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라)

6.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두고 교회의 학자, 천사적 박사라고 칭한다. 그만큼 교의신학에 영향을 준 학자도 없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 16항세서 “할 수 있는 대로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밝히기 위하여 학생들은 성 토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사변 방법으로 보다 깊이 신비를 통찰하며,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데에 익숙해져야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신학생 양성에 관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교황서한(1963년 11월 4일)에서도 “사제의 주요한 정신적인 부는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의 교도권과 일치되는 성 토마스의 교의와 원칙, 방법에 따라 철학과 신학적인 견고한 양성의 결과인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신론은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리체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까지도 그의 신관에서 몇몇 본질적인 면모를 원용하고 있다.
그의 하느님 이해를 그의 주저인 신학대전에서 찿아 볼 수있다.

신학대전
1부, 문 1에서 문 13: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
문 14에서 문 26: 하느님의 생명 또는 삶과 작용들
문 27에서 문 4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문 44에서 문 49: 창조에 대하여
문 50에서 문 64: 천사들에 대해서

하느님에 관한 고찰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하느님의 위격의 구분에 관하여,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발원되는피조물들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문 1에서 문 13까지다.

부록: 문 1- 13의 요약
제 1 문, 계시된 거룩한 학문
1항. 계시진리가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신 직과에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신에 관한 것이 모든이에게, 즉시로 오류없이,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능력을 초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시가 필요하다.
2항. 이 계시진리 또는 신학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로부터 유래하는 이론체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분명한 학문인 기하학이 그러하듯이 확실한 원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3항. 그리고 그것은 그 다수성 속에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다. 그것은 오직 계시된 것들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4항. 신학은 인간활동들은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 보다는 사변적인 학문이다.
5항. 그 대상이 가장 고상하기에, 따라서 가장 고상한 학문이다.
6항. 신학은 단지 학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혜이다. 가장 고상한 것들에 대한 탐구야 말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7항. 출발점이자 규범인 하느님은 신학의 주제이다.
8항.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서엇의 논술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들를 해결한다.
9항. 인간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지성적 인식을 얻어내기 때문에, 게시를 담고 있는 성서도 ‘은유’를 사용한다.
10항.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지능은 무한하다. 따라서 성서의 귀절들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축자적의미 이외에도, 신앙을 위한 우의적 해석, 행위를 위한 도덕적 해석, 미래의 삶을 위한 초자연적, 상징적 해석이 있다.


제 2문, 하느님의 실존
1항.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체는 그 한 부분보자 크다’는 진술은 참되고 명확하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두가지 용어 ‘전체’와 ‘부부’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지만 ‘하느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있다.
2항. 이 증명은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다시말해 원인을 알려줄 수 있는 ’결과들로부터‘ 출발할 수가 있다.
3항. 증명은 다섯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1)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많은 것들이 운동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 어는 것도 움직여지지 않고서는 운동상태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스스로 가능상태에서 존재 현실로 건너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달구어질 수 있는 차가운 쇠덩이는 스스로 열을 내지 못한다. 누군가가 열을 가해야먄 달구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운동상태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히 원인을 소급해 올라갈 수 없다. 이것은 실제로 설명함 없이 자꾸만 설명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제 1원동자‘(primum moven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는 일련의 능동인(causa efficiens)들의 끝에 있는 결과들을 본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하지 않았어야 하고 실존을 주기 위해서는 실존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명백히 모순이 된다. 2차적 원인들을 추적하며 무한히 소급해 올라가는 것은 제 1 원인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 결과로 제 2 원인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제 2원인들은 ’제 1원인‘없이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형성되고 해체되는 것은 하나의 ’우연유‘이다. 그것은 실존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전에 실존하지 않았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有)는 우연유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안았었고, 지금이라도 만일 실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유‘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실존하지 못할 것이다.
(4) 사물들 속에는 선이 있다. 그러나 선의 원천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더‘와 ’덜‘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선인 자가, 선 자체가 있다.
(5)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은 놀랄만큼 정밀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렇게 형상화한 자가, 즉 ’최고 지성‘이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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