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육화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이미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서 계시한 바를 살펴보았다. 또 예수의 가르침에서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에서, 예수의 행동안에서, 구체화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았다. 이제는 예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을 보고자 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고백된다.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주권이 인간화되었다. 한 인간 예수가 새로운 주님(Κυριοσ)이시라고 고백된다. 다시말해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 주님으로 이시라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로마 1,3-4):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천지가 창조 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요한 1,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때가 왔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이세상에 파견되신 분이시다.:“때가 찼을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읍니다”(갈라 4,4-5),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읍니다.”(요한 3,2), “한편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요한 13,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권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셨고, 하느님께서도 언제나 그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한다.:”하느님께서야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읍니까?“(요한 3,2).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지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입니다“.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깃들어 있다고 한다(골로 2,9).:”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단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에 대한 소식을 신빙성있게 전해 줄 수 있으시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서로 하나이시기 때문에 (요한 10,30; 14,10; 17,11.21) 아들을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 된다(요한 12,45): “나를 믿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 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요한 14,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참된 계시자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말씀과 행동에 있어서도,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시며,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들으신 것이며(요한 14,10), 행하신 일들도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일들이다(요한 9,4). 따라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요한 17,4),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는 세상의 빛이요(요한 8,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한 14,6). 또한 생명의 빵(요한 6,35)이요, 생명의 물(요한 4,10)이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요한 14,6).
이처럼 성서는 예수가 하느님이심을 증언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명칭자체가 그러하듯이 다른 종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유대인들, 또는 마호멧교도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요셉 랏씽어 추기경이 언급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의 하느님이 일차적인 곤혹이라고 언급한 바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보다 몇배 더 어려운 것은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함께 삶을 나누었던 한 인간이 하느님이였다는 것을 믿는 것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하느님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의 문제 이며, 삼위일체 신신앙의 핵심문제가 된다.
4.4. 부활 체험 이후의 하느님 이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 또 다른 하느님을 체험하였다. 이른 바 성령체험이다. 그 것을 사도행전 2장이 잘 말해 준다.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이 성령으로 충만돼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즉, 그들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서 자기
들과 함께 계시고 함께 일하시며 아직 어린 교회의 모든 활동을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을 매일 같이 체험 했던 것이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힘을 주시고(사도 1,8),
사도들과 그 밖의 신도들에게 말씀하시고 (사도 10,19; 8,29),
또한 사도들에게 여러가지 말을 하게 하셨다(사도 2,4),
성령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언하시고(사도 5,32),
선교사들을 보내시고(사도 13,4).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지방에 가는 것, 또 어떤 지방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하셨다(사도 16,6-7).
성령은 사도들이나 그 밖의 “형제”와 함께 중대한 문제에 결단을 내리셨다(사도 15,28).
성령은 하느님의 교회를 보살피기 위하여 주교를 세우셨다(사도 20,28).
만일 누가 성령으로 가득찬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향해서, 곧 하느님을 향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사도 5,3-4).
무엇보다도 이러한 성령의 실재는 여러가지 은사로 나타난다.우선 어떤 은사(성령의 선물)들을 논하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삼위 일체적 정식을 대하게 된다. 예건태 코린토 전서 1,12,4-6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심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가지지만 모든 사람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한분이신 성령(πνευμα), 한분이신 주님(κυριοσ), 한분이신 하느님(θεοσ)이 여기에서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인간 예수가 아버지로 불리는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 아니었던 것처럼, 성령 역시도 예수와 동일하지 않은 어떤 분으로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체험을 하느님의 존재 양식으로 체험하였다. 예수 부활 이후 제자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 는 예수에 의해 이루어졌던 사랑, 즉 용서와 배려 등의 어떤 선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체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의 소유였던 재산을 분배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고, 받은 은사로 다른 이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한편 아버지로 불리는 하느님과 또 예수와 다른 실재로서 성령을 체험하면서도 하느님과 예수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실재로 체험하였다. 이러한 성령체험(은사)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파국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여전히 선물로 주어지는 선에 의한 실존이다. 인간 스스로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선물로서 현존한다. 바꿔 말하면, 성령은 ‘첫 선물’(로마 8,23), ‘보증’(코린 후 1,22; 5,5)이다. 자유 평화, 기쁨, 영광, 사랑 등등은 충만한 생명의 체험으로서 오로지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이 체험을 나타내는 다른 단어들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선물‘로서의 성령을 ’하느님의 성령‘, 또는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말한다(고린 전 2,11.14: 3,16;6,11; 로마 6,9.14). 이 두가지 용어 “하느님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성령’은 서로 교환될 수있는 용어로 간주하면서, 현양된 그리스도와 성령의 활동을 똑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성령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갈라 2,17; 코린 전 6,11)
거룩하게 하시고 (코린 전 1,2; 로마 15,16),
우리에게 확인의 표를 찍어 주시고(에페 1,13; 4,30)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에페 3,17; 코린 전 3,16).
그리스도께서 교회안에 직책을 나누어 주시듯이 성령도 원하시는 대로 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 (코린 전 12,4-1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의 활동을 ‘성령’의 활동으로서 자기 안에 경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에 의하면, 성령에게 고유한 활동도 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로마 5,5)
우리는 성령으로 씌여진 소개장이다(코린 후 3,3)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의 깊은 경륜을 헤아려 그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코린 전 2,10)
성령은 우리을 도와 주시고,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로마 8,26-27).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 해 주신다(로마 8,16).
이렇게 신약의 성령체험은 하느님 체험을 삼위일체와 연관 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서적인 용어가 아니라 교의 신학적인 용어다. 교의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신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세위로 구분되고, 이 세위는 각각 하느님이시며, 같은 흠숭과 같은 찬양을 받으신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위는 셋이시지만, 하느님은 다만 한 분이시라는 신비를 가리켜 삼위일체라 한다. 이러한 교의적인 정식은 콘스탄티노플(381), 칼체돈(451) 공의회에서 비로소 선언 되는 것이지만, 이미 성서에 삼위일체 정식이 나올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바오로에게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셩령 세위를 잇달아 내세우면서 구원사업에서 각기 특별한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지적하는 귀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감추어진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헤를 깨닫지 못했읍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다면 영광의 ‘주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읍니다“(코린 전 2,7-16).
“주님(그리스도)와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신 성전입니다”.(코린 전 6,17-20).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 것들 주시는 ‘성령’은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한 ‘하느님’이십니다“(코린 전 12,4-6).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사명을 맡겨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확인해 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읍니다“(코린 후 1,21-2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코린 후 13,13).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읍니다. …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읍니다“ (갈라 4,4-6).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읍니다. …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읍니다“ (로마 5,1-5).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의 아닙니다. …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 입니다“(로마 8,9.14).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전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로마 14,17-18).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로마 15,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전하신 것입니다. ..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읍니다“(에페 1,3-13).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해 주십시요“(로마 15,3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로운 아버지께서 지혜와 통찰력의 ‘영’을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17).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 ‘성령’안에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에체 2,22).
”지금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심오한 계획을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여 주셨지만 전에는 지금처럼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읍니다.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기뿐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한몸의 지체가 되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받고 내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읍니다”(에페 3,5-7).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시는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여러분을 내적으로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4-17).
“우리 주 예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겨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읍니다” (티토 3,4-7).
사실 우리는 바오로에게서 가장 오래된 신약의 삼위일체 정식을 대하게 되는 것을 그리 놀랄 일이 못된다.
한 성령(πνευμα). 한분이신 성령, 그러나 그분의 은사는 여러가지이며 서로 다르다.
한분이신 주님(κυριοσ), 그렇지만 인간적 봉사의 방법들은 서로 다르다.
한분이신 하느님(θεοσ),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을 우리가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이처럼 일치를 이루시는 서로 다른 하느님의 존재 양식이 다양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체험으로 인식된다.
이와같은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양식은 사도 바울로만이 아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이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을 보았다(마태 3,13).
예수가 자신을 성령의 내림으로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이사이야 61장을 상기시키면서 선포하는 장며이다 (루까 4,1; 4,14-19; 10,21).
예수 잉태에 관한 천사의 말씀 속에서도, 마리아의 예수 잉태는 “성령’ 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에 의한 것임을 볼 수있다(루까 1,35)
예수의 활동의 핵심이 었던 악마 추방에 관한 귀절에서 마귀를 쫓아 내는 ‘하느님의 성령’, 또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언급되고 있다(마태 12,28: 루까?)
무엇보다도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마태 12,34-42)는 엄격한 선언도 있다.
특히 루까는 예수의 부활 후 사도들이 성령, 곧 위로부터의힘으 ㄹ얻으리라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사실들 기록하고 있다(루까 24,49).
이러한 성령은 예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별도로 작용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귀절도 발견된다(12년동안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는 장면).
한편 요한에게서는 더욱 세련된 성령에 관한 기술들을 보게된다.요한이야 말로 성령이 누구신가 하는 물음에 가장 명백한 대답을 하고 있다. 요한은 먼저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밀접한 일치의 유대를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신도 영적인 분이라고 했다(4,24)
성령은 예수에 관해서 증언하고,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상기시키고, 예수를 현양하고, 또 예수의 것을 받아 사도들에게 알린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이 모두 예수의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6 -17,26; 15,26; 16,7-15).
성령의 활동과 예수의 활동은 흡사하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지고, 파견된다(14,16.26).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사람들한테 오신다(15,26).예수(14,28)>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14,26). 예수 (14,9)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사신다(14,17). 예수 (14,26).
성령은 제자들 안에 계신다(14,17). 예수 (14,20).
성령은 스스로 들은 것을 알려주신다(16,13). 예수(8,26).
예수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7,4), 성령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16,14).
부활하신 예수는 숨을 내 부시며 당신 입김으로서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셨다(20,22).
한편 성부와 성령, 예수와 성령의 구별도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친히 파견하시고, 자신도 아버지 곁에서 파견하는 성령을 다른 ‘다른 협조자’라고 부르신다(14,16.26). 또한 ‘영’(πνευμα )이란 희랍어는 중성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성령을 남성대명사 그분(εκεινοσ)으로 나타낸다(14,26; 15,26; 16,14). 이 성령은 듣고, 증언하고, 사람들에게 와서 가르치고 상기시킨다. 즉, 정신적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이 하시는 역할의 의미가 분명하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계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파견된다. 성령은 와서 사람들을 하느님의 마음에 맞갖은 자 되게 하시고, 그 들이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믿고,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게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청원을 들어주시고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새롭게 ‘낳으시고’ 그들을 ‘영적인 사람’, 즉 위로부터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케하시는 것이다(요한 1서 4,13; 요한 3,5-6).
이러한 성령의 체험과 더불어 완벽한 삼위일체 정식이 드러나는 공관복음의 귀절은 마테오 28,19에 나타나는 세례정식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이와같은 표현은 세례 때, 이름을 부른 그 하느님께 영세자를 바쳐 결합시킨다는 뜻이다(코전 1,12-15참조). 즉 영세자는 세례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바쳐지고 그분들과 굳게 결합되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사람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다(골로 1,13), 세례 떼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부활하며(로마 6,3-6; 골로 1,12),) 또 성령을 받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 주 예수와 ‘오직 하나의 영’이 된다(마태 3,11; 요한 3,5; 티토 3,3-7; 사도 2,38; 19,27; 코전 6,11; 12,13). 따라서 세례 때 영세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활동으로 세 위와 친교(communio)를 맺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언급되고 ‘와’라는 접속사로써 연결되고, 각 이름 앞에 희랍의 정관사 του를 되풀이 하고 있는데 :Βαπτιζοντεσ αυτουσ εισ το ονομα του πατροσ και του υιου και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σ.. 이것은 다음 세가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똑같이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아들도 성령도 하느님이 아니라면 아버지와 동격으로 언급죌 수는 없으며 또한 세례를 받는 사람이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에게도 바쳐진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뻬르소나’즉, 위격이시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의 자기봉헌을 받아들이는 상대가 의식을 갖고 있는 위격 즉, 주체가 아니라면 그 봉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구별된다’. 왜냐하면 세 위의 이름 앞에 정관사가 각각 되풀이하여 붙여지고 있는 것은 서로 구별되는 세 위의 주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성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고, 또한 하느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가 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령은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거룩한 영이라고 말한다. 사실 아버지도 거룩하신 분이요, 그리스도도 거룩하며 영이시라고 말하고 있다(요한 4,24; 코린 후 3,17; 이사 12,6; 루까 1,35).(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에배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한다. 거룩한 그 아기. 너희가 기릴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다)
성령은 자신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 그것은 아버지의 말씀이기도 하다 -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람들이 지니게 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을 자기한테 잡아 당기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사랑의 불로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고 또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상과 같지만 그의미가 무엇인가는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그리고 교부들은 어떻게 진행시켰는지는 나중에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상세히 언급되리라본다.
4. 신약의 하느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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