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기다림, 예수님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의 대상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기다림의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풍갈 날을 설레이던 마음으로 기다리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일날이 다가오면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던 체험이 있습니다.


위의 예들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일반적인 기다림이었다면, 우리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기다림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늦게 들어오는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고, 또 군대 간 아들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우리의 삶과 친숙합니다. 이런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일년내내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골마을에 낯선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그 젊은 아가씨의 눈망울엔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마을 어귀의 강가로 가더니 오래도록 흐르는 물을 쳐다보았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양을 치러 나가던 어린 목동이 강가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아가씨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한참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그 목동이 양을 몰고 나타났을 때도 아가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동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아가씨의 머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된 그 아가씨는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그 강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강물의 위쪽에서 무언가 둥실둥실 떠내려 왔습니다. 할머니가 된 아가씨는 벌떡 일어나 강 위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물에 떠내려온 것은 놀랍게도 한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그녀는 그 청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수십 년 전 히말라야의 어느 산에 올랐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히말라야 산맥 눈 속 어디쯤에 파묻힌 약혼자가 눈이 조금씩 녹으면 강가로 흘러내려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의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1)




한편 기다림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차원의 기다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은 조국의 광복을 35년간이나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시대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는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평화가 흘러 넘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다양합니다. 기다림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의 기다림이 있고, 또 기다림의 가치나 비중으로 보아서 사소한 기다림에서부터 중요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제 전례력으로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시기가 중간을 넘어선 대림 3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이 가까워 오는 이 때, 우리 신앙인이 기다리는 분, 곧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 기쁨과 희망의 기다림




여러분은 성당에 가면 제대 앞에 장식되어 있는 대림환과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대림초를 볼 수 있습니다. 대림 3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4개의 대림초 가운데 3개의 초에 불을 켭니다. 이 대림초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초의 색깔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초의 4가지 색깔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주색, 연보라색, 장미색, 그리고 흰색입니다. 이 네 가지의 색깔은 대림시기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의 강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어두움의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강생인 성탄이 다가올수록 어두움은 사라지고, 대신에 광명의 빛이 점차로 밝아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림초에 사용하는 색깔은 구세주의 탄생이 다가올수록 점차 밝은 빛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진한 어두움을 드러내는 자주색으로부터 환한 빛을 드러내는 흰색으로 이어지는 대림초들이 대림시기의 1주간마다 하나씩 추가로 켜지는 것입니다.


대림 3주에는 자주색, 연보라, 장미색의 초에 불을 켭니다. 이는 대림 3주의 특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미색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장미색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빛의 강도가 세어졌다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대림 3주가 기쁨과 희망의 기간이라는 것을 또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적인 면이 대림 3주일에 사제가 입는 장미빛 제의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대림시기 중간에 기쁨과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사순시기와 비슷하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를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도와 희생과 자선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를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림 3주는 어둠의 터널을 절반 넘게 지나고 있는 셈이며, 터널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광명의 빛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광명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쁨과 희망을 갖는 때입니다.


다른 한편, 대림 3주의 특징인 기쁨과 희망의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려야 할 분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큰 기쁨과 희망을 지니고 대림시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3. 구약의 메시아 기다림과 그 실현인 예수 그리스도




대림 3주일 가해의 복음이면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을 잘 설명하고 있는 성서구절은 마태오 복음 11,2-11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요한의 질문을 잘 살펴보면 요한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는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에 대한 기다림,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상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하여 유다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분,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제 구약성서에서 메시아는 어떤 의미로 쓰였으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 구약성서의 메시아 사상2)


히브리말로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메시아란 주로 백성을 다스리던 王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메시아란 명칭을 받은 이는 사울3)이었지만, 구약성서에서 메시아 사상의 중심에 있는 왕은 그 유명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됩니다.4) 그리고 후대에 와서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다윗 왕국은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윗왕 이후 이스라엘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 후 다윗 왕가가 다스리던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생활을 겪게 됩니다. 이제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통치와 보살핌에 의한 구원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년)에서 돌아온 이후 유다인들의 생활은 포로생활을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상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이후 로마의 정복과 통치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갈망했고, 오직 야훼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에 커다란 기대를 가졌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만이 민족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서를 비롯하여 특히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풍부한 묵시문학적 경향5)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들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가능성들은 미래의 왕국에 대한 記述과 다윗 왕조의 통치권 회복,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왕권이 실현되는 것에 관한 敍述을 통하여 시도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권,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의 성서문학과 신구약 중간시기에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정치를 종교의 한 부분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분명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에 의한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에 가져오실 분,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3.2.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의 메시아 대망(待望)사상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이방인인 로마의 가혹한 지배와 같은 민족이면서도 대사제들을 비롯한 유다지배자들의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착취를 받는 고통중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다의 모든 백성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6) 마치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것처럼, 유다인들도 다양하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7)은 모든 율법을 엄밀하게 준수-예를 들면,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행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였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불결한 것과 부정한 사람들-예를 들면, 세리와 죄인들-의 접촉을 피하였습니다.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었고, 메시아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그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과 규범을 지키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세네파 사람들8)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과 꿈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법 규범의 준수와 정화된 삶으로 그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시몬이 속해 있었던 혁명당원들9)은 무력을 써서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 나라의 돌입을 촉발시켜야 합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섬기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인구조사, 조세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한편 묵시문학의 작가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표들을 분별하고자 애쓰며, 이를 위해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때를 결정하기 위한 연대의 계산을 도모하였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떤 징조들이 일어나며, 그 때가 언제인가를 탐구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가복음 17,20-37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올 지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3.3. 종으로 오신 예수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원하던 해방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다림과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되었습니다.10)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율법에 어긋나는 죄인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11) 또한 예수님은 혁명당원의 생각과는 달리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를 몰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결코 유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거나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의미의 해방으로만 축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 강조하듯이 몇월 몇시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유다의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세상의 철저한 쇄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으로, 세상의 통치자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겨자씨와 같은(마태 13,31), 혹은 밀가루 반죽에 섞인 누룩(마태 13,33)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흘러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꼴찌가 되어 남을 섬겨야 합니다고 가르치셨으며, 이웃 사랑에 대한 모범으로써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더우기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죽음과 어둠과 죄를 이기시고 생명과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진정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가?




대림 3주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짝 다가와 계십니다. 이제 한 주간만 지나면 예수님은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와 계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림이란 그저 뒷짐을 지고 수동적으로 서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릴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다립니다. TV나 소설을 보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첫 눈이 내리면 흔히들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첫 눈이 내릴 것을 기다리면서, 상대방이 좋아할 선물을 준비합니다든지, 상대방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할 준비를 합니다. 기다림이란 이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을 위해 무언가 준비를 하는 그런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에 손님이 오신다고 할 때 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온통 쓸고 닦으며 준비하는 그 기다림의 모습으로 우리는 이 대림 시기를 지내며 ‘오실 분’을 그렇게 적극적이며 역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그분은 진정 어떠한 모습의 예수님이십니까?


그분은 나만을 위하는, 단순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분은 아주 약하고 힘없는 작은 아기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분이 어떻게…’하고 생각될 그러한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이사 55,8-9)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눈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보는 것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정의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분을 맞이합니다는 것은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과 자비와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 안에서 무한 가치로 평가하는 ‘일등’, ‘일류’의 경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내는 사랑과 관심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수단으로 평가하는 불의와 거짓의 가치에서 인간과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존중하는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가?’ 혹 ‘그저 시간이 흘러 맞이하게 되는 연례 행사처럼 대림절을 지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구원을 가져다 주신 예수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세상이 주는 명예와 재산을 더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분께 우리의 희망을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약한 우리의 심성은 쉽게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예수님을 성당에 모셔둔 채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가 오로지 기다려야 할 분이 아니라 악세사리처럼 되고 맙니다. 세례 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우리이기에 다른 무엇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당신께 의심을 품지 않고, 당신을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다시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예수님 보다는 ‘다른 무엇’을 기다리고픈 유혹이 우리 앞에 있기에, 특별히 성탄이 얼마남지 않은 지금, 기도와 희생으로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야 할 것입니다.






5. 기다림의 비전, 그것은 희망 :


   이미 와 계신, 그러나 늘 새롭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기다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 기다림은 결코 지루하거나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희망은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내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이 있기에 기다림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잊어버릴 때 기다림은 소극적이 되고 급기야는 기다림에 동반되어야만 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미약함과 배반의 죄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또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해마다 때를 정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어디 특별한 곳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숨쉬며, 생활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그리고 절망을 넘어 희망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작고 미약하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선취(先取)하여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 오던 그 모든 것들이 예전과 같이 보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 3주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자선 주일로 제정하고, 이것의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리고 거짓과 부패한 세상에 정의와 진리의 빛을 전달함으로써, 우리가 기다리는 그 성탄의 기쁨을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에서 사랑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기쁨과 희망찬 설레임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 마침 기도




기다림은 그분이 나를 안다는 그것으로 충분하기에 남들의 이해를 찾지 않으며, 왜? 라고 묻지 않고 일상의 모든 것을 감사로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천천히 돋아나는 싹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기다림은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께 나의 세계를 내어 드리는 것이기에 일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 둘줄 알게 합니다.


기다림은 이웃의 필요에 눈뜨게 하고, 이웃의 모순을 탓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이는 관대함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나 자신과 이웃의 회심의 가능성을 믿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푸근한 안식처가 됨입니다.


기다림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힘들 때에도 요구 없이, 대가 없이 관심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여유입니다.


기다림은 불평하지 않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내 방식대로 따르길 원치 않으며,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앞에서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는 끝없는 용서입니다.


기다림은 자신을 끊임없이 포기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며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기다림은 세상이 온갖 모순들에 대해 연민의 정으로 마음이 넓어져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그 옛날 시메온과 안나가 감격 속에 구원을 보았듯이 우리를 새로운 눈과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새롭게 탄생할 수 있게 하는 해방인 것입니다.


이렇듯,


조용히 자신을 태우며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장 여린 기도와 기다림 속에서 염원하는 죄스런 우리에게, 인간을 향한 다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몸소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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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기다림, 예수님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의 대상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기다림의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풍갈 날을 설레이던 마음으로 기다리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일날이 다가오면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던 체험이 있습니다.

    위의 예들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일반적인 기다림이었다면, 우리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기다림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늦게 들어오는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고, 또 군대 간 아들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우리의 삶과 친숙합니다. 이런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일년내내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골마을에 낯선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그 젊은 아가씨의 눈망울엔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마을 어귀의 강가로 가더니 오래도록 흐르는 물을 쳐다보았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양을 치러 나가던 어린 목동이 강가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아가씨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한참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그 목동이 양을 몰고 나타났을 때도 아가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동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아가씨의 머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된 그 아가씨는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그 강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강물의 위쪽에서 무언가 둥실둥실 떠내려 왔습니다. 할머니가 된 아가씨는 벌떡 일어나 강 위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물에 떠내려온 것은 놀랍게도 한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그녀는 그 청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수십 년 전 히말라야의 어느 산에 올랐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히말라야 산맥 눈 속 어디쯤에 파묻힌 약혼자가 눈이 조금씩 녹으면 강가로 흘러내려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의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1)


    한편 기다림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차원의 기다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은 조국의 광복을 35년간이나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시대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는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평화가 흘러 넘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다양합니다. 기다림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의 기다림이 있고, 또 기다림의 가치나 비중으로 보아서 사소한 기다림에서부터 중요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제 전례력으로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시기가 중간을 넘어선 대림 3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이 가까워 오는 이 때, 우리 신앙인이 기다리는 분, 곧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 기쁨과 희망의 기다림


    여러분은 성당에 가면 제대 앞에 장식되어 있는 대림환과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대림초를 볼 수 있습니다. 대림 3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4개의 대림초 가운데 3개의 초에 불을 켭니다. 이 대림초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초의 색깔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초의 4가지 색깔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주색, 연보라색, 장미색, 그리고 흰색입니다. 이 네 가지의 색깔은 대림시기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의 강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어두움의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강생인 성탄이 다가올수록 어두움은 사라지고, 대신에 광명의 빛이 점차로 밝아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림초에 사용하는 색깔은 구세주의 탄생이 다가올수록 점차 밝은 빛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진한 어두움을 드러내는 자주색으로부터 환한 빛을 드러내는 흰색으로 이어지는 대림초들이 대림시기의 1주간마다 하나씩 추가로 켜지는 것입니다.

    대림 3주에는 자주색, 연보라, 장미색의 초에 불을 켭니다. 이는 대림 3주의 특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미색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장미색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빛의 강도가 세어졌다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대림 3주가 기쁨과 희망의 기간이라는 것을 또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적인 면이 대림 3주일에 사제가 입는 장미빛 제의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대림시기 중간에 기쁨과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사순시기와 비슷하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를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도와 희생과 자선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를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림 3주는 어둠의 터널을 절반 넘게 지나고 있는 셈이며, 터널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광명의 빛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광명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쁨과 희망을 갖는 때입니다.

    다른 한편, 대림 3주의 특징인 기쁨과 희망의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려야 할 분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큰 기쁨과 희망을 지니고 대림시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3. 구약의 메시아 기다림과 그 실현인 예수 그리스도


    대림 3주일 가해의 복음이면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을 잘 설명하고 있는 성서구절은 마태오 복음 11,2-11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요한의 질문을 잘 살펴보면 요한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는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에 대한 기다림,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상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하여 유다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분,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제 구약성서에서 메시아는 어떤 의미로 쓰였으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 구약성서의 메시아 사상2)

    히브리말로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메시아란 주로 백성을 다스리던 王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메시아란 명칭을 받은 이는 사울3)이었지만, 구약성서에서 메시아 사상의 중심에 있는 왕은 그 유명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됩니다.4) 그리고 후대에 와서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다윗 왕국은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윗왕 이후 이스라엘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 후 다윗 왕가가 다스리던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생활을 겪게 됩니다. 이제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통치와 보살핌에 의한 구원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년)에서 돌아온 이후 유다인들의 생활은 포로생활을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상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이후 로마의 정복과 통치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갈망했고, 오직 야훼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에 커다란 기대를 가졌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만이 민족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서를 비롯하여 특히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풍부한 묵시문학적 경향5)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들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가능성들은 미래의 왕국에 대한 記述과 다윗 왕조의 통치권 회복,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왕권이 실현되는 것에 관한 敍述을 통하여 시도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권,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의 성서문학과 신구약 중간시기에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정치를 종교의 한 부분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분명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에 의한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에 가져오실 분,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3.2.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의 메시아 대망(待望)사상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이방인인 로마의 가혹한 지배와 같은 민족이면서도 대사제들을 비롯한 유다지배자들의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착취를 받는 고통중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다의 모든 백성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6) 마치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것처럼, 유다인들도 다양하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7)은 모든 율법을 엄밀하게 준수-예를 들면,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행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였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불결한 것과 부정한 사람들-예를 들면, 세리와 죄인들-의 접촉을 피하였습니다.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었고, 메시아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그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과 규범을 지키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세네파 사람들8)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과 꿈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법 규범의 준수와 정화된 삶으로 그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시몬이 속해 있었던 혁명당원들9)은 무력을 써서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 나라의 돌입을 촉발시켜야 합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섬기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인구조사, 조세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한편 묵시문학의 작가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표들을 분별하고자 애쓰며, 이를 위해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때를 결정하기 위한 연대의 계산을 도모하였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떤 징조들이 일어나며, 그 때가 언제인가를 탐구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가복음 17,20-37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올 지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3.3. 종으로 오신 예수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원하던 해방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다림과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되었습니다.10)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율법에 어긋나는 죄인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11) 또한 예수님은 혁명당원의 생각과는 달리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를 몰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결코 유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거나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의미의 해방으로만 축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 강조하듯이 몇월 몇시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유다의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세상의 철저한 쇄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으로, 세상의 통치자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겨자씨와 같은(마태 13,31), 혹은 밀가루 반죽에 섞인 누룩(마태 13,33)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흘러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꼴찌가 되어 남을 섬겨야 합니다고 가르치셨으며, 이웃 사랑에 대한 모범으로써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더우기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죽음과 어둠과 죄를 이기시고 생명과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진정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가?


    대림 3주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짝 다가와 계십니다. 이제 한 주간만 지나면 예수님은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와 계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림이란 그저 뒷짐을 지고 수동적으로 서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릴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다립니다. TV나 소설을 보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첫 눈이 내리면 흔히들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첫 눈이 내릴 것을 기다리면서, 상대방이 좋아할 선물을 준비합니다든지, 상대방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할 준비를 합니다. 기다림이란 이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을 위해 무언가 준비를 하는 그런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에 손님이 오신다고 할 때 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온통 쓸고 닦으며 준비하는 그 기다림의 모습으로 우리는 이 대림 시기를 지내며 ‘오실 분’을 그렇게 적극적이며 역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그분은 진정 어떠한 모습의 예수님이십니까?

    그분은 나만을 위하는, 단순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분은 아주 약하고 힘없는 작은 아기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분이 어떻게…’하고 생각될 그러한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이사 55,8-9)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눈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보는 것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정의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분을 맞이합니다는 것은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과 자비와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 안에서 무한 가치로 평가하는 ‘일등’, ‘일류’의 경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내는 사랑과 관심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수단으로 평가하는 불의와 거짓의 가치에서 인간과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존중하는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가?’ 혹 ‘그저 시간이 흘러 맞이하게 되는 연례 행사처럼 대림절을 지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구원을 가져다 주신 예수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세상이 주는 명예와 재산을 더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분께 우리의 희망을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약한 우리의 심성은 쉽게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예수님을 성당에 모셔둔 채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가 오로지 기다려야 할 분이 아니라 악세사리처럼 되고 맙니다. 세례 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우리이기에 다른 무엇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당신께 의심을 품지 않고, 당신을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다시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예수님 보다는 ‘다른 무엇’을 기다리고픈 유혹이 우리 앞에 있기에, 특별히 성탄이 얼마남지 않은 지금, 기도와 희생으로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야 할 것입니다.



    5. 기다림의 비전, 그것은 희망 :

       이미 와 계신, 그러나 늘 새롭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기다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 기다림은 결코 지루하거나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희망은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내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이 있기에 기다림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잊어버릴 때 기다림은 소극적이 되고 급기야는 기다림에 동반되어야만 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미약함과 배반의 죄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또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해마다 때를 정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어디 특별한 곳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숨쉬며, 생활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그리고 절망을 넘어 희망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작고 미약하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선취(先取)하여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 오던 그 모든 것들이 예전과 같이 보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 3주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자선 주일로 제정하고, 이것의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리고 거짓과 부패한 세상에 정의와 진리의 빛을 전달함으로써, 우리가 기다리는 그 성탄의 기쁨을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에서 사랑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기쁨과 희망찬 설레임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 마침 기도


    기다림은 그분이 나를 안다는 그것으로 충분하기에 남들의 이해를 찾지 않으며, 왜? 라고 묻지 않고 일상의 모든 것을 감사로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천천히 돋아나는 싹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기다림은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께 나의 세계를 내어 드리는 것이기에 일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 둘줄 알게 합니다.

    기다림은 이웃의 필요에 눈뜨게 하고, 이웃의 모순을 탓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이는 관대함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나 자신과 이웃의 회심의 가능성을 믿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푸근한 안식처가 됨입니다.

    기다림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힘들 때에도 요구 없이, 대가 없이 관심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여유입니다.

    기다림은 불평하지 않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내 방식대로 따르길 원치 않으며,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앞에서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는 끝없는 용서입니다.

    기다림은 자신을 끊임없이 포기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며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기다림은 세상이 온갖 모순들에 대해 연민의 정으로 마음이 넓어져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그 옛날 시메온과 안나가 감격 속에 구원을 보았듯이 우리를 새로운 눈과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새롭게 탄생할 수 있게 하는 해방인 것입니다.

    이렇듯,

    조용히 자신을 태우며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장 여린 기도와 기다림 속에서 염원하는 죄스런 우리에게, 인간을 향한 다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몸소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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