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

 

1. 죄의 고통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




우리 민족은 어느 민족 못지 않게 수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침을 당했고, 특히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지난 날에는 일제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져, 그들의 폭정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고통스런 역사를 이스라엘 민족과 비교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또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고,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고통의 표지, 즉 정신적 고통의 표지를 지니고 있는 상황들을 소개하고 이런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 요소 또는 신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흔히 유기체 전체의 상태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1)


우선 그들의 고통은 하느님을 배반한 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은 엄청난 교만과 고의적인 불순명으로 하느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이 범죄에는 필연적으로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반항함으로써 하느님과 동등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수치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처벌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죽음과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새로운 왕국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왕국은 바로 악마, 죄, 죽음, 병고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왕국에서부터 구원되어야만 했습니다.2)


그래서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죄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희망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과정에서 악과 인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지가 약한 인간은 늘상 하느님을 잊고서 쉽게 죄에 빠져들게 되고, 그 안에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이런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시지는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울부짖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판관, 예언자, 왕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해방을 안겨 줄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시대를 치유와 재생의 시대로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뭄, 재산의 손실, 전쟁, 노예 생활, 유배 생활 같은 재앙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풀어주실 고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 마지막 선물이며, 최대의 선물이며, 완전한 구원을 주실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이루어진 놀라운 신비였습니다.






2.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2.1.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30)이라고 소개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서 “그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당신은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시오. 사실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을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한 식탁에 앉으시고 그들과 친분을 나누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말씀하시며 그를 치유해 주시고, 죄 많은 창녀를 용서해 주십니다(루가 7,36-50 참조).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음을 의미하며(마르 2,17 참조),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가 결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변혁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르치시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옛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인간 자신의 삶의 쇄신, 즉 회개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죄를 고발하십니다. 특히 계명을 규정대로 잘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3)




2.2.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 그리고 사탄의 왕국을 쳐 이기시어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에 관한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일치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우선적으로 우리는 “믿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이 단순한 한마디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인해 때때로 짜증을 내고 어떤 때에는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짜증을 잘 내고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 “나는 잘못도 없고, 문제도 없는데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물론 하나의 변명이기도 하지만 그럴 듯한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원인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을 단지 부정적으로만 바라봄으로써 항상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합니다면 우리는 그에 맞는 행동을 세상 안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위안에 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눈을 뜨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세상의 안락이 아니라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거쳐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로지 주님만을 향하는 믿음의 태도가 요구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구원된 것과 같이, 진정한 믿음을 우리가 지닌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안에서 우리들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으실 것입니다.      






3. 인간의 삶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들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또다른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 출세 등을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끝없는 욕심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마음을 꼭 휘어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도록 합시다. 어떤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살펴봅시다. 또 신문의 사회면을 남김없이 채우고도 남는 흉폭한 범죄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처럼 누구나 말은 안하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과, 그것으로 인해 잘못을 하고 죄를 짓고, 마음 아파하며 쓰러져 어둠 속에서 헤메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또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나를 지탱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힘이 있었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씨 아저씨는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영세를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안 살림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밤‧낮 없이 일해야 했고, 예비자 교리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일날 미사에 와서 맨 뒤에 앉아 있다가 미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는 일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소주잔이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갔으며 마침내 친구는 최씨 아저씨를 비난했습니다.


“자네가 성당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네. 자네가 성당을 간다고 해서, 자네 집안에 돈이 들어오나, 아니면 자네의 학벌이 달라지나?! 성당이 밥먹여주나!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더하는 게 낫지 않겠나?”


최씨 아저씨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다 맞네. 성당을 다닌다고 해서 나에게 돌아온 이익은 하나도 없지.  아니 오히려 일요일날 일을 하지 못하니 더 손해인 셈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네. 그건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야. 내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는, 매일 술에 취해 살던 내 모습이 변했다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리 부부의 싸움도 줄어들었고, 매일 징징거리던 아이들도 이제는 생글생글 웃는 날이 더 많다네. 그래! 내가 성당을 다니면서 자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겠지. 하지만 우리 가족이 화목하게 변화된 것을 우리 가족 모두가 잘 알고 있다네. 그건 바로 잘은 모르겠지만 하느님이란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일 거라네!”




위의 이야기처럼 하느님께서는 근본적인 인간의 모든 고통을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제거하기보다는 고통 속의 인간을 위로하시며, 눈물을 없애 주시지 않고 다만 눈물을 흘리는 과정 속에서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은 대답이 없는 질문이 됩니다. 사실상 “왜?”라는 것은 설명이나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지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4. 인간의 회개와 그리스도의 구원




예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죄의 상태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향합니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런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악에 의해 손상되고 깨어진 질서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죄와 악의 세력으로부터 온전히 회복시켜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고 인간 본연의 품위와 자유를 회복시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인간을 전인적으로 구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육체를 지닌 인간 전체의 구원입니다. 신체적,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이며 영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셨으며 병들고 아파하는 이의 신체적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신체적 장애자들을 온전한 몸으로 고쳐 주셨으며, 욕심 많은 자캐오를 회개시켜 자선을 베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심에 가득 찬 이들을 회개시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4)


예수님의 구원은 이렇듯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이며 인간을 참된 행복에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일시적이며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항구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하늘나라의 기쁨에 초대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하시고 하늘나라의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자기 중심적 생활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과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 불행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아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무 책임도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며 다시금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십니다.5)




이제 우리는 진정한 회개로써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시어, 우리와 같이 구체적인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인간 구원을 위한 말씀과 행적으로 가득 차신 분이십니다. 하늘 나라와 인간을 구원하시는 말씀들, 그리고 이 진리를 위해 수난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시어 새 생명으로 살아 계시어 우리 인간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임마누엘(Emmanuel)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역사와 시대의 중심이 되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에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분을 기다리며 희망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후회하고 반성하게 될 재물과 권세 그리고 명예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고통 속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주님이 오시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와 더불어 기쁜 마음으로 그 희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