다는 생각(아모 9,7 참조)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아직 어디까지나 다신론적 틀에서 움직인다. 북왕조 출신의 첫 번째 기록예언자로서 기원전 752년부터 722년까지 활동하였던 호세아부터 야훼만을 숭배하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다. “너희를 에집트에서 이끌어 낸 것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에게 나 외에 어느 하느님이 있었느냐? 나 말고 누가 너희를 구해 주었느냐?”(호세 13,4). 호세아는 신명기와 기원 8세기부터 7세기에 이루어진 예식 개혁에 그 기원을 두는 신명기 학파에 영향을 미치면서 영감을 주었다. 요시아 왕(기원전 641-609) 치하에서의 개혁은 종교 예식을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키고 국가의 법령으로 야훼만을 숭배하도록 제도화하였다: 한분이신 하느님- 하나의 종교 예식. 예루살렘 출신의 이사야(740-701년 무렵)와 아나톳의 예레미아(628년 경에 불리움)는 다신론적 지평을 아직 떠나지 않은 야훼 일신숭배자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이방인의 신들은 “無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과 역사의 형성에 있어서 무력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이사 6,1-5; 예레 2,5 이하 참조).
3) 야훼 일신숭배의 다신론적 틀의 붕괴는 제2 이사야의 작품에서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이사 40-45 참조). 문학적으로 우주적 재판에서의 심리(審理) 형태로 이방인의 신은 어떤 통찰력도 지니지 못하고 역사에 개입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선고되었다(이사 41,21-29 참조).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이 효력을 내지 못한다는 데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론지음으로써 유일신론에로의 결정적인 이행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임금, 그의 구세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누가 나와 같으냐? 나서서 말해 보아라. 누가 처음에 장래의 일을 미리 들려 주었느냐? 앞으로 될 일을 우리에게 말해 보아라. 겁내지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오랜 전부터 미리 들려 주고 알려 주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또 있느냐? 과연 다른 바위는 없다. 나는 그런 것을 모른다”(이사 44,6-8).
제2 이사야에 직접적으로 의존함이 없이 -바빌론의 유배 시대에 이루어진- 신명기의 최종 편집에서도 명확한 유일신론적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중심적인 텍스트는 신명기 4장인데, 이 대목이 오래된 1-3장과 5장 사이에 삽입되었고 그래서 이 장들도 엄밀한 유일신론적 의미로 읽혀져야 했다.
유일신론적 사상, 즉 다른 신들의 존재가 명시적으로 부정되고 야훼만 홀론 존재한다는 고백은 기원전 6세기에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유일신론적 사상은 유배 이후에 쓰여진 구약성서의 기록에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아울러 이 시기에 보충이나 교정을 위해서 예전의 기록에 기입되기도 했다.
구약성서의 후기 시대에는 그리스 철학이 사상적, 언어적 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도움으로 다신론적 논거의 논리적 불충분성이 증명될 수 있었다(지혜 13-15 참조).
다신론을 바탕으로 한 일신숭배에서 유일신론으로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 두 가지가 제시된다.
우선 이스라엘이 바로 바빌론 유배시절에 유일신론적 신앙 고백을 형성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은 그리스(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와 페르시아(짜라투스트라)에서도 유일신 신앙이 증명될 수 있는 바로 그 시대에 유일신론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유일신론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의 하느님 체험은 분명히 그때마다의 종교학적 시기에 상응하는 사고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새로운 체험에 직면해서 어떻게 하느님 주권의 영역도 넓혀갔는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유목민적 생존 방식에서 문명국인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삶으로 이행하면서 이전에 그리고 동시에 이방 민족의 신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권한을 야훼에게 옮겨 놓았다. 왕정시대에 이웃 국가들과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야훼의 주권 영역이 이 백성들의 운명을 조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확장하였다. 마지막으로 바빌론 유배 때에 야훼는 모든 곳에서 당시 백성과 함께 있으며, 세계 역사를 장악하면서 이를 좋은 미래로 이끌 것이라는 사상이 성숙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상과 함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만이 우주의 유일한 신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이스라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한 국가가 망하면 그 국가의 수호신도 사라지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 왕조가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주권의 영역이 최대한으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분명한 파국과 비구원의 상황에서도 구원을 이룩하시는 야훼의 행동에 대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배 시대의 신학자들(특별히 제2이사야와 신명기 학파)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야훼는 단지 고향에서만 힘을 발휘하는가? 아니다, 그는 세상 전체의 창조자이다! 야훼는 바빌론의 신들에게 패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모든 민족들의 유일한 주인이시다! 야훼는 자신의 백성을 타향에다 내쳐두었는가?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징벌하고’ ‘정화시키는데’, 바로 이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야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배척하지 않고서도 몇백년에 걸쳐서 야훼를 유일한 신으로 공경할 수 있었는가? 분명히 이스라엘은 다신론적 배경 속에서도 일신숭배의 형태로 야훼-계시의 본래 내용을 고백하고 사는 데 성공했다. 일신숭배와 유일신 사상에서의 일관되는 기본적 주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인격적-배타적 관계이다. “야훼는 유일하다”는 힘찬 외침은 궁극적으로 논증이나 논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언어(아가 6,8 이하 참조)에서 유래한다. 이런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또한 신명기계의 표현인 “질투하는 야훼”가 있는데, 이 표현은 -아직 다신론적 언어 사용 중에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을 준비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실존적으로 밑받침하였다(신명 5,9; 6,15 참조).
구약성서의 문헌은 이스라엘이 유일신론에 비교적 늦게 도달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역사와 자연 속에서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그래서 배타적으로 숭배한 하느님과의 삶을 다른 신들이 존재하느냐는 이론적인 질문보다 앞세웠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은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야훼는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즉 당신에게 응답하고, 당신에게 방향을 두고 의탁하며, 인간 관계를 포함한 모든 가치를 하느님 관계에 포함하기를 원한다. 이스라엘은 이런 유일신 야훼께 대한 신앙을 매일 기억해야만 했다.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4). 신앙심 깊은 유다인은 이 위탁을 오늘날까지 수행한다.
유일신 신앙은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신앙실천 차원에서 명백하게 실천으로 증거되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피조물(돈, 명예, 권력, 섹스, 黨, 민족)을 절대화하여서 거기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2.1.3.2. 야훼는 계약의 신(철저히 충실한 신)

“berit”(계약)이라는 말은 비로소 신명기계의 신학(기원전 7세기)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학적 중심 개념이 된다. 그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를 위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는 계약 사상의 신학적 내용을 이미 앞서 형성하였다. 그중에서 특별히 표현력이 강한 것이 있다. 즉 예언자들은 남녀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받아들여서 약혼시절, 간음, 새로운 구애(求愛)라는 표상으로 사용하였다 (참조: 호세 1,2-9; 2,4-17.18-25; 3,1-5; 예레 3,1-13; 에제 16,1-63; 이사 54,1-8; 62,4-5)
결혼의 표상은 처음으로 호세아 예언자에게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애인에게 자신을 준 간음한 여자로 비교된다. 야훼는 자신의 신부의 불충실을 고발하면서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회개 이전에도 야훼는 그녀를 다시 돌본다. “내 생각은 하지 않고 … 귀걸이 목걸이로 몸을 단장하고 정부들을 따라 나서는 것들을 나 어찌 벌하지 않으랴. -야훼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호세 2,15b-16). (새로운) 계약체결은 파트너 사이의 화해를 확증한다(호세 2,18-25 참조).
야훼는 자신의 결혼(계약) 상대자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그는 사랑의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유로이 원한 회개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충실 그 자체인 야훼는 행복과 친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새로운 계약”의 약속도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에 대한 야훼의 고발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야훼의 꺾이지 않는 계약 의지는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를 포함하면서 포괄적인 희망을 일깨운다.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다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예레 31,33-34).
창세 1-11장에 나타난 보편적 전망에서 제관계의 노아 이야기는 야훼가 인간의 악 때문에 유발한 대홍수를 끝맺는다는 표상(창세 9,8-17 참조)을 통해서 야훼의 계약 의지를 주제로 삼는다. 야훼는 계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삼는데, 이는 전쟁에 쓰는 활을 기억케하면서 야훼가 이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창세 9,14 이하).
신명기계의 계약 사상의 핵심은 야훼가 이스라엘과 맺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스스로 의무를 진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배타적인 야훼 숭배와 계약에 따른 윤리 이행을 의무로 삼는 것이다. 구약성서적 계약 헌장은 신명기계 신학파가 작성한 십계명(출애 20; 신명 5)이다: 첫머리에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능력과 구원의지를 보여준 야훼 자신이 소개되고 이어서 야훼의 지시(십계명)이 나온다. 계약 사상의 신학적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약 제시는 선택, 즉 주권적인, 자유로운 결단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이는 사랑에서 기인해서(호세 11,1 참조) 하느님 스스로가 의무를 지는 것이지, 인간이 먼저 어떤 업적을 쌓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갈라 2,15 이하 참조).
하느님의 교육방식은 (출애급의 체험을 상기시키면서) 먼저 구원을 약속하고 그 다음에 윤리적 명령을 내린다. 오직 수직적인 차원(하느님과의 관계)와 수평적인 차원(공동체적 인간성)의 융합 속에서만 성공적인 인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야훼가 인간을 위한 신이기 때문에 그의 호의에 대한 응답은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카)이 하느님 신앙에 근거해서 사회적 비판을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부당하게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곳에 야훼는 분노하면서 약자와 억압받는 이의 편에 선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하느님은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에 대해서 카인에게 물으신다. 반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와 구조적으로 비슷한 로마의 건국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는 이런 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2.1.3.3. 야훼는 인간에게 친근한 신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 구원의 보편성)

‘원사(元史, Urgeschichte)’라고 일컫는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역사를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관점에서 얘기한다(아담의 창조; 노아와의 계약).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친교 제의를 거절하여 죄가 양적으로 증가되고 질적으로 심화된다. 이렇게 죄에 물든 인간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하느님은 한 개인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대응하신다. 그러나 창세 11,27의 아브라함의 이야기 시작에서도 야훼의 구원의지가 근본적으로 보편적 지평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원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사이에 놓여있는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배타적인 선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백성을 위한 선택, 즉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축복을 얻을 것이다”(창세 12,3).
예언자의 전통은 이런 보편적인 구원 전망을 끌어들인다. 이사야는 이를 여러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다는 표상(이사 2,2 이하 참조)으로 표현하는데, 이 주제는 즈카리아도 사용한다(즈카 8,20 이하 참조). 구약성서의 몇몇 구절에서는 야훼께서 다른 백성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셔서 이들이 무릎을 꿇고 당신을 공경하도록 하신다는 예언자들의 확신이 발견된다(이사 19,19.21; 스바 2,11; 말라 1,11 참조).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리게 하시기 위해서 한 민족을 선택하신다. 즉 이 민족은 하느님과 함께 한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구원의 체험에 대해 증거하고, 이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계시는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을 지닌다. 하느님의 계시는 한 민족을 형성하고, 이 민족은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아니라 개방적인 성격의 것으로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선택은 표지적, ‘성사적’ 성격을 지닌다.

2.1.3.4 야훼는 거룩한 신 (역사 안에 내재하면서도 초월자로 머무는 분)

‘거룩한’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형용사 ‘qadosh’의 어근은 ‘qdsh’인데, 이것이 원래 의미하는 바는 ‘분리되어 있다’,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소명에 나오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 6,3)라는 세 번의 외침은 우선 야훼가 인간의 체험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과 존재적(ontisch)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야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야훼는 시간을 지배하고 제한될 수 없는 분이다(시편 90,2; 이사 44,6; 48,12 참조). 야훼는 시간을 넘어서는 분으로서 동시에 모든 시간에 현존하실 수 있다. 야훼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적인 다름에 근거해서 윤리적으로 다른 행동, 즉 전대미문의 거룩하고 호의적 행동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 호세아 예언자는 호세 11,1-11에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최상의 사랑에 근거해서 자신의 정당한 분노를 자비와 용서할 준비로 바꿈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임을 드러낸다. 야훼는 인간과는 다른 사랑을 지녔기에 자신의 계획을 변경한다. 그러나 그 변경은 항상 선을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야훼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런 야훼의 ‘초월적’ 사랑의 행동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모성적 사랑의 표상으로 표현된다. 즉 근래의 성서학은 자비와 용서할 준비에서 야훼의 모성적인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도록 하였다. ‘자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 ‘rahamin’은 자궁이라는 단어의 복수형이다: 야훼의 모성적 자비만이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데, 이런 자비는 인간의 회개보다 앞서 다가온다. 제2 이사야는 야훼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것을 자신의 젖먹이에 대한 어머니의 불변의 사랑에 비유해서 표현한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6,13). 야훼는 어머니처럼 사랑한다(호세 11 참조). 성서의 이런 언어적 형태는 야훼를 –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성적으로 남성이라고 하지 않듯이- 여성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표상적 언어는 단지 야훼가 자신의 백성에게 쏟는 지대한 관심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좀더 생생하고 가깝게 선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십계명에서 형상을 금지한 것(출애 20,23; 신명 5,8)은 우선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서 공경하는 혼합주의적 행동을 금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금령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어떤 한 모습에 담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이사 40,18.28).
하느님의 본질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행동한대로 결과가 나타난다는 인과응보적사고 방식이 문제시되는데, 이는 유배 시대의 텍스트(시편 44; 77 참조)에서 처음 나타나고 그 후에 욥기에서 분명하게 등장한다: 고통은 항시 고통을 당하는 이의 죄의 결과로만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악의 존재가 하느님의 전능, 선하심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변신론(辯神論=神義論, theodicy, Theodizee)은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인간의 죄에 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불투명하기 때문에 순수 이성적으로 원인의 원인을 찾아서 모든 것을 다 밝혀낼 수가 없다. 고통과 하느님 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 참조: 손희송, 「그리스도교의 고통 이해」, 『신학과 사상』 19(1997, 봄), 80-97.
또한 하느님은 거룩하시기에, 즉 인간과는 사뭇 다른 사랑의 소유자 이시기에 한 개인(욥기)이 혹은 당신 백성 전체가 고통을 당하면서 당신에게 탄원은 물론 고발을 하는 것도 허용하신다(시편 10.1; 22,2; 43,2; 74,1 참조).

2.1.3.5. 야훼는 인격적인 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를 인간에게 말을 건내고 ‘요구를 하는 상대’로 체험하였다. 즉 야훼는 당당하게 역사와 자연에 관여하면서 자신을 알리고, 동시에 자신이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분이다. 다시 말해서 야훼를 인격적인 존재로 체험한 것이다. ‘인격체’(Persona)란 자의식과 자유를 소유하고서 다른 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성적 존재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바로 이런 인격체로 체험하였던 것이다
셈족의 이해에 의하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특성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을 behemah, 즉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이런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느님 역시 말을 하는 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것’(Es)가 아니다. 이 신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고, 독자적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bei sich selber)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의 피조물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피조물은 정당하게 그를 ‘당신’(Du)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의 이러한 ‘인격적’ 본질은 하느님의 ‘얼굴’(Angesicht), 하느님의 ‘마음’(Herz)이라고 말하는 식의 의인적(擬人的) 방식(Anthromorphismus)의 서술로만 표현되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라고 계시하는 데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표명된다”. H.Vorgrinnler, Theologische Gotteslehre, Düsseldorf, 1985, 57.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인간처럼 주저하고 숙고하며 헤아리며 결정을 내린다는 의인적인 표현 방식은 인간사에 생동적으로 관여하는 야훼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의인적 표현은 하느님의 생동적 충만을 남김없이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시할 뿐이다. 그러기에 이런 의인적인 표현은 동시에 하느님이 근본적으로 인간과는 다르다는 점, 즉 하느님의 초월성과 함께 생각해야만 잘못된 신이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야훼는 거듭해서 인간를 구원, 지도, 위로하며, 자비를 베풀면서 자신을 신뢰할만한 대상으로 내보이지만, 동시에 독자적이고 조작불가능한 세상의 창조자, 역사의 주인으로 머무른다.
구약성서는 물론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서 그래서 인간이 찬미하고 탄원하며 청원하고 반항할 수 있는 상대로서 믿고 이해하는 것은 다른 종교와 비교점이 된다. 즉 어떤 최고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앙을 찾아 볼 수 없는 동양의 힌두교나 불교와 분명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단지 끝없는 침묵만을 감지한 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들을 수 있고 말을 붙일 수 있는 분으로 발견했다: 나(Ich)라고 말하면서 인간들에게 다가오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너(Du)로 삼은 분, 즉 말을 건네고 말을 붙일 수 있는 너” H.Küng, Christ sein, München, 1974, 294.
로서 말이다.
이렇게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초월적이면서도 스스로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의 일에 관심을 갖는 하느님이다. 야훼 하느님은 “피안적이고 그리고 현세적이며, 멀고 그리고 가까우며, 세상을 초월하고 그리고 세상 안에 있으며, 미래적이고 그리고 현재적이다”. 같은 책, 296.
구약성서의 이런 하느님 이해는 홀로 떨어진 不動者라고 신을 추론하는 그리스 철학과도 차이가 난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인간에게 결코 무관심하지 않고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다가가고 요구하는 구체적인 실재로 파악되어야 한다. 스스로 움직이는 세상 안에서 (혹은 그 바깥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공간에서 행동하고 인간의 사건들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인간적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며 그래서 자신과의 만남과 교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신이다. 즉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세상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초월 속에서 고고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참여를 하면서 이 어두운 역사에 관여하는 신이다. 고독한 신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신, 계약의 하느님이다”. 같은 책, 298.


2.2.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이해

2.2.1. 나자렛 예수의 하느님

2.2.1.1. 구약에 계시된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

오늘날 모든 성서학자들은 예수 선포와 행동의 중심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어떤 지역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 당시에 상당히 일반화된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여러 종교 집단에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지만,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그런데 예수는 어디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를 내리지는 않고 단지 표상과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였다. 즉 하느님 나라는 ‘주의 기도’(마태 6,9-13)에서 언급된 것처럼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죄가 용서되고 모든 악이 극복되는 나라, 행복선언에서처럼(루가 6,20-22; 마태 5,3-10)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짓밟히는 이들이 우대 받고 아픔과 고통과 죽음이 끝나는 나라, 새로운 계약, 싹트기 시작한 씨앗, 익은 곡식의 추수, 큰 잔치, 왕이 베푸는 축제 등으로 비유되는 나라이다. 이런 표상의 하느님 나라는 바로 예언자들이 하느님 약속으로 희망한 미래의 구원 성취의 때을 가리킨다.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예언자들의 하느님 약속에 대한 신앙을 결정적으로 구체화하고 집약하였다. 하느님이 이미 이 세상의 창조자요 이 세상 모순 뒤에 숨은 주님이기에 또한 이 세상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시리라는 확신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중심과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하느님을 역사의 주인이며 세상의 창조주로 믿고 있었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으례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옛 하느님,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야훼를, 한 분이고 유일한 하느님을 생각하였다. 예수는 이런 유일한 하느님께 온 마음을 바치라는 계명(마태 12,29-31 병행)을 통해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그래서 그는 돈이나 재물(마태 6,19-21.24-34 병행), 권리나 명예(마태 5,38-42 병행), 부모나 가족(루가 14,26 병행), 심지어 자기 자신(루가 17,33 병행)까지도 첫째 자리, 하느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
예수는 역사의 주인이며 세상의 창조자인 유일한 하느님이 철두철미하게 인간의 구원을 원하는 분으로 선포한다. 이는 행복선언과 특히 병자와 마귀들린 이들의 치유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어 나타난다. 예수의 병자 치유와 구마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현재적 표징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은 “인간의 모든 차원들, 즉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포함한 인간 실존 전체를 목표”로 삼는 동시에 허약하고 병들고 늙고 무능하여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은 바로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성서의 첫 쪽에서 끝 쪽까지 하느님의 뜻은 모든 차원에서의 인간의 행복을, 인간의 결정적이고 포괄적인 복락, 성서의 용어로 말하면 인간과 인류의 ‘구원’을 겨냥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돕고, 치유하고, 해방시키고자 하는 구원 의지이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 기쁨, 자유, 평화, 구원, 인간 각자와 인류 전체의 궁극적인 행복을 원하신다.”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168-169.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철저히 실천으로 옮긴다. 그 실천은 부정과 긍정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즉 절대화된 율법 규정과 예식을 비판하고 상대화하며, 말과 행동 안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 그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란 당시의 신심 깊은 이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히 기록된 모세의 율법과 이 율법을 해석하는 전통에 대한 복종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율법의 자구를 하느님의 구원 의지라는 척도로 재었다. 그래서 인간이 무시되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라면 율법도 의문시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예식적인 정결 규정, 단식 규정, 특히 안식일 규정을 자주 뛰어 넘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척도로 삼아서 율법을 상대화하였던 것이다. 율법의 상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 대한 봉사가 율법 준수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위하여 계명이 있는 것이지 계명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마르 2,27). 이는 율법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원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라는 척도에 기준해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율법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성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예수는 인간에 대한 봉사에 우선권을 둠으로써 성전과 이와 관련한 예식 질서 전체를 상대화한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가 요청된다. 즉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마태 5,23-24). “화해와 일상의 삶에서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예배와 제일(祭日)의 준수를 우선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봉사가 하느님께 대한 예배를 대신하지는 않지만,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인간에 대한 봉사 안에서 그 참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 실천을 위해서 율법을 상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율법을 내면화시키기도 하였다. 즉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결의론이나 율법주의를 넘어서 인간의 삶 전체를 포함한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대어주고,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어주며, 천 걸음을 강요하는 이에게 이천 걸음도 함께 가주라(마태 5, 39-41)는 권고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예수는 법적으로 규정된 경계를 정해주지 않고, “사람의 큰 도량을 촉구하고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살인, 간음, 거짓 맹세만이 아니라 분노, 음란한 지향, 불성실한 생각조차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마태 5,21-37)이라고 예수는 규정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마음과 행동이 함께 하는 순종”을, 즉 “통제할 수 있는 외면만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내면 – 인간의 마음”까지도 바치라고 요구한다. 같은 책, 162.

이렇게 예수는 하느님 구원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서 율법과 예배 위주가 아니라 인간 위주로 향하도록 가르치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을 목표로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바빌론 유배 이후 유대 신앙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율법과 성전을 상대화하고, 신성시된 제도와 전통의 대표자들까지도 상대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율법주의와 제식주의(祭式主義)에 대한 비판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추종하는 데에 전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하느님의 뜻을 추종하는 것의 다른 한면을 이룬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