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마)

제 3문 하느님의 단순성
1항.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물체는 움직여져야만 움직이게 되는데, 하느님은 ’부동의 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체는 변화에 매여있는데, 하느님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물체는 영적존재보다 덜 고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가장 고귀하므로 더더욱 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2항. 질료 (materia)로 사물들이 구성된다. 형상은 각 사물에 그 고유한 존재를 규정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은 질료와 형상으로 복합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물체가 아니므로 질료를 지니지 않기때문이다. 둘째로,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상으로부터 그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은 형상때문에 어떤 선이지만, 하느님은 선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것이 그 존재를 형상으로부터 받게되면 운동을 지니게 된다. 즉 형상때문에 움직인다. 그런데 하느님은 운동의 원리다. 따라서 형상을 가진다기 보다 형상 자체이다.
3항.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인간은 인간성(humanitas)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데서 인간성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질료와 형상의 구성체가 아닌 하느님은 ’신성‘(divinitas)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이다.
4항. 하느님에게는 본질과 존재가 동일시된다. 인간의 경우처럼 존재와 본질이 구별되는 경우엔 늘 어떤 원인을 지니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자기자신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존재가 본질을 구분하는 경우 이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구성조건인바. 본래 가능태의 본질은, 준재로부터 분리되게 되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본질상 유이다.
5항. 하느님은 어떤 류(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류란 그 안에 포함되는 것들보다 먼저 개념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지성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또한 어떤 종(species)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이란 류와 종차(differentia specialis), 마치 현실태와 가능태처럼, 하느님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항. 하느님에게는 우유(accidens)들이 없다. 우유들이란 주체를 보충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순수 현실(actus purus)이기때문에 조금도 더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7. 하느님은 가장 단순하다. 첫째로 이미 말한 것처럼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료- 형상으로도, 본질- 존재로도, 류-종으로도, 주체- 우유로도 구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더욱 복합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그렇게 복합된다면 그 구성요소들 보다 후속적이고, 의존적이라는 말이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제일 유(Ens primum)이다. 또 그렇게 복합된다면 하느님에게도 구성요소를 결합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할텐데, 하느님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구성체에 있어서 부분들은 전체에 비해 가능태에 있고, 전체는 부분보다 큰 법인데,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적이기 때문이다.
8항. 그 어떤 것도, 마치 하느님이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거나 또는 사물의 형상 또는 질료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하느님으로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과 한 단일체로 구성된다면, 그때 이미 제일유(第一有)임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고, 가치가 전락되고, 가변적이 되어 구성체보다도 오히려 하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 4문,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1항.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물질이 아니며 조금도 가능태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일 활동원리이며, 모든 완전성의 원리이고 원천이다.
2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면 완전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 완전성을 존재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완전자체이며,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 가장 본래적인 형태로 내속되어 있다.
3항. 사물들은 하느님과 같은 류, 같은 종일 수 없고, 오직 유비적으로 하느님과 유사하다.

제 5문, 선이란 무엇인가
1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을 소유한다. 그런데 이성은 선을 존재로부터 구별한다. 존재와 더불어 ‘원욕될만함’(appetibilitas)을 소유한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2항. 이성을 통해서 먼저 존재성이 오고, 그 다음에 원욕성이 온다.
3항. 존재성은 현실태요, 완전성이므로, 모든 유는 그 사실 자체로 선이다. 다만 지성의 산물인 수학적인 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4항.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그것이므로,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 미(pulchrum)에겐 찬탄을 자아내는 형상이 중요하다. 즉 지성과 관련되고 있다. 선에겐 잡아 끄는 형상이 중요하다.
5항. 어떤 형상의 구성은 다음 경우에 일어난다. 첫째로 함께 비교해서 선행하는 질료적 또는 작용적 원리들이 실현될 때, 둘째로, 종을 구성하는 구성원리들이 한 숫자로 결합될 때, 셋째로 귀결되는 고유활동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비례와 수와 무게에 따라 펼치셨다.
6항. 선을 끌어당기는 한 유쾌한 것이고,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유익하다. 또 목적적인 선인 한에 있어서 합당하다고 불리운다.

제 6문, 하느님은 선이다.
1항. 하느님은 선이다. 모든 이로부터 원욕될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들은 원인에 유사해 지는 경향이 있는데, 하느님이야말로 만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2항. 하느님은 최고선이다. 왜냐하면 제일원인이고 모든 특수한 선들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류일 수 없으므로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다.
3항. 하느님은 본질상 선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본성상 존재를 가지기에 존재의 충만을 지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불변적이므로 더 개선할 수 있는 석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로 최후목적이므로 하느님이 어떤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을 어떤 더 큰 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항. 각 사물은 하느님의 선성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한’ 선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을 자기의 모범적, 작용적, 목적적 원리로 지닌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형상적 선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신적 존재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7문, 하느님은 무한하다.
1항. 하느님은, 형상에 결합되기 때문에 형상으로부터 규정되는 질료가 아니다. 또한 규정되는 질료와 결합됨으로써 반대로 질료로부터 규정되는 형상도 아니다. 하느님은 ‘자립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로서 무한하다.
2항.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유한하다.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의 부분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항.모든 물체는 유한하다. 첫째로 본질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형상은 그것을 종으로 규정짓고, 질료는 그것을 개체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둘째로, 규모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표면을 가지는 데, 그 것은 그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 물체들에 대해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학적 물체는 그것을 생각하는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면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4항. 실제적 숫자는, 단일성에 비교된 다수성이기에, 무한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학적 숫자는 무한할 수 있다.

제 8문,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1항. 작용이 있으면 거기에 존재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것들 속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공기가 태양이 있을 때 빛나게되고, 태양이 비치는 한 빛나는 채로 남아 있듯이, 피조물 모두, 본질적으로 존재인 자의 영향력이 그 속에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지니고 유지된다.
2항.하느님은 모든 장소에거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로써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을 다른 것의 현존을 저지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서는, 그의 현존이 다른 것들을 현존케한다.
3항.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모든 것 속에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모든 것 속에 있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4항.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따라서 어디에나 다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고 부분들을 지니지 않기에 온전히 어디에나 계시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그러실 수 있다.

제 9문, 하느님은 불변하다.
1항 하느님은 제일 존재이며 따라서 실재이고 현실태이다. 현실태에 후발적인 가능태는 제일 존재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느님은 그러므로 오직 현실이며, 순수 현실이다.(3,4참조) 하느님에게 가능태가 없다면,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불변적이다. 또 변화에 있어서는 일부는 남고 일부는 사라지거나 없던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것인데, 하느님에게는 부분도 없고, 어느때 없었던 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불변적이다.
2항.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가멸적이기 때문이다. 영들도 가변적이다. 창조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실존을 그칠수 도 있기 때문이다.

제 10문, 하느님의 영원성
1항.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이라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항. 불변하고 항상적인 하느님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항.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항.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항.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aevum(시대)는 시작은 지니나 끝이 없다. aevum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와짐도 낡아짐도 지니지 않는다. 영원은 어떤 ’먼저‘와 ’나중‘도 지니지 않으며,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제 11문,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1항. 단일성은 구분에 반대된다. 부분이 없는 단순 존재는 언제나 하나다. 부분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는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는 동안까지만 하나다.
2항. 단일성은 다수성과도 반대된다. 단일성은 다수성의 원리이지 척도이기 때문이다.
3항. 만일 소크라테스가 한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차제’즉 유일인간‘이라면, 세상엔 오직 소크라테스 한명만 있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경우다. 하느님은 바로 신적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게다가 하느님은 모든 완전성을 소유한다. 만일 여러 신들이 있었더라면, 그들 간에 하나에겐 있고, 다른 것에겐 없는 어떤 완전성이나 특전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어느 신도 완전 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 어느 것도 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나일 수 밖에 없디. 또한 세상은 그 질서에 있어 단일성을 특성으로 지닌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직 하나의 하느님을 창조주요 지탱자로 지닌다.
4항. 단일성은 불가분의 존재자에게 어울린다.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히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해서 부분을 갖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에게 어울린다.

제 12문: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1항. 모든 존재자가 자기 원리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라면,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도 그 존재의 완전성은 그 존재 원리인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발견될 수 없다. 그런제 본성상 인간은 뚜렷한 지성을 갖추고 있고 하느님은 단순한 유이기 때문에 가지적(intelligibile)이므로, (아니 최고 존재이고 최대로 단순하므로 최고로 가지적이다.) 인간은 그 지성을 신에 고정시킬 때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경우처럼 이에 완전한 이들은 분명히 하느님을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는가?
2항 인식이 가능하려면 주체에게 인식 기능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그 상을 통해 주체에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하느님의 경우, 지성 기능의 원리이자 지성적 ‘봄’(視)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의 무한 존재성 때문에 어떤 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지성이 하느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유사해질’ 필요가있다. 즉, 영광의 빛이 필요하다.
3항. 눈이나 환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눈과 환상은 물직적이고, 하느님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4항. 자연적인식에 있어서 사물들은 인식주체의 본성에 유사하게 인식된다. 즉 인간은 물질 속에 개별화되어 있는 본성들을 인식한다. 추상기능을 통해 그것들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비물질적 본성들을 지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자립 유’이기 때문에 천사들의 포착능력도 벗어난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자연적 인식으로써 하느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다.
5항. 피조된 지성이 하느님 본성을 인식하려면 인식능력이 증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광의 빛’은 우리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 준다.
6항. 하느님은 이 ‘영광의 빛’을 각 사람의 사랑에 비례하는 보상으로서 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남보다 이 빛을 더 가질 수 있다.
7항. 하느님은 완전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무한자이신 하느님은 무한히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빛을 받아야 하는 피조된 지성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해 될수 없는 채로 남는다.
8항. 따라서 피안의 세계에서는 비록 사물들이 하느님 안에서 보이긴 하겠지만, 피조된 지성으로서는 하느님 안세서 모든 것을 즉, 하느님이 행하고 있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는 없다.
9항. 신적본질 속에서 보이게 되는 사물들은 그 본성 속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 상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10항. 그리고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한 눈길 속에 제시되어 보이게 된다. (영광의 빛과 비례해서 그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11항. 차안의 세계에서 우리는 물질적 육체속에 영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고 또 우리의 인식도 이것에 알맞게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피조물을 통해서 인식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 본직을 직관하는 것이 결토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12항. 그러나 우리느 물질 사물들을 통해서 이 사물들은 하느님이 그 원인인 결과들이고 거기에는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있다는 것 또 거기에 여러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항.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정신력과 사물의 비물질적 유사상들이 함께 작용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의 경우에 일어나듯이 어는 한가지를 더 강화하고 또 다른 것들을 주입해 줄 수 있다. 이렇게해서 은총을 통해서 신적인 일들에 대한 아주 높은 경지의 인식을 지닐 수 있다.

제 13문: 하느님의 이름들
1항. 말(vox)은 관념들의 기호들이고, 관념들은 사물의 유사상(similitudo)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느님에게 우리 피조물로부터 추출된 이름들을 붙인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설명해 내지 못한다.
2항. 하느님의 상대적인 이름들 (예컨대 ‘창조주’)와 부정적인 이름들(예컨대 ‘무한자’)은 하느님에 대해 어떤 관계나 결함의 제거를 지시하지 못하며. 그 실체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이름들 (예컨대 ‘선한자’)은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선이라고 칭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선재한다는 식으로 그 실체를 지시한다.
3항. 따라서 적극적인 이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에게 해당된다. – 피조물 고유의 존재방식들의 내용만 뺀다면 말이다.
4항.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이 비록 하나의 단순실재를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이 실재는 피보물들의 다양한 완전성들과 우리 정신의 여러 개념들에 두루 일치하기 때문이다.
5항. 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이기 때문에 이이름들은 인간에게서와 하느님에게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 하느님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의적도 다의적도 아니고, 오직 유비적이다.
6항. 하느님은 피조된 질서 위에 군림한다. 피조물이 하느님에게로 질서 지워져 있지, 하느님이 피조물에 질서 지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역전될 수 없다. 또 이런 의미에서 ‘창조주’와 같은 상대적 이름들은 피조물로부터 영원한 신에게로 적용시킬 수 있다.
7항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알아듣는다. 따라서 ‘하느님’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작품’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지워져 있다.
8항.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피보물에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이란 이름도 알려질 수 없다. 더더욱 하느님의 참 이름은 알려질 수 없다.
9항. 하느님의 고유한 참 이름은 ‘야훼’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그 존재(esse)를 지시하며 그래서 그 존재가 그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가장 가능한 것 즉 무한인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존재(esse)라는 동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배제되고 하느님의 고유 특성인 「현재의」 영원성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는 간단하게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치밀하다. 어떻든 그의 근본적인 하느님 이해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이 동일시되고 있다. 하느님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to be)이다.
둘째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존재에로 질서 지워져 참여하게 되어 있는 바, 하느님은 이 모든 조물의 첫번째 원인이다.
우선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신학대전 I, q.3, a.4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하느님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같은가?

반대이론: 하느님안에서 본질(essentia)과 존재(esse)는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대이론의 근거
1. 본질과 존재가 같다면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첨가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첨가도 할 수 없는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해 서술 될 수 있는 공통적 존재(esse commune)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에 서술될 수 있는 공통적 존재 일 것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그런데 이것은 ‘공통될 수 없는 이름을 그들은 나무와 돌에 부가하였다’(지혜서 14,21)라는 지혜서의 말대로 허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존재는 그의 본질이 아니다.
2. 그 밖에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앞에서 벌써 제시된 바다. 그러므로 하느님의존재와 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하는 본성,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힐라리오 교부의 다음과 같은 이론이 있다.
“하느님 안에 있어서 존재는 우유(accidens)가 아니고 자립하는 진리(subsistens veritas)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자립하는 것이 그 존재이다.

이 반대 이론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 하느님은 그 본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존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본질 밖에 있는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원인을 지니는 것이어야 하는 데, 종을 따르는 고유한 것들(예컨대 웃는 것은 인간을 따르며, 종의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닌다)과 같이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니거나 혹은 물의 열이 불에서 원인을 지니는 것처럼 어떤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존재 자체가 그 사물의 본질과 다른 것이라면 그 사물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다른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을 지니거나 아니면 그 사물의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존재가 다만 그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떠한 사물도 그것이 원인된 존재를 갖는 한, 자기에게 자기 존재의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그 본질과 다른 사물은 그 사물과 다릍 것에서 원인을 지녀야 한다. 이런 것을 하느님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제일 능동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둘째로, 존재는 모든 형상과 본성의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성 또는 인간성은 우리가 그런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한지 않는 한 현실태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는 현실태가 가능태에 비교되는 것처럼 존재와는 다른 본질과 비교되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제시된 바와같이 하느님 안에는 아무것도 가능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의 본질은 그의 존재이다.
셋째로, 예컨대 불을 갖고 있지만 불이 아닌 것은 분유에 의해 불을 받은 것인 것과같이 존재를 갖고는 있지만 존재가 아닌 것은 분유에 의한 유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하느님은 자기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만일 자기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분유에 의한 유일 것이며, 본질에 의한 유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제 1유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조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기 존재이며 자기 본질만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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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마)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3문 하느님의 단순성
    1항.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물체는 움직여져야만 움직이게 되는데, 하느님은 ’부동의 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체는 변화에 매여있는데, 하느님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물체는 영적존재보다 덜 고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가장 고귀하므로 더더욱 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2항. 질료 (materia)로 사물들이 구성된다. 형상은 각 사물에 그 고유한 존재를 규정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은 질료와 형상으로 복합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물체가 아니므로 질료를 지니지 않기때문이다. 둘째로,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상으로부터 그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은 형상때문에 어떤 선이지만, 하느님은 선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것이 그 존재를 형상으로부터 받게되면 운동을 지니게 된다. 즉 형상때문에 움직인다. 그런데 하느님은 운동의 원리다. 따라서 형상을 가진다기 보다 형상 자체이다.
    3항.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인간은 인간성(humanitas)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데서 인간성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질료와 형상의 구성체가 아닌 하느님은 ’신성‘(divinitas)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이다.
    4항. 하느님에게는 본질과 존재가 동일시된다. 인간의 경우처럼 존재와 본질이 구별되는 경우엔 늘 어떤 원인을 지니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자기자신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존재가 본질을 구분하는 경우 이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구성조건인바. 본래 가능태의 본질은, 준재로부터 분리되게 되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본질상 유이다.
    5항. 하느님은 어떤 류(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류란 그 안에 포함되는 것들보다 먼저 개념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지성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또한 어떤 종(species)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이란 류와 종차(differentia specialis), 마치 현실태와 가능태처럼, 하느님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항. 하느님에게는 우유(accidens)들이 없다. 우유들이란 주체를 보충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순수 현실(actus purus)이기때문에 조금도 더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7. 하느님은 가장 단순하다. 첫째로 이미 말한 것처럼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료- 형상으로도, 본질- 존재로도, 류-종으로도, 주체- 우유로도 구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더욱 복합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그렇게 복합된다면 그 구성요소들 보다 후속적이고, 의존적이라는 말이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제일 유(Ens primum)이다. 또 그렇게 복합된다면 하느님에게도 구성요소를 결합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할텐데, 하느님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구성체에 있어서 부분들은 전체에 비해 가능태에 있고, 전체는 부분보다 큰 법인데,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적이기 때문이다.
    8항. 그 어떤 것도, 마치 하느님이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거나 또는 사물의 형상 또는 질료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하느님으로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과 한 단일체로 구성된다면, 그때 이미 제일유(第一有)임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고, 가치가 전락되고, 가변적이 되어 구성체보다도 오히려 하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 4문,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1항.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물질이 아니며 조금도 가능태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일 활동원리이며, 모든 완전성의 원리이고 원천이다.
    2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면 완전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 완전성을 존재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완전자체이며,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 가장 본래적인 형태로 내속되어 있다.
    3항. 사물들은 하느님과 같은 류, 같은 종일 수 없고, 오직 유비적으로 하느님과 유사하다.

    제 5문, 선이란 무엇인가
    1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을 소유한다. 그런데 이성은 선을 존재로부터 구별한다. 존재와 더불어 ‘원욕될만함’(appetibilitas)을 소유한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2항. 이성을 통해서 먼저 존재성이 오고, 그 다음에 원욕성이 온다.
    3항. 존재성은 현실태요, 완전성이므로, 모든 유는 그 사실 자체로 선이다. 다만 지성의 산물인 수학적인 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4항.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그것이므로,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 미(pulchrum)에겐 찬탄을 자아내는 형상이 중요하다. 즉 지성과 관련되고 있다. 선에겐 잡아 끄는 형상이 중요하다.
    5항. 어떤 형상의 구성은 다음 경우에 일어난다. 첫째로 함께 비교해서 선행하는 질료적 또는 작용적 원리들이 실현될 때, 둘째로, 종을 구성하는 구성원리들이 한 숫자로 결합될 때, 셋째로 귀결되는 고유활동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비례와 수와 무게에 따라 펼치셨다.
    6항. 선을 끌어당기는 한 유쾌한 것이고,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유익하다. 또 목적적인 선인 한에 있어서 합당하다고 불리운다.

    제 6문, 하느님은 선이다.
    1항. 하느님은 선이다. 모든 이로부터 원욕될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들은 원인에 유사해 지는 경향이 있는데, 하느님이야말로 만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2항. 하느님은 최고선이다. 왜냐하면 제일원인이고 모든 특수한 선들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류일 수 없으므로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다.
    3항. 하느님은 본질상 선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본성상 존재를 가지기에 존재의 충만을 지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불변적이므로 더 개선할 수 있는 석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로 최후목적이므로 하느님이 어떤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을 어떤 더 큰 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항. 각 사물은 하느님의 선성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한’ 선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을 자기의 모범적, 작용적, 목적적 원리로 지닌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형상적 선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신적 존재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7문, 하느님은 무한하다.
    1항. 하느님은, 형상에 결합되기 때문에 형상으로부터 규정되는 질료가 아니다. 또한 규정되는 질료와 결합됨으로써 반대로 질료로부터 규정되는 형상도 아니다. 하느님은 ‘자립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로서 무한하다.
    2항.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유한하다.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의 부분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항.모든 물체는 유한하다. 첫째로 본질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형상은 그것을 종으로 규정짓고, 질료는 그것을 개체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둘째로, 규모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표면을 가지는 데, 그 것은 그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 물체들에 대해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학적 물체는 그것을 생각하는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면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4항. 실제적 숫자는, 단일성에 비교된 다수성이기에, 무한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학적 숫자는 무한할 수 있다.

    제 8문,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1항. 작용이 있으면 거기에 존재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것들 속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공기가 태양이 있을 때 빛나게되고, 태양이 비치는 한 빛나는 채로 남아 있듯이, 피조물 모두, 본질적으로 존재인 자의 영향력이 그 속에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지니고 유지된다.
    2항.하느님은 모든 장소에거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로써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을 다른 것의 현존을 저지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서는, 그의 현존이 다른 것들을 현존케한다.
    3항.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모든 것 속에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모든 것 속에 있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4항.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따라서 어디에나 다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고 부분들을 지니지 않기에 온전히 어디에나 계시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그러실 수 있다.

    제 9문, 하느님은 불변하다.
    1항 하느님은 제일 존재이며 따라서 실재이고 현실태이다. 현실태에 후발적인 가능태는 제일 존재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느님은 그러므로 오직 현실이며, 순수 현실이다.(3,4참조) 하느님에게 가능태가 없다면,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불변적이다. 또 변화에 있어서는 일부는 남고 일부는 사라지거나 없던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것인데, 하느님에게는 부분도 없고, 어느때 없었던 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불변적이다.
    2항.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가멸적이기 때문이다. 영들도 가변적이다. 창조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실존을 그칠수 도 있기 때문이다.

    제 10문, 하느님의 영원성
    1항.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이라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항. 불변하고 항상적인 하느님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항.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항.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항.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aevum(시대)는 시작은 지니나 끝이 없다. aevum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와짐도 낡아짐도 지니지 않는다. 영원은 어떤 ’먼저‘와 ’나중‘도 지니지 않으며,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제 11문,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1항. 단일성은 구분에 반대된다. 부분이 없는 단순 존재는 언제나 하나다. 부분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는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는 동안까지만 하나다.
    2항. 단일성은 다수성과도 반대된다. 단일성은 다수성의 원리이지 척도이기 때문이다.
    3항. 만일 소크라테스가 한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차제’즉 유일인간‘이라면, 세상엔 오직 소크라테스 한명만 있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경우다. 하느님은 바로 신적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게다가 하느님은 모든 완전성을 소유한다. 만일 여러 신들이 있었더라면, 그들 간에 하나에겐 있고, 다른 것에겐 없는 어떤 완전성이나 특전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어느 신도 완전 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 어느 것도 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나일 수 밖에 없디. 또한 세상은 그 질서에 있어 단일성을 특성으로 지닌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직 하나의 하느님을 창조주요 지탱자로 지닌다.
    4항. 단일성은 불가분의 존재자에게 어울린다.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히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해서 부분을 갖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에게 어울린다.

    제 12문: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1항. 모든 존재자가 자기 원리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라면,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도 그 존재의 완전성은 그 존재 원리인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발견될 수 없다. 그런제 본성상 인간은 뚜렷한 지성을 갖추고 있고 하느님은 단순한 유이기 때문에 가지적(intelligibile)이므로, (아니 최고 존재이고 최대로 단순하므로 최고로 가지적이다.) 인간은 그 지성을 신에 고정시킬 때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경우처럼 이에 완전한 이들은 분명히 하느님을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는가?
    2항 인식이 가능하려면 주체에게 인식 기능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그 상을 통해 주체에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하느님의 경우, 지성 기능의 원리이자 지성적 ‘봄’(視)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의 무한 존재성 때문에 어떤 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지성이 하느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유사해질’ 필요가있다. 즉, 영광의 빛이 필요하다.
    3항. 눈이나 환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눈과 환상은 물직적이고, 하느님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4항. 자연적인식에 있어서 사물들은 인식주체의 본성에 유사하게 인식된다. 즉 인간은 물질 속에 개별화되어 있는 본성들을 인식한다. 추상기능을 통해 그것들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비물질적 본성들을 지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자립 유’이기 때문에 천사들의 포착능력도 벗어난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자연적 인식으로써 하느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다.
    5항. 피조된 지성이 하느님 본성을 인식하려면 인식능력이 증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광의 빛’은 우리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 준다.
    6항. 하느님은 이 ‘영광의 빛’을 각 사람의 사랑에 비례하는 보상으로서 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남보다 이 빛을 더 가질 수 있다.
    7항. 하느님은 완전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무한자이신 하느님은 무한히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빛을 받아야 하는 피조된 지성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해 될수 없는 채로 남는다.
    8항. 따라서 피안의 세계에서는 비록 사물들이 하느님 안에서 보이긴 하겠지만, 피조된 지성으로서는 하느님 안세서 모든 것을 즉, 하느님이 행하고 있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는 없다.
    9항. 신적본질 속에서 보이게 되는 사물들은 그 본성 속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 상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10항. 그리고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한 눈길 속에 제시되어 보이게 된다. (영광의 빛과 비례해서 그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11항. 차안의 세계에서 우리는 물질적 육체속에 영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고 또 우리의 인식도 이것에 알맞게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피조물을 통해서 인식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 본직을 직관하는 것이 결토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12항. 그러나 우리느 물질 사물들을 통해서 이 사물들은 하느님이 그 원인인 결과들이고 거기에는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있다는 것 또 거기에 여러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항.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정신력과 사물의 비물질적 유사상들이 함께 작용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의 경우에 일어나듯이 어는 한가지를 더 강화하고 또 다른 것들을 주입해 줄 수 있다. 이렇게해서 은총을 통해서 신적인 일들에 대한 아주 높은 경지의 인식을 지닐 수 있다.

    제 13문: 하느님의 이름들
    1항. 말(vox)은 관념들의 기호들이고, 관념들은 사물의 유사상(similitudo)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느님에게 우리 피조물로부터 추출된 이름들을 붙인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설명해 내지 못한다.
    2항. 하느님의 상대적인 이름들 (예컨대 ‘창조주’)와 부정적인 이름들(예컨대 ‘무한자’)은 하느님에 대해 어떤 관계나 결함의 제거를 지시하지 못하며. 그 실체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이름들 (예컨대 ‘선한자’)은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선이라고 칭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선재한다는 식으로 그 실체를 지시한다.
    3항. 따라서 적극적인 이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에게 해당된다. – 피조물 고유의 존재방식들의 내용만 뺀다면 말이다.
    4항.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이 비록 하나의 단순실재를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이 실재는 피보물들의 다양한 완전성들과 우리 정신의 여러 개념들에 두루 일치하기 때문이다.
    5항. 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이기 때문에 이이름들은 인간에게서와 하느님에게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 하느님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의적도 다의적도 아니고, 오직 유비적이다.
    6항. 하느님은 피조된 질서 위에 군림한다. 피조물이 하느님에게로 질서 지워져 있지, 하느님이 피조물에 질서 지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역전될 수 없다. 또 이런 의미에서 ‘창조주’와 같은 상대적 이름들은 피조물로부터 영원한 신에게로 적용시킬 수 있다.
    7항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알아듣는다. 따라서 ‘하느님’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작품’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지워져 있다.
    8항.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피보물에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이란 이름도 알려질 수 없다. 더더욱 하느님의 참 이름은 알려질 수 없다.
    9항. 하느님의 고유한 참 이름은 ‘야훼’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그 존재(esse)를 지시하며 그래서 그 존재가 그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가장 가능한 것 즉 무한인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존재(esse)라는 동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배제되고 하느님의 고유 특성인 「현재의」 영원성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는 간단하게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치밀하다. 어떻든 그의 근본적인 하느님 이해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이 동일시되고 있다. 하느님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to be)이다.
    둘째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존재에로 질서 지워져 참여하게 되어 있는 바, 하느님은 이 모든 조물의 첫번째 원인이다.
    우선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신학대전 I, q.3, a.4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하느님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같은가?

    반대이론: 하느님안에서 본질(essentia)과 존재(esse)는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대이론의 근거
    1. 본질과 존재가 같다면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첨가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첨가도 할 수 없는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해 서술 될 수 있는 공통적 존재(esse commune)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에 서술될 수 있는 공통적 존재 일 것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그런데 이것은 ‘공통될 수 없는 이름을 그들은 나무와 돌에 부가하였다’(지혜서 14,21)라는 지혜서의 말대로 허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존재는 그의 본질이 아니다.
    2. 그 밖에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앞에서 벌써 제시된 바다. 그러므로 하느님의존재와 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하는 본성,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힐라리오 교부의 다음과 같은 이론이 있다.
    “하느님 안에 있어서 존재는 우유(accidens)가 아니고 자립하는 진리(subsistens veritas)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자립하는 것이 그 존재이다.

    이 반대 이론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 하느님은 그 본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존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본질 밖에 있는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원인을 지니는 것이어야 하는 데, 종을 따르는 고유한 것들(예컨대 웃는 것은 인간을 따르며, 종의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닌다)과 같이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니거나 혹은 물의 열이 불에서 원인을 지니는 것처럼 어떤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존재 자체가 그 사물의 본질과 다른 것이라면 그 사물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다른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을 지니거나 아니면 그 사물의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존재가 다만 그 본질적 원리에서 원인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떠한 사물도 그것이 원인된 존재를 갖는 한, 자기에게 자기 존재의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그 본질과 다른 사물은 그 사물과 다릍 것에서 원인을 지녀야 한다. 이런 것을 하느님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제일 능동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둘째로, 존재는 모든 형상과 본성의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성 또는 인간성은 우리가 그런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한지 않는 한 현실태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는 현실태가 가능태에 비교되는 것처럼 존재와는 다른 본질과 비교되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제시된 바와같이 하느님 안에는 아무것도 가능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의 본질은 그의 존재이다.
    셋째로, 예컨대 불을 갖고 있지만 불이 아닌 것은 분유에 의해 불을 받은 것인 것과같이 존재를 갖고는 있지만 존재가 아닌 것은 분유에 의한 유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하느님은 자기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만일 자기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분유에 의한 유일 것이며, 본질에 의한 유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제 1유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조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기 존재이며 자기 본질만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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