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종교개혁자들의 하느님 이해
마틴 루터에게 난해했던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아니라, 구원경륜의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었다. 루터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분,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은총의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신적인 은총과 더불어 우리에게 자유로운 협력을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카톨릭의 원칙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터는 우리가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은 로마서 9,18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하였다. 로마서 8장을 해설하면서 루터는 “하느님은 인간의 파멸에서 당신의 능력을 웅장하게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 역시 참 하느님은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에제 33,11)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한다.루터는 시편 51편에 대한 강의에서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다윗에게 용서를 베푸셨던 그 하느님으로서,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 기꺼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다.”라고 말한다. 「의지의 굴레」에서 루터는 “하느님의 예지와 전지전능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응답을 위해 어떤 여지도 남겨놓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의지와 마음에 접근하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있다면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로마서 8,31을 인용하고 있다.(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읍니까?)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서 믿음만으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라는 기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은총과 맞서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의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런 주장을 내세운 것은 그의 생활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Eisleben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Tours의 St. Martinus축일에 세례를 받으면서 마틴 루터가 되었다. 아버지 Hans Luther는 광부출신으로 엄격하게 자녀를 교육하였고, 엄한 교육하에 루터는 부친의 마음을 만족시키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 하는 애증의 감정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 많은 아버지는 루터가 출세하기를 희망하여 6세때 라틴어학교를 보냈다. 수도원 학교에 다니면서 신심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대학을 들어갈 때, 아버지는 법관이 되기를 희망하였던 까닭으로 법과대학에 등록하였지만, 두달 후 집에서 대학으로 가는 도중에 천둥 번개를 만나, 놀란 루터는 ”성녀 안나여 저를 도와 주세요. 그러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읍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런 사건이 있은지 두주 후에 성 아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자가 되었지만 루터는 남달리 죄의식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이 고백하듯이 수도자로서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완벽하게 생활하였고,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고 고행을 실천하는 수도자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한 양심속에서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절감하였고, 자신이 만족하게 속죄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죄를 자세히 적고 세심하게 고백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평화도 잠시뿐 지속적이지 못했다. 루터는 특히 시편에 대해 애착을 가졌는데 그는 시편에서 ‘자비의 하느님’보다는 ‘두려움의 하느님’을 인식하였다. 그가 신부가 되어 미사를 드릴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귀절을 자주 빠트렸다. 훗날 루터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판관, 즉 과오를 범한 인간을 벌하는 위대한 신으로 묘사하였다. 즉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라기보다 무서운 신이였다.
다음과 같은 고백이 그의 최대 관심사가 구원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내가 수도자로 있었을 때에 육욕(Concupiscentia carnis), 즉 악의 충동, 정욕, 동료수사에 대한 증오와 시기, 노여움의 감정을 체험하였을 때마다 ’나는 이제 나의 구원이 다 틀렸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육욕은 항상 나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찿지못했다. 나는 항상 ’너는 성마름과 질투에 불타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 나는 공적 독성죄를 범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불평불만을 갖고서 정의의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오히려 증오하였다. 나는 하느님에게 분개하여 말하였다. 즉 ’하느님은 불쌍한 죄인들이 원죄로 인하여 영원히 버림을 받았고 십계명을 통해서 비참하게 억압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있다. 분명히 하느님은 복음을 통해서 고통을 가중시켰고 그의 정의와 노여움으로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격렬하고 혼란한 양심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루터는 수도자가 됨으로서 수도생활을 통해서 천국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실의에 빠졌다. 사실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르레상스 문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고, 다른 순례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대사)를 얻기를 희망하여 대성당을 부지런히 찿았다. 거기서 특별한 대사권을 소유한 고백신부를 만나 성사도 볼 수 있었고, 교회를 참배하여 대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대사가 부여된 여러 성당과 제대를 순례하고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대사를 얻었고, 연옥영혼을 위해서 미사도 봉헌했다. 그는 자기 부모들이 이미 사망하였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그가 미사를 봉헌하여 대사를 얻어 그들을 연옥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사실들을 아무런 비판의 기색도 없이 언급하고 있다.
어떻든 그는 죄의식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러 죄의식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고 하느님을 이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한다. 로마서 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하였다’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 입니다.”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하느님은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또 한편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접근이 막혀있다. 그분은 닥치는대로 구원의 희망을 적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거절한 것을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하신다.”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도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어떤 사람에게 거절함으로서 부당한 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벌을 주실 수 없다면 어떻게 그분의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나겠는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이런 차이점에서 은총논쟁이 오랫동안 벌어지게 된다.
카톨릭 신관이 토마스의 이론을 따라서 주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에게는 주의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겠다. 루터는 제 1계명을 해설하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분 하느님이란 사람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을 뜻하고, 모든 곤경 속에서 선하고 피난처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를 마음으로부터 신뢰하고 신앙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 말한 바와같이 오로지 마음의 신뢰와 신앙이 하느님과 우상 두가지를 만든다. 신앙과 신뢰가 올바르면 그대의 하느님도 올바르고, 그대의 신뢰가 그릇되고 불의하다면 하느님 역시 의로은 하느님이 아니다. 두가지 신앙과 하느님은 함께 속한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쏟고 의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대의 하느님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 전통 안에서는 신앙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하느님 존재의 타당한 증명이라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하느님의 인식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 신앙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한에는,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토마스가 하느님을 출발과 귀환, 즉 하느님이 창조의 근거와 목적으로 이해하는 데 비해서, 루터는 하느님이 역사내에 관계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즉 하느님은 항상 나를 위한 하느님이다. 여기서 영원한 질서의 차원으로부터 역사의 차원으로 하느님의 상념이 자리를 바꾸게 된다.
8. 근세의 하느님 이해 양식
중세의 우주 중심적 세계관은 신 중심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신성시 되었던 우주질서의 붕괴 체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근세까지 인간들은 자명하게 진실로 인정되었던 지구중심적 우주관의 붕괴를 체험하였다. 이 지구는 일회적으로 완성되어 불변하는 세계, 우주 질서의 중심이고, 여기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우주를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천문학의 발달은 태양중심적 사고를 가져왔다. 여기서 객관적 질서의 권위에 대한 강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중심의 붕괴를 체험하면서 확실한 것이 없어졌다. 지금까지는 확실성의 근거를 외부의 세계에서 우주에서 찿았는데, 이제 이것이 부동의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새로이 자기가 의지해야 할 지반을 찿아 나섰다. 여기서 자기가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실성에서 존재를 파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획기적인 전환을 자연과학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고, 사상적으로는 인간학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8.1. 데카르트(1596-1650)
데카르트 자신은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사고의 지평에서 사고의확실성을 이루고 있으나 하느님의 존재를 인간학적 전환을 가능케하는 소인으로써 파악하는 유신론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즉 방법적으로 회의하는 자신에게 관념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셋으로 나눈다.
즉, 감각의 산물인 관념과 환상의 산물인 관념과 생득 또는 본능 관념으로 나눈다. 무한 또는 완전으로 표현되는 신관념은 명료한 점에서 다른 관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사고의 출발점을 ‘Cogito ergo sum’으로 삼았다. 이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관념이다. 이 관념은 명료한 관념이다. 이 사실에서 하나의 관념이 명석하고 분명할수록 더 실재적이라는 원리가 나온다.
그런데 내 안에 자리한 관념중에서 명석 판명한 점에서 타 관념보다 더 탁월한 관념이 신관념이다. 타 관념이 상대적인데 비해서 완전성, 최고 자체인 신관념이 두드러진다. 이 신관념의 출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타관념의 경우 그 출처가 외계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외계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들 관념의 근거는 회의 하는 나 자신이다. 그러나 내가 무한한 존재인 신관념의 근거일 수 있기에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회의함은 유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한에서 무한한 실체가 나올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무한한 실재인 신이 당신의 관념을 인간에게 주입하여 인간이 이관념에 입각하여 세계내 대상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갖는 유한 실재 관념에 앞서 무한한 실재의 관념이 내안에 소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이 주체, 나의 자기 성취를 가능게하는 조건으로 소여되어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 본 하느님 상은 인간과 지상 세계의 상부, 피안에 있는 절대자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세상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내안에 있는 무한자가 된다. (Deus in me).
8.2. 파스칼 (-1662)
수학자요, 과학자며, 영성가인 파스칼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옹호하는 논증을 펼친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우선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위 한 명료성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전무하다는 것도, 그리고 신적인 현존도 표시해주는 것을 보지 못한다. 다만 숨어계신 하느님의 현존만을 만난다”(팡세 12항). 하느님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어떤 것이냐? 하나의 게임이 계속되고 있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에 내기를 거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내기를 거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으로 그 무한한 보상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사람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거기에는 어떤 무한한 보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에게 내기를 거는 것은 도박사들이 선호하는 중요한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 도박사는 한정된 판돈으로 무한한 보상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신앙의 하느님의 이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파스칼은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 두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켜 준다고 선언한다. “인간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또 인간의 본성안에는 하느님의 무가치함만을 느끼게하는 타락(corruption)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두가지 진리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지식은 단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철학자들의 자만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지라도 그들의 불쌍한 처지의 이유를 알 수있게 하진 못한다. 또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알고 있는 무신론자들의경우, 그 인식이 절망의 원인일 수 있어도 그들의 처지를 구해주는 구원자를 알게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두가지 진리를 동시에 포착하는 것은 오직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접근하고, 우리가 그분으로부터의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는 피조물이라는 진실을 알게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다. 사랑과 위로의 하느님, 그를 찿고 갈망하는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채워주시는 하느님, 그들로하여금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깊이 의식하게 하고, 한편 그분의 무한한 자비를 깨닫게 하시는 하느님,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집을 항상 그리워하게하고, 겸손, 기쁨, 신뢰와 사랑을 채워주시는 하느님, 그분 이외에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은 항상 “숨어계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맹목성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을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그분을 떠나서는 단절될 수밖에 없다“.(팡세 246)
8.3. 칸트
이미 서론에서 학기 초에 언급했듯이 칸트는 그이 저서 「순수 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비판한다. 안셀모의 존재론적 논증과 토마스의 우주론적 논증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가장 큰 개념, 완전한 개념으로서 존재해야만 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에 대해서, 아무리 완전한 최고의 개념이라할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난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와는 별개의 것으로 개념에서 실제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고, 제 1원인으로 신을 논증한 토마스의 이론을 인과율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경험세계를 벗어난 신의 존재를 논증해 내는 데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은 전적으로 다른 질서에 속한 까닭에, 단지 사변적 이성으로서 증명해 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윤리적 질서안에서 활동하시는 까닭에, 그런점에서라면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최고선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어떤 질문이 가능하다고 전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으 최고선에 대한 이데아가 보다 윤리적이고 거룩하고 고상한 자명원리에로 이끌고, 전능한 존재만이 우리를 의무에 대한 복종과 아울러 행복의 추구에 결합시킬수 있기에 윤리성만이 불가항력적으로 종교에로 이끈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창조의 최종 목적이며, 모든 인간의 활동의 목적으로서의 힘있는 윤리적인 법 시여자가 된다고 본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안에서 최고선을 추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음을 느낀다. 비록 의무적이고 구속적이지만 우리들 자신에게는 거기에 도달할 힘이 없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창조자이시며 보호자요 행정가이신 윤리적 통치자의 통치하에 있는 윤리적 연방공화국 안에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법 시여자의 은사는 그 거룩한 법에 대한 인간적 협력에 의해 제한 되어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가 법에 복종하는 만금 우리를 승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우리 이성의 한계를 초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그 자신안에서 파악할 수 없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윤리적인 존재로서 존재하는 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8.4. 헤겔
헤겔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다룬다. 그의 철학의 기본은 정반합의 원리, 즉 변증법이다. thesis(initial knowledge), antithesis(contradiction), synthesis(unification). 어떤 기본적으로 습득한 지식은 내적으로 상호 대화로써 발전해 나간다. 여기서 어떤 모순을 발견하고 이 모순을 통해서 해결을, 또는 종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존재의 변증법」에서 순수한 존재는 그 이상의 아무런 규정도 없는 것으로서 그 무규정적 직접성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 동등하고, 또한 타자에 대해서 부등하지도 않으며, 자기 의 내부에 있어서나 외부에 대해서도 아무런 차이를 지니지 않는다. 만일 어떤 규정이 있다든가, 또는 구별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로해서 존재의 순수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단지 순수하고 공허한 직관 그 자체다. 여기에 반립하는 순수한 무는 자기자신과의 단순한 동등성이요, 완전한 공허성이요, 자기 자신에 있어서의 무구별성이다. 여기서 아무것도 직관이나 사유가 언급될 수 있는 한, 직관하거나 사유하지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어떤 것이 직관되거나 사유된다는것과 아무 것도 직관되거나 사유되지 않는다는 것은 구별된다. 그리하여 무도 우리의 직관이나 사유속에있다. 그러므로 순수한 무는 존재와 동일한 규정이요, 일반으로 순수한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종합으로서, 그러므로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동일한 것이다. 진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진리는 양자의 무구별성이 아니라. 양자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양자가 절대적으로 구별되지만, 그러나 또한 분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분리될 수도 없고 각기 직접 그 반대에로 소실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무의 진리는 이처럼 한쪽이 다른 쪽에로 직접 소실된다고 하는 운도, 즉 생성이다. 이 우동에 있어서는 양자는 구별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바로 해설 되어버린 구별에 의해서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하느님이신 절대적 정신은 그와 반대되는 물질과 대립해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로 돌아가는 영원성안에서의 차이가 해소된다. 성부는 자신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한 존재요, 성자는 타자이면, 보편적인 것의 한정된 특수성이다. 성령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 하나임,일치이다. 삼위일체는 모든 실재, 보편성과 특수성, 동일성과 구별성의 대화적 과정을 통하여 냉혹하게 움직이는 모든 실재들안에서 발생하는 모범 도식을 제공한다. 모든 것이 결국 거기서 오직 하느님만이 인격적이 되는 성령의 왕국에로 움직인다.
8.5. 포이에르바하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며,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 의식이다. 결국 신은 인간의 자기 투사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카알 막스의 이론을 정립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연구는 한편 인간에 대한 연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점도 간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사신신학이 나오도록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니이체에 의해서,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되고 있다.
9. 현대신학의 하느님 이해.
데카르트 이후 발전해온 무신론을 배경으로 신학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이다. 교회 밖에서 는 포이에르바하와 니이체가, 교회 안에서는 슐라이 마허가 자유주의 신학을 태동시켰다. 그 자유주의 신학은 신-인간의 관계에서 항상 인간을, 특별하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이 차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둘에게 삼위일체의 이론은 주변적인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개신교적 현상이다.
두번째로 정통주의 또는 신 정통주의 신학이다. 신앙고백적 신학이다. 카톨릭 측에서, 이 신학은 하느님의 섭리적인 힘이 예수 그리스도와 셩령을 통하여, 안에서 드러났다는 것과 하느님의 불변 고정성, 하느님의 상위(相違)성을 강조한다.
한편 개신교측에서 이 신학은 하느님의 심판과 전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상위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때, 카톨릭은 변화로서의 의화를 강조하고, 개신교는 선언으로서의 의화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상위성에 대해서는 카톨릭보다 개신교 측이 더 강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날마다의 일상에서 하느님의 성사적 유효성이 개신교보다 카톨릭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사신신학이다. 헤겔, 포이에르바하, 니이체의 영향을 받은 사신 신학은 초월적 하느님의 사망을 강조한다. 초월성 그 자체는 전적으로 내재적인 것으로 침몰하고, 우리가 신적 또는 초월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을 두고 묘사하는 방법이 되었다.
넷째로 세속신학이다. 1960년대 발전한 이 신학은 자유주위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특성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있어서 이세상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강조함에 있어서 신구약성서와 성서 이후의 그리스도교 원리로 일관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안에서 세상을 위해 우리를 책임성 있는 삶에로 부르신다는 것이다(타자를 위한 인간). 그리고 화해 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로운 이웃‘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은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다섯번 째로 정치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모든 인간, 사회, 정치 실재를 판단하는 비평적 원리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정의, 인간성, 평화, 사랑등의 우리의 모든 개념을 결정적으로 측정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여섯번째로 실존신학이다.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발생하는 장소로서개별적 신앙인을 촛점으로 두고 있다. 19세기 키에르케골에 이어서 폴 틸릭, 불트만이 20세기에 그 맥을 잇고 있다. 이 실존신학은 하느님을 인간을 참 인간이게하는 원천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회개와 성숙의 원리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단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자체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은 거룩한 존재다.
일곱번째로 과정신학이다. 헤겔의 영향을 받고 있다. 화이트헤드와 테이야르드가 대표적 신학자다. 하느님은 항상 흐름(flux)의 상태에 존재하신다. 점진적으로 나아가도록 하고, 우리와 함께 역사를 공동 창조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결코 고정되거나 부동의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양극성의 하느님이시다(dipolar God). 과정안에서 하느님은 현재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하느님이 되신다. 이 과정은 하느님에 의해 의미하는 모든 것과 세상에 의하여 의미되는 모든 것 사이에서 대화적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은 한번은 절대적이시다(그분의 실존은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이시기도 하다(그분의 활동성은 다른 존재들과 상관적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느님은 다른 모든 존재와 상관적이시다. 하느님만이 영향을 주신다. 또 하느님만이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으신다. 역사는 불가항력적으로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움직인다. 하느님의나라가 그 완성을 이룰 것이다.
여덟번째로 초월적 토미즘이다. 대표적 신학자로 카알 라너를 들 수 있다. 카알 라너는 우주론적인 신앙사상의 경게선을 돌파하고 인간학적 전환을 신학에 도입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을 인간학적 전환에서 이해함으로 해서 초월신학을 정립하였다.
라너는 인간이 세게내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통찰을 수용한다. 세게내 존재로서 인간의 피투성(세상에 던져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계 안에 있는 실재와 관게를 맺어야 한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용어를 빌면 ’convertio ad phantasma‘ (세계 대상물에로의 지향)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세게를 향해서, 세게 안에서 자신을 상실, 소멸, 해소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는 자기 귀환운동을 이룩한다. 바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나를 세계 대상과 분리시키는 작용을 한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를 드러내는 사건이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인간이 물어야 하는 데서 존재의 유한성이 제시된다. 그러나 질문 가능성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질문 가능성의 조건을 나한테서 본다. 누구나 존재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명시적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지만 비주제적이고 함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에 질문이 가능하다. 어떤 양식으로든지 전혀 미지의 사실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은 비록 비 주제적, 비 명시적이긴 하지만 함축적인 존재의 지평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실재 일반을 일차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별 대상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 실재와 접촉한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는 이 대상들은 항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이다. 이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성격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추상능력이다. 즉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무엇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개별대상을 만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보다 많은 것’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보다 많은 것’이 인간 인식을 가능케하는 지평으로 소여되어 있다. 라너는 이 대상인식을 가능케하는 ‘보다 많은 것’을 실재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존재를 실현할 때보다 많은 것은 존재를 지향하고 이 존재 지향성 속에 하느님의 존재가 함축되어 있다고 라너는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 지향의 초월자라는 규정이 나온다. 여기서 인간이자신을 성취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지평으로 규정된 하느님은 인간으로부터 요원한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의 주체적인 운동을 가능케하는 내적 소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세계로 지향하는 힘으로써 세계를 거쳐 충만에 이르도록 충동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 실재와 관계를 맺지 않는 ,한 그의 실재 인식은 백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세계를 지향해서 대상 인식과 지평인식이 좀더 명시적이 된다.
전통적인 용어로 천국의 상태는 지복직관의 상태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직접적 대상으로 안다기 보다는 모든 실재 일반을 명시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를 거치지 않고는 하느님 인식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도 하느님이 더 이상 천상에서, 피안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절대자가 아니라는 것이요, 세계 내에서 인간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내적 소인으로 현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라너의 신관을 요약하자면, 하느님은 어떤 사물을 뛰어 넘는 초월적 존재다. 하느님은 모든 실재가 지향하는 목표다. 하느님은 ’초자연적 실재‘이다. 그 초자연적 실재는 절대자를 향해서 움직이게 하고, 그 절대자를 인식하게 한다. 개별적으로든지 혹은 협동적으로든지 그 운동의 완성안에서 우리 인간의 완전성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 존재와 구별된 존재가 아니다. 존재 그 자체이다. 인간을 초월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존재 자체다. 초월적 토미즘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인간 존재의 구조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간 존재에 대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본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10.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공의회는 1차 공의회처럼 조직적으로 명시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이해는 다른 질문들속에서 창아 볼수 있다. 비그리스도교인들의 구원적 가치, 교회의 본질, 그리고 교회의 세샹에 대한 사명을 질문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공의회의 우선적 관심은 일치에 있다. 이 일치는 단순히 교회의 일치만이 아니다. 전 인류의 일치다.
” 사실 여러 민족들은 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전 인류를 온 땅위에 살게 하시었으니(사도 17,26참조) 모든 민족들은 단 하나의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착하심의증거와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이고(지서 8,1; 사도 14,17, 로마 2,6-7; 티모 전 2,4 참조),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천상 성도에서 간선자들이 다시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여러 민족들이 하느님의 빛 속에 거닐겠기 때문이다(묵시 21,23 이하 참조).“
”교회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있다. … 인간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세상이 제공하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갈망을 만나고 있다. 인간의최후 목적인 하느님의 신비를 밝혀 주는 것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므로 교회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의의, 즉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인간에게 밝혀준다. 교회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만이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충족 시켜 줄실 수 있고 지상 양식으로는 결코 충족 시킬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다….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을 죄에서 구해 주셨으므로 그 분만이 이런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실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들 그리스도의 게시르 ㄹ통하여 완전한 해답을 주셨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현대 세계안에서의 교회의 사목헌장 41항). 하느님에 대한 신학과 인간에 대한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학안에 한데 모이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기위하여 가장 요긴한 것은 신자들의 형제적 사랑이다. 즉 복음의신앙을 펴기 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며 자신들을 일치의 상징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사랑이다. ”(21항).
“신앙의 공동체, 교회는 그 자체 안에서 삼위일체적 행위를 산출한다. 교회는 성부로부터 성령의 성화의 힘과 더불어 성자의일을 수행하도록 불리웠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교회헌장 2-4항).
일치에로 불리운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신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의자녀들의일치 사이의어떤 유사성이 있다(사목헌장 24항).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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