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가르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

 

성서에서 가르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




사실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면, 그리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합니다면, 회개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속담에 ‘알아야 면장이라도 합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성서에서 말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알아 봅시다.




2.1. 회 개


우리는 신약성서 안에서 회개에 대한 몇 가지 유형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는 말씀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로서의 회개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둘째,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셋째,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 사도는 저 유명한 오순절 설교에 감명을 받은 군중들의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하는 질문에 대해,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7-38)라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번째 단계가 회개와 세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넷째,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역시 당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시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쟁쟁한 철학자들과 문인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누구든지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사도 17,30)라고 하시면서, 사람은 신분상의 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개할 존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러한 ‘회개’에 대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신약성서에만도 “회개하라”는 말은 7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회개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심 사상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신약 성서적 용어인 Metanoia는 종종 도덕적 회심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이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사고방식, 관점, 마음의 바꿈’을 뜻1)하기도 합니다.


한편, 구약성서도 신약성서 못지 않게 회개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구약성서는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바라시는 야훼 하느님의 지극하신 자비와 또 이 자비에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아모스서 등은 “야훼를 찾으라, 야훼의 얼굴을 찾아라,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라, 인생의 길을 바꾸라, 돌아오라, 회개하라” 등의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요엘도 “너희는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12-13)는 말씀으로 예언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따라서 회개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한 개인의 구원과 더 나아가서는 한 민족의 운명이 회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회개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죄인이라는 인간의 존재성과 또 구원받아야 할 인생의 목적 의식에서 오는 절대적 요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행복 속에 영생할 수 있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였고(창세 3장), 그 결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인류는 원죄의 유산을 이어받아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며(로마 5,14), 따라서 사람은 “죄의 종”(로마 7,14)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비뚤어진 존재”(로마 3,1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딘가 잘못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람은 예외없이 다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인 동시에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1요한 1,8.1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루가 5,21-32)고 말씀하신 구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에,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빛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인간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회개해야 하고, 또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끊임없는 회개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구원은 우리에게 선사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상(罪相)을 면밀히 알아내는 ‘지적 요소’, 죄를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정적(情的) 요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께로 돌아가는 ‘의지적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전형적인 모델을 루가 복음 15장에 있는 저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 곁을 떠나 많은 죄를 지은 후에, 돼지를 치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돌아보며, 아버지를 떠나온 자신의 행동을 몹시 후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자기 인생의 시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인정했고, 또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자상하고 자비롭던 옛날의 아버지 사랑에 희망을 걸고,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 때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맞아 주었습니까? 잃었던 아들, 즉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여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처럼 탕자가 아버지께 되돌아옴으로써 아들된 옛 자격을 회복하였듯이, 완전한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그분의 자녀되는 특권을 얻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무척 기뻐합니다”(루가 15,1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날의 습관된 죄에서, 또는 어쩌다 범하게 되는 죄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루가 3,8)하는 세례자 요한의 권고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생활 모습을 가지고(에페 4,17-24),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23)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를 합리화시키며 회개를 방해하는 다음과 같은 사탄의 속삭임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혹의 소리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죄는 누구나 짓는 것이니까…


둘째로, 이까짓 것쯤이야, 다른 사람도 저지르는데 뭐 어때 …


셋째로, 한 번만 더 하고 다음엔 끝내지 …


넷째로, 아직 살 날이 앞으로 많으니까 …


다섯째로,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 …


여섯째로,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되겠지 …2)




2.2. 하느님 나라


다음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사상입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이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마르 1,15)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덧붙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서를 보면 많은 구절들이 하느님 나라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또는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합니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리고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같이 권력에 의해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어 다스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의 기도’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다스리시어 그분의 뜻이 이 세상에 실현되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통해 구원을 얻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점을 구약 성서의 이사야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산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 2,3-4; 미가 4,2-3).


여기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통치는 인종과 민족간의 분쟁과 전쟁이 종식되어, 이 세상에 평화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른 구절에서는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헤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이사 11,6-9; 65,25).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약육강식과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혀 없는 평등과 공존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의미하면서 점진적으로 시기와 질투, 불의와 부정 등으로 사막처럼 메마른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샘물을 흐르게 하고, 또 원한과 복수심으로 뜨겁게 타오르던 인간의 마음에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 화해를 이룩하여 평화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좀먹는 질병과 장애가 추방되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사라져, 끝없는 기쁨 속에 행복을 누리게 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통치는 인종과 민족 간의 화해이며, 또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룩하는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통해 얻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인 것입니다.3)




그렇다면 이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언제 오는 것입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우리 가까이에,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마르 13,32-33) 하신 말씀처럼, 그 나라는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나라입니다.”4)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임하시도록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회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로마 13,14; 2고린 5,17)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23)를 가지고 우리 자신의 성화(聖化)는 물론 이웃과의 형제적 친교, 더 나아가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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