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왕과 황제(1-4)

 ■ 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왕과 황제

  Staufer, Könige und Kaiser aus dem Haus der


  슈타우퍼라는 이름은 가문의 본관인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 – 중세 독일의 왕족 이름과 그 가문 – 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가문은 1079년 슈바벤(Schwaben)의 공작 신분을 취득하였고, 1138년 콘라트 3세와 더불어 독일의 제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가문은 프랑켄, 슈바벤 그리고 엘자스 지역에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1194년에는 노르만 왕국과 나폴리 – 시칠리아 지역의 토지를 취득하였다. 교황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왕 또는 황제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콘라트 3세(1138~1152년)


  교황 루치오 2세는 1145년 로마 귀족들의 통치에 직면하여 독일의 왕 콘라트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콘라트 3세가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도 전에 교황 루치오 2세는 서거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일으킨 제2차 십자군 운동에 콘라트 3세는 동참하였다. 하지만 1147년에 출정한 독일의 십자군은 소아시아에서 참패당하였고, 독일로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독일 십자군의 잔류 병력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로마의 원로들은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콘라트 3세를 로마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전쟁 중 병을 얻어 독일로 귀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제국 자체에도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콘라트 3세는 로마의 원로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콘라트 3세는 개인적으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접촉하기를 모색하였다. 두 명의 독일 주교들이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콘라트 3세의 로마 여행과 황제의 대관식에 대한 교황의 견해를 확인하였다. 교황은 두 명의 추기경을 독일로 파견하여 콘라트 3세를 황제 대관식에 초대하였다. 1151년 7월 레겐스부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독일의 제후들은 1152년 9월 8일부터 시작될 콘라트 3세의 로마 여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콘라트 3세는 1152년 2월 15일 밤베르크에서 별세하였다. 이미 1150년에 콘라트 3세의 아들 하인리히가 요절하였을 때 콘라트 3세는 나이가 어린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바 있으나, 막상 임종시에는 자신의 조카 프리드리히 공작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2)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2~1190년)


  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황제들은 거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고, 독일 제국의 원대한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 황제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교회까지도 포함하여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어려운 문제들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국왕과 교황 에우제니오 3세 사이에는 마그데부르크 교구의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불화가 발생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소수의 지지를 받고 있던 나움부르크(Naumburg)의 주교 비흐만(Wichmann)을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로 선출하기를 원하였고, 이에 대해 교황은 그것은 ꡐ보름스 조약ꡑ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교황 에우제니오 3세도 이러한 불화로 말미암아 공개적인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15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있었던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교섭을 통해 ꡐ콘스탄츠 조약ꡑ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을 통해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의 동의 없이는 노르만족과 어떠한 평화 협정도 체결할 수 없고 또한 로마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대신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황제 대관식을 주재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독일 제국의 적들을 거슬러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것도 보증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에 오기 전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 아나스타시오 4세 – 18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임하였다 – 는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로 비흐만을 인정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1154년 콘스탄츠 조약의 보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세 명의 추기경을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1세에게 파견하였다.


  드디어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를 향해 출발하자 1155년 6월 8일 교황과 독일의 왕은 수트리(Sutri)에서 직접 만났다. 이 만남에서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독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이 말에서 내릴 때 말고삐를 잡아 주는 관행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평화의 인사를 거부하였다. 긴 교섭의 시간을 가진 후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이 말을 탈 때 ꡐ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에 대한 존경의 표시ꡑ로, 즉 주인에 대한 노예로서가 아니라 교황직에 대한 존경의 표지로 말고삐를 잡아 줄 것을 동의하였다. 그 결과 그 다음날 교황과 국왕 사이에 다시 만남이 이루어졌다. 교황과 국왕은 함께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고, 교황의 권고에 따라 국왕은 즉시 레오 시를 점령하였다. 1155년 6월 18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황제 대관식이 있었다. 대관식 후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를 떠나자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더 이상 레오 시에 머물 수 없어 황제의 군대에 함류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교황이 기대하였던 대 노르만족 침공을 미루자 새로운 불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교황은 콘스탄츠 조약의 위반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교황은 1156년 노르만족의 왕 빌헬름(Wilhelm)과 ꡐ베네벤토(Benevent) 조약ꡑ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ꡐ베네벤토 조약ꡑ으로써 ꡐ콘스탄츠 조약ꡑ이 폐기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1157년 브장송(Besancon)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새로운 대결 국면이 전개되었다. 즉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서한을 황제에게 전하기 위해 두 명의 추기경을 특사로 제국 의회에 파견하였다. 룬드(Lund) 교구의 대주교 에스킬(Eskil)은 로마를 떠나 룬드로 귀환하던 도중 부르군트(Burgund)에서 습격을 받고 약탈당하였다. 그리고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에스킬 대주교는 독일 제국의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룬드 교구가 수도 대교구로 승격됨으로써 교구의 권리는 함부르크 – 브레멘 교구로 이관되었다). 황제의 재상이었던 라이날트(Reinald von Dassel)가 브장송의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서한을 낭독하면서 ꡐbeneficiumꡑ을 ꡐ희사ꡑ대신 ꡐ봉토ꡑ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 제국 의회에 참석하였던 독일의 제후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황제는 결코 교황의 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특사들에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제국을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교황이 특사들에게 위임하였던 독일 교회의 순서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대 국민 성명을 통해 교황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독일 교회를 해방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독일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특사들이 받은 모욕에 대해 비난하였다. 하지만 독일 주교들은 황제의 편에 가담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모든 사안을 해명하기 위한 의도로 좀더 온건한 내용의 서한을 황제에게 보낼 것을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특사를 파견하여 프리드리히 1세에게 ꡐbeneficiumꡑ이라는 단어는 성서적인 의미로 ꡐ희사ꡑ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명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2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교황가 황제 사이에는 관계 단절의 위험이 발생하게 되었다. 추기경들의 압력에 못 이겨 교황은 ꡐ콘스탄츠 조약ꡑ의 회복을 제안하기 위해 두 명의 추기경을 황제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황제는 불화의 요인을 해명하기 위한 법정의 설치를 원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교황의 주권을 제한하고, 교황을 황제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는 로마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교황에게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교황은 특사가 로마에 도착도 하기 전에 아나니(Anagni)로 되돌아와 거기서 롬바르디아 도시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롬바르디아 도시들은 교황의 승인 없이 황제와 어떠한 평화 협정도 체결해서는 안 되었다. 교황은 40일 이내에 황제를 파문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이중의 교황 선출이 발생하였다. 몇몇 추기경들은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다른 추기경들은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중의 선거에서 알렉산데르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빅토리오 4세가 대립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오 4세가 서거하자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자신의 재상 라이날트로 하여금 즉시 빅토리오 4세의 후임자를 선출케 하였고, 그 결과 파스칼 3세가 선출되었다.


  1167년 여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네 번째 로마 원정을 감행하였고, 이때 황제는 레오 시를 점령하였다. 교황 파스칼 3세는 드디어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대하게 교황좌에 즉위할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 그의 부인 베아트리체(Beatrix)와 함께 – 재차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여 주었다. 황제 대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군대 내부에는 말라리아 전염병이 퍼졌다. 이 전염병으로 황제의 재상 라이날트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낙담하여 독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이탈리아 원정시 프리드리히 1세는 1176년 밀라노 근교에서 결정적으로 참패당하였다. 그 결과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프리드리히 1세는 아나니의 조약을 통해 서로 화해하게 되었다. 최종적인 조약은 베네치아에서 체결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더 이상 대립 교황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교황은 황제에게 내려진 파문의 처벌을 철회할 것을 약속하였다. 1177년 7월 24일에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교황과 황제의 만남으로써 18년간이나 계속되어 왔던 불화는 드디어 종식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3세 재임시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4세를 황제로 대관시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동일한 시대에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다시금 불화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183년 트리어의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을 때 교황은 황제의 지지를 받지 못한 지원자를 지지하였고, 이 지원자를 개인적으로 주교로 서품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는 교회 국가를 침공하여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교황은 항의를 제기하였지만 무시당하였다. 1186년 겔른하우젠(Gelnhausen)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독일의 거의 모든 주교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편을 들었다. 황제는 교황과 새로운 담판을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표명하였고, 이 담판에서 교황은 트리어 교구의 대주교 선출과 관련한 문제를 양보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3세의 두 번째 후임자 클레멘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계획하였고,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1188년 마인츠(Mainz)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정하였다. 독일의 십자군은 1189년 출정하였다. 독일의 십자군이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을 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별세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삶과 영향은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와 독일 제국 사이에 발생하였던 어려움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결과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후 교회와 독일 제국 사이의 관계는 매우 불투명해졌다.


  3) 하인리히 6세(1190~1197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생명을 앗아 간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시칠리아의 왕은 후사를 이을 자녀도 없이 별세하였다. 그의 유산은 하인리히 6세의 부인 콘스탄체(Konstanze)가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6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 빌헬름의 이복 동생 탄크레드(Tankred)가 이미 왕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탄크레드는 팔레르모(Palermo)의 대주교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 – 유산의 몫을 주장하였다. 1191년 4월 14일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교황 착좌식을 치렀고, 그 다음날인 1191년 1월에 이미 이탈리아에 도착해 있던 하인리히 6세의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였다. 그 후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부인에게 넘어 올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탄크레드와 하인리히 6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하인리히 6세의 냉정한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사이 독일에서는 제후들에 의해 반 하인리히 운동이 있었으나 1194년 잠잠해졌고, 그 결과 하인리히 6세는 다시금 예전의 권력을 되찾았다. 1194년에 탄크레드가 별세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시칠리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1194년 스스로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교황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교황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195년 3월 하인리히 6세는 교황이 호소한 바 있는 새로운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십자군 전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독일의 십자군은 시돈(Sidon)과 베이루트(Beirut)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별세하자 십자군 운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다.


  4) 슈바벤의 필립과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하인리히 6세의 사후 독일에서는 이중의 선거가 있었다. 1198년 슈타우퍼 가문의 출신인 슈바벤(Schwaben)의 필립(Philipp)이 뮐하우젠-튀링겐(Mühlhausen-Thüringen)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슈타우퍼 가문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소수파들은 쾰른의 대주교 아돌프(Adolf)의 권유에 따라 하인리히 6세의 셋째 아들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의 오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1198년 6월 9일). 그 결과는 형제간의 골육상전이었다. 필립과 오토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문제 해결을 청원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199년 5월 독일의 제후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필립과 오토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1200~1201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를 왕으로 승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을 지지하는 추종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1204년 독일의 제후들은 오토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207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로부터 등을 돌렸다. 1208년 6월 21일 필립이 살해되자, 1208년 11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토 6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1209년 10월 4일 오토 6세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오토 6세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황은 1210년 11월 8일 오토 6세 황제를 파문하였다. 1211년 9월 교황은 왕을 선출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모인 독일의 제후들에게 시칠리아의 젊은 프리드리히를 독일의 왕으로 추대할 것을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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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왕과 황제(1-4)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 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왕과 황제

      Staufer, Könige und Kaiser aus dem Haus der

      슈타우퍼라는 이름은 가문의 본관인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 – 중세 독일의 왕족 이름과 그 가문 – 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가문은 1079년 슈바벤(Schwaben)의 공작 신분을 취득하였고, 1138년 콘라트 3세와 더불어 독일의 제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가문은 프랑켄, 슈바벤 그리고 엘자스 지역에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1194년에는 노르만 왕국과 나폴리 – 시칠리아 지역의 토지를 취득하였다. 교황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왕 또는 황제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콘라트 3세(1138~1152년)

      교황 루치오 2세는 1145년 로마 귀족들의 통치에 직면하여 독일의 왕 콘라트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콘라트 3세가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도 전에 교황 루치오 2세는 서거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일으킨 제2차 십자군 운동에 콘라트 3세는 동참하였다. 하지만 1147년에 출정한 독일의 십자군은 소아시아에서 참패당하였고, 독일로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독일 십자군의 잔류 병력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로마의 원로들은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콘라트 3세를 로마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전쟁 중 병을 얻어 독일로 귀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제국 자체에도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콘라트 3세는 로마의 원로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콘라트 3세는 개인적으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접촉하기를 모색하였다. 두 명의 독일 주교들이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콘라트 3세의 로마 여행과 황제의 대관식에 대한 교황의 견해를 확인하였다. 교황은 두 명의 추기경을 독일로 파견하여 콘라트 3세를 황제 대관식에 초대하였다. 1151년 7월 레겐스부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독일의 제후들은 1152년 9월 8일부터 시작될 콘라트 3세의 로마 여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콘라트 3세는 1152년 2월 15일 밤베르크에서 별세하였다. 이미 1150년에 콘라트 3세의 아들 하인리히가 요절하였을 때 콘라트 3세는 나이가 어린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바 있으나, 막상 임종시에는 자신의 조카 프리드리히 공작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2)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2~1190년)

      슈타우퍼 가문 출신의 황제들은 거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고, 독일 제국의 원대한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 황제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교회까지도 포함하여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어려운 문제들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국왕과 교황 에우제니오 3세 사이에는 마그데부르크 교구의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불화가 발생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소수의 지지를 받고 있던 나움부르크(Naumburg)의 주교 비흐만(Wichmann)을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로 선출하기를 원하였고, 이에 대해 교황은 그것은 ꡐ보름스 조약ꡑ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교황 에우제니오 3세도 이러한 불화로 말미암아 공개적인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15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있었던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교섭을 통해 ꡐ콘스탄츠 조약ꡑ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을 통해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의 동의 없이는 노르만족과 어떠한 평화 협정도 체결할 수 없고 또한 로마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대신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황제 대관식을 주재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독일 제국의 적들을 거슬러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것도 보증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에 오기 전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 아나스타시오 4세 – 18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임하였다 – 는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로 비흐만을 인정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1154년 콘스탄츠 조약의 보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세 명의 추기경을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1세에게 파견하였다.

      드디어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를 향해 출발하자 1155년 6월 8일 교황과 독일의 왕은 수트리(Sutri)에서 직접 만났다. 이 만남에서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독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이 말에서 내릴 때 말고삐를 잡아 주는 관행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평화의 인사를 거부하였다. 긴 교섭의 시간을 가진 후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이 말을 탈 때 ꡐ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에 대한 존경의 표시ꡑ로, 즉 주인에 대한 노예로서가 아니라 교황직에 대한 존경의 표지로 말고삐를 잡아 줄 것을 동의하였다. 그 결과 그 다음날 교황과 국왕 사이에 다시 만남이 이루어졌다. 교황과 국왕은 함께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고, 교황의 권고에 따라 국왕은 즉시 레오 시를 점령하였다. 1155년 6월 18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황제 대관식이 있었다. 대관식 후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를 떠나자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더 이상 레오 시에 머물 수 없어 황제의 군대에 함류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교황이 기대하였던 대 노르만족 침공을 미루자 새로운 불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교황은 콘스탄츠 조약의 위반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교황은 1156년 노르만족의 왕 빌헬름(Wilhelm)과 ꡐ베네벤토(Benevent) 조약ꡑ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ꡐ베네벤토 조약ꡑ으로써 ꡐ콘스탄츠 조약ꡑ이 폐기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1157년 브장송(Besancon)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새로운 대결 국면이 전개되었다. 즉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서한을 황제에게 전하기 위해 두 명의 추기경을 특사로 제국 의회에 파견하였다. 룬드(Lund) 교구의 대주교 에스킬(Eskil)은 로마를 떠나 룬드로 귀환하던 도중 부르군트(Burgund)에서 습격을 받고 약탈당하였다. 그리고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에스킬 대주교는 독일 제국의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룬드 교구가 수도 대교구로 승격됨으로써 교구의 권리는 함부르크 – 브레멘 교구로 이관되었다). 황제의 재상이었던 라이날트(Reinald von Dassel)가 브장송의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서한을 낭독하면서 ꡐbeneficiumꡑ을 ꡐ희사ꡑ대신 ꡐ봉토ꡑ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 제국 의회에 참석하였던 독일의 제후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황제는 결코 교황의 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특사들에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제국을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교황이 특사들에게 위임하였던 독일 교회의 순서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대 국민 성명을 통해 교황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독일 교회를 해방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독일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특사들이 받은 모욕에 대해 비난하였다. 하지만 독일 주교들은 황제의 편에 가담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모든 사안을 해명하기 위한 의도로 좀더 온건한 내용의 서한을 황제에게 보낼 것을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특사를 파견하여 프리드리히 1세에게 ꡐbeneficiumꡑ이라는 단어는 성서적인 의미로 ꡐ희사ꡑ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명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2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교황가 황제 사이에는 관계 단절의 위험이 발생하게 되었다. 추기경들의 압력에 못 이겨 교황은 ꡐ콘스탄츠 조약ꡑ의 회복을 제안하기 위해 두 명의 추기경을 황제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황제는 불화의 요인을 해명하기 위한 법정의 설치를 원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교황의 주권을 제한하고, 교황을 황제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는 로마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교황에게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교황은 특사가 로마에 도착도 하기 전에 아나니(Anagni)로 되돌아와 거기서 롬바르디아 도시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롬바르디아 도시들은 교황의 승인 없이 황제와 어떠한 평화 협정도 체결해서는 안 되었다. 교황은 40일 이내에 황제를 파문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이중의 교황 선출이 발생하였다. 몇몇 추기경들은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다른 추기경들은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중의 선거에서 알렉산데르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빅토리오 4세가 대립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오 4세가 서거하자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자신의 재상 라이날트로 하여금 즉시 빅토리오 4세의 후임자를 선출케 하였고, 그 결과 파스칼 3세가 선출되었다.

      1167년 여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네 번째 로마 원정을 감행하였고, 이때 황제는 레오 시를 점령하였다. 교황 파스칼 3세는 드디어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대하게 교황좌에 즉위할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 그의 부인 베아트리체(Beatrix)와 함께 – 재차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여 주었다. 황제 대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군대 내부에는 말라리아 전염병이 퍼졌다. 이 전염병으로 황제의 재상 라이날트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낙담하여 독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이탈리아 원정시 프리드리히 1세는 1176년 밀라노 근교에서 결정적으로 참패당하였다. 그 결과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프리드리히 1세는 아나니의 조약을 통해 서로 화해하게 되었다. 최종적인 조약은 베네치아에서 체결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더 이상 대립 교황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교황은 황제에게 내려진 파문의 처벌을 철회할 것을 약속하였다. 1177년 7월 24일에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교황과 황제의 만남으로써 18년간이나 계속되어 왔던 불화는 드디어 종식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3세 재임시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4세를 황제로 대관시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동일한 시대에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다시금 불화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183년 트리어의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을 때 교황은 황제의 지지를 받지 못한 지원자를 지지하였고, 이 지원자를 개인적으로 주교로 서품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는 교회 국가를 침공하여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교황은 항의를 제기하였지만 무시당하였다. 1186년 겔른하우젠(Gelnhausen)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독일의 거의 모든 주교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편을 들었다. 황제는 교황과 새로운 담판을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표명하였고, 이 담판에서 교황은 트리어 교구의 대주교 선출과 관련한 문제를 양보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3세의 두 번째 후임자 클레멘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계획하였고,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1188년 마인츠(Mainz)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정하였다. 독일의 십자군은 1189년 출정하였다. 독일의 십자군이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을 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별세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삶과 영향은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와 독일 제국 사이에 발생하였던 어려움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결과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후 교회와 독일 제국 사이의 관계는 매우 불투명해졌다.

      3) 하인리히 6세(1190~1197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생명을 앗아 간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시칠리아의 왕은 후사를 이을 자녀도 없이 별세하였다. 그의 유산은 하인리히 6세의 부인 콘스탄체(Konstanze)가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6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 빌헬름의 이복 동생 탄크레드(Tankred)가 이미 왕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탄크레드는 팔레르모(Palermo)의 대주교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 – 유산의 몫을 주장하였다. 1191년 4월 14일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교황 착좌식을 치렀고, 그 다음날인 1191년 1월에 이미 이탈리아에 도착해 있던 하인리히 6세의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였다. 그 후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부인에게 넘어 올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탄크레드와 하인리히 6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하인리히 6세의 냉정한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사이 독일에서는 제후들에 의해 반 하인리히 운동이 있었으나 1194년 잠잠해졌고, 그 결과 하인리히 6세는 다시금 예전의 권력을 되찾았다. 1194년에 탄크레드가 별세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시칠리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1194년 스스로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교황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교황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195년 3월 하인리히 6세는 교황이 호소한 바 있는 새로운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십자군 전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독일의 십자군은 시돈(Sidon)과 베이루트(Beirut)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별세하자 십자군 운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다.

      4) 슈바벤의 필립과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하인리히 6세의 사후 독일에서는 이중의 선거가 있었다. 1198년 슈타우퍼 가문의 출신인 슈바벤(Schwaben)의 필립(Philipp)이 뮐하우젠-튀링겐(Mühlhausen-Thüringen)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슈타우퍼 가문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소수파들은 쾰른의 대주교 아돌프(Adolf)의 권유에 따라 하인리히 6세의 셋째 아들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의 오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1198년 6월 9일). 그 결과는 형제간의 골육상전이었다. 필립과 오토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문제 해결을 청원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199년 5월 독일의 제후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필립과 오토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1200~1201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를 왕으로 승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을 지지하는 추종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1204년 독일의 제후들은 오토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207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로부터 등을 돌렸다. 1208년 6월 21일 필립이 살해되자, 1208년 11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토 6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1209년 10월 4일 오토 6세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오토 6세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황은 1210년 11월 8일 오토 6세 황제를 파문하였다. 1211년 9월 교황은 왕을 선출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모인 독일의 제후들에게 시칠리아의 젊은 프리드리히를 독일의 왕으로 추대할 것을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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