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교서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인 "새 천년기"는 
   2000년 대희년 폐막에 즈음하여 대희년을 보내면서 
   교황님께서 전 세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내용은 대희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각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모임 후에 유산으로 남겨진 신앙적, 정신적 풍요를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다지면서 앞으로 3000년기를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세상에 나아가 사랑의 증인들이 되자는 호소이다.
    본 장에 연재하는 부분은 소공동체와 연관이 깊은 부분으로 
   둘째부분인 "바라보아야 할 얼굴", 셋째 부분인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넷째 부분인 "사랑의 증인들"의 부분을(42항 이하) 
   요약 설명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2, 바라보아야 할 얼굴
      (17항-28항)

     복음서의 증언(17항-18항)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성서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무지이다."
   라고 확언하였다. 우리는 성서의 근원인 성령과(요한 15,26 참조)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한 사도들의 증언에
   (요한 15,27 참조) 마음을 열고 성서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의 일생동안의 얼굴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켜야 한다.

     신앙생활(19-20항)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보는 방법은 예수님 생전에 
   그 분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는 상관없이 오직 신앙 안에서만 
   그리스도 얼굴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참으로 신앙을 통하여, 신앙을 통해서만 실제로 예수님께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이 비범하고 뚸어난 종교적 안목을 가진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분이 실제 누구신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 16, 16)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 또 모든 시대의 교회가 베드로와 함께 고백한 
   신앙만이 지정으로 핵심에 이를 수 있고 신비의 깊이에 다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베드로의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마태6,17참조) 계시의 은총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16,17)라고 
   하심에서 보듯 우리 모두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주님의 얼굴을 완전히
    관상할 수 없으며 은총이 우리를 인도하게 내어 맡길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백히 알려 주시고 계시다. 
   기도와 침묵은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주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시편26,9)
     시편 작가의 이 오랜 연원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때 가장 충만하고 
   놀랍게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시편66,2)

      성자의 얼굴(24항)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신 분이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요한10,38)라고 하신다.
   열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2,49) 
   이 말씀은 이미 당신은 하느님과 유일한 관계, 
   곧 마땅히 '아들'만이 지닌 인식을 하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역사 안에 실존하시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당신의 신원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계셨고 이 신원의식 때문에 즉,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배척 받으시고
   단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고통에 찬 얼굴(25항-27항)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분의 마지막 시간에 
   십자가 위에 드러난 그 분의 신비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과 마주치게 된다. 
   신비 중의 신비!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훔숭 드릴 뿐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처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얼굴, 십자가상에서 하느님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르15,34)라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님 얼굴의 신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절규는 절망한 한 인간의 고뇌에 찬 외침이 아니라 
   모든이의 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아버지께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아들의 기도이다.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아버지에게 고정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인식 때문에 이러한 암흑의 순간에 죄의 심각성을 
   꿰뚫어 보시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분의 얼굴(28항)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교회는 지금도 피투성이의 얼굴을, 
   하느님의 생명이 감추어지고 세상에 구원이 주어지는 얼굴을 끝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전하는 헛된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1고린15,14 참조) 
   부활은 그리스도의 순명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이제 교회가 바라보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을 배반한 뒤 통회하며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요한21,15-17 참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며 새 출발을 한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본다. 
   신부인 교회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자신의 보화와 기쁨을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곳은 누구이며 어디인가? 
   그리스도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던 곳, 
   즉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일상생활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중에 더욱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어려움 중에 
   더욱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 때 예수님의 
   부활하신 얼굴이 우리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바라보면서 그처럼 되기를 소망하면 반드시 닮는다는 
   "큰 바위 얼굴"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그의 얼굴을 닮고자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모습이 이웃의 거울에 비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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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교서 1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인 "새 천년기"는 
       2000년 대희년 폐막에 즈음하여 대희년을 보내면서 
       교황님께서 전 세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내용은 대희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각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모임 후에 유산으로 남겨진 신앙적, 정신적 풍요를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다지면서 앞으로 3000년기를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세상에 나아가 사랑의 증인들이 되자는 호소이다.
        본 장에 연재하는 부분은 소공동체와 연관이 깊은 부분으로 
       둘째부분인 "바라보아야 할 얼굴", 셋째 부분인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넷째 부분인 "사랑의 증인들"의 부분을(42항 이하) 
       요약 설명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2, 바라보아야 할 얼굴
          (17항-28항)
    
         복음서의 증언(17항-18항)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성서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무지이다."
       라고 확언하였다. 우리는 성서의 근원인 성령과(요한 15,26 참조)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한 사도들의 증언에
       (요한 15,27 참조) 마음을 열고 성서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의 일생동안의 얼굴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켜야 한다.
    
         신앙생활(19-20항)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보는 방법은 예수님 생전에 
       그 분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는 상관없이 오직 신앙 안에서만 
       그리스도 얼굴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참으로 신앙을 통하여, 신앙을 통해서만 실제로 예수님께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이 비범하고 뚸어난 종교적 안목을 가진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분이 실제 누구신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 16, 16)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 또 모든 시대의 교회가 베드로와 함께 고백한 
       신앙만이 지정으로 핵심에 이를 수 있고 신비의 깊이에 다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베드로의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마태6,17참조) 계시의 은총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16,17)라고 
       하심에서 보듯 우리 모두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주님의 얼굴을 완전히
        관상할 수 없으며 은총이 우리를 인도하게 내어 맡길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백히 알려 주시고 계시다. 
       기도와 침묵은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주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시편26,9)
         시편 작가의 이 오랜 연원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때 가장 충만하고 
       놀랍게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시편66,2)
    
          성자의 얼굴(24항)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신 분이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요한10,38)라고 하신다.
       열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2,49) 
       이 말씀은 이미 당신은 하느님과 유일한 관계, 
       곧 마땅히 '아들'만이 지닌 인식을 하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역사 안에 실존하시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당신의 신원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계셨고 이 신원의식 때문에 즉,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배척 받으시고
       단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고통에 찬 얼굴(25항-27항)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분의 마지막 시간에 
       십자가 위에 드러난 그 분의 신비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과 마주치게 된다. 
       신비 중의 신비!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훔숭 드릴 뿐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처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얼굴, 십자가상에서 하느님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르15,34)라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님 얼굴의 신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절규는 절망한 한 인간의 고뇌에 찬 외침이 아니라 
       모든이의 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아버지께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아들의 기도이다.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아버지에게 고정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인식 때문에 이러한 암흑의 순간에 죄의 심각성을 
       꿰뚫어 보시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분의 얼굴(28항)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교회는 지금도 피투성이의 얼굴을, 
       하느님의 생명이 감추어지고 세상에 구원이 주어지는 얼굴을 끝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전하는 헛된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1고린15,14 참조) 
       부활은 그리스도의 순명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이제 교회가 바라보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을 배반한 뒤 통회하며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요한21,15-17 참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며 새 출발을 한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본다. 
       신부인 교회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자신의 보화와 기쁨을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곳은 누구이며 어디인가? 
       그리스도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던 곳, 
       즉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일상생활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중에 더욱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어려움 중에 
       더욱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 때 예수님의 
       부활하신 얼굴이 우리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바라보면서 그처럼 되기를 소망하면 반드시 닮는다는 
       "큰 바위 얼굴"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그의 얼굴을 닮고자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모습이 이웃의 거울에 비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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