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권 제 1장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가 속임수를 써서 예루살렘과 유대를 점령하고 거기서 많은 유대인을 데려다 애굽에 이주시킨 것에 대하여

 


 제 12 권  170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알렉산더대왕의 죽음부터 유다 마카비의 죽음까지



 제 1 장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가 속임수를 써서 예루살렘과 유대를 점령하고 거기서 많은 유대인을 데려다 애굽에 이주시킨 것에 대하여



1. 알렉산더 후계자들의 분쟁



  [㈜ 요세푸스의 헬라 역사의 자료에 관해서는 이 번역본 마지막 권에 나오는 부록에서 논의 된다.]



  앞서 말한 방법으로 바사 제국을 정복하고 유대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마게도냐(Macedon)의 왕 알렉산더는 사망하였다.[㈜ 주전 323년 6월 바벨론에서.] 그후에 그의 제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졌는데, 아시아는 안티고누스(Antigonus)가, 바벨론과 그 인접의 민족들은 셀류쿠스(Seleucus)가 지배하였으며,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헬레스폰트(Hellespont)를 통치하였고, 카산데르(Cassander)는 마게도냐를 장악하였으며, 라구스(Lagus)의 아들인 톨레미(Pto-lemy)는 애굽을 지배하였다.[㈜ 그는 알렉산더 사후 약 5개월간 다스린 마게도냐의 새 왕인 빌립 아리다이우스(Philip Arrhidaeus)가 애굽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주전 305년에 왕의 칭호를 받았다. 참). 베반(E. Bevan), \’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nasty\’ 1927. p. 18이하.] 그러나 이러한 여러 세력들이 각각 자신의 왕국을 위하여 서로 시기하고 분쟁한 결과 끊임없이 지루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 과정에서 도시들은 피폐되었고 많은 주민들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구원자(Soter)라고[㈜ 파우사니아스(pausanias) I. 8. 6에 보면 톨레미에게 이 이름을 붙인 것은 로디안이었다. 베반(E. Bevan)은 p.51에서 그가 주전 308-306년 사이에 \’구원자와 주\’란 칭호를 취했다고 한다.] 불리웠던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가 지배하던 수리아의 전지역은 그의 별명과는 정반대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톨레미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는 안식일에 제사드리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그가 어떠한 적대적인 행위를 할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입성을 막지 않았다.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안식하고 있을 때, 그들의 경계심의 부족과 안식일이란 속성을 이용하여 톨레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의 지배자가 되었고 도시를 잔인하게 통치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디아도키(Diadochi)의 역사가인 크니두스(Cnidus)의 아가다르키데스(Agatharchides)에 의해서도 증명되는데, 그는 우리가 미신을[㈜ 요세푸스가 desidaimoniva라는 단어를 그의 출처인 아가다르키데스(Agatharchides)보다 더 마음에 들어한다면<고대. 10권. (42)와 같이> \’종교적인 양심\’이 된다.] 믿고 있음을 질책하면서 우리가자유를 상실하게 된 이유를 다음의 글에서[㈜ 아가다르키데스에서 나온 긴 장황한 발췌문을 포함한 다음 진술은 아피. 1권.(205)이하에 나온다.]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견고하고 거대한 도시를 가진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장하여 싸울 것을 반대하고 그릇된 미신에 사로잡혀 가혹한 지배자인 톨레미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도록 하였다.\’ 이상은 아가다르키데스가 유리 민족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였다.

  톨레미는 유대의 구릉지역(hill country)과 예루살렘의 변방지역, 또한 사마리아와 그리심(Garizein)지역으로부터[㈜ 사마리아 성전이 있던 그리심산. 참). 고대. 11권. (310, 346).] 많은포로들을 잡아 모두 애굽으로 끌고가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 정보는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편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에 관해 고대. 12권.(11), 주 14를 보라, 그러나 알렉산더의 사신들에게 한 유대인들의 대답과 유대인의 시민권 주장에 관하여 쓴 다음 문장은 Aristeas에 나오지는 않는다. 톨레미 포로들의애굽 정착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것은 주전 312년에 있었던 톨레미와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Demetrius Poliorcetes)간에 있었던 가자(Gaza) 전(戰)이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를 전투에서 패배시킨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사신을 보냈었다. 그 때에 그는 유대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민족들은 서약과 맹세를 매우 충실하게 지킨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을 자신의 경비대로 임명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마게도냐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부여하였다.9)알렉산드리아 거주 유대인의시민권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양한 언급들의 사실성(事實性)은 이 역본의 마지막권에 있는 부록에서 논의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후계자들도 유대인들을 신뢰할 것이니 그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수의다른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애굽으로 가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애굽이라는 국가의 우수성과 톨레미의 관대함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아피. 1권. (186)이하에 나오는 압데라(Abdera)의 헤카타이우스(Hecataeus)가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자(Gaza) 전(戰) 후 많은 수리아 거주자들이 \’그의 친절함과 인간성을 듣고(th;n hjpiovthta kaiv filanq rwpvian), 애굽과 동행하기를 바랐고 그의 영토에 자신들이 연합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인 에제키아스(Ezechias)가 있었다\’라고 인용된다. 헤가타이우스에서 나온 이 인용문의 진정성은 (다른 사람들 중) 루이<H.Lewy, 참). 고대. 1권.(339)>와 올름스테드(A. Olmstead)에 의해 옹호된다. 올름스테드의 \’미국 동양연구 협회지\'(Journall of the Anerican Oriental Society)56권, 1936, p.244에서 \’이것이 에제키아스 만을 언급한다면 그 진정성은 부인될 것이다. 그러나 셀러스(Sellers) 교수는 벧 슬(Beth Zur)에서의 발굴로 인해 다시 동시대의 것인 또 하나의 증거를 주는데 히브리어로 여호하난(Jehohanan)과 히스기야(Hezekiah)의 이름이 새겨진 블레셋-아랍(Philisto-Arab) 동전이다<셀러스(O.R. Sellers) \’Citadel of Beth Zur\’ 1933, p.73이하>. 여호하난은 참된 대제사장으로 혼내(Honnai)이거나 오니아스(Onias) I 세이다. 히스기야 혹은 에제키아스는 제사장으로서 그의 재정 장관 이었는데 헬라어로는 디오이케테스(dioikhghv\”, 장관, 통치자)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그가 만들어낸 동전에 그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기대치 않았던 증거와 함께 헤카타이우스는 부득이 그의 진술을 받아들이는 그의 비평가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유대 병사들에게 약간 한정된 시민권을 주었던 톨레미 I 세에 잡혀 애굽으로 갔으며 병역을 조건으로하는 토지로된 땅들을 양도했다\’고 기록한다. 초기 헬라시대에 있어 애굽의 유대인 정착에 관한 상세한 논의에 대해 푹스(L. Fuchs) \’Die Juden Aegyptens\’ 1924 p.5이하와ㅏ 체리코워(A. Tscherikower)의 \’유대인과 헬라인\'(Jews and Greeks). 1930. p. 278이하를 보라. 문학에 관해서는 슈바르트(W.Schubart)의 \’Einfuhrung in die Papyruskunde\’, 1918, p.329이하를 보라.] 그러나 이들의 후손들은 조상대대로 갖고 있던 생활방식과 관습을 고수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만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제물을 보낼 것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심산(Garizein Mountain)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사마리아인들(Sch-echemites)은[㈜ 헬라어로 \’Sikemites\’. 세겜은 사마리아인들이 나중에 장악한 도시의 성경이름이었다. 참). 고대. 8권. (75).] 서로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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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제 12 권  170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알렉산더대왕의 죽음부터 유다 마카비의 죽음까지


     제 1 장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가 속임수를 써서 예루살렘과 유대를 점령하고 거기서 많은 유대인을 데려다 애굽에 이주시킨 것에 대하여


    1. 알렉산더 후계자들의 분쟁


      [㈜ 요세푸스의 헬라 역사의 자료에 관해서는 이 번역본 마지막 권에 나오는 부록에서 논의 된다.]


      앞서 말한 방법으로 바사 제국을 정복하고 유대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마게도냐(Macedon)의 왕 알렉산더는 사망하였다.[㈜ 주전 323년 6월 바벨론에서.] 그후에 그의 제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졌는데, 아시아는 안티고누스(Antigonus)가, 바벨론과 그 인접의 민족들은 셀류쿠스(Seleucus)가 지배하였으며,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헬레스폰트(Hellespont)를 통치하였고, 카산데르(Cassander)는 마게도냐를 장악하였으며, 라구스(Lagus)의 아들인 톨레미(Pto-lemy)는 애굽을 지배하였다.[㈜ 그는 알렉산더 사후 약 5개월간 다스린 마게도냐의 새 왕인 빌립 아리다이우스(Philip Arrhidaeus)가 애굽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주전 305년에 왕의 칭호를 받았다. 참). 베반(E. Bevan), ‘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nasty’ 1927. p. 18이하.] 그러나 이러한 여러 세력들이 각각 자신의 왕국을 위하여 서로 시기하고 분쟁한 결과 끊임없이 지루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 과정에서 도시들은 피폐되었고 많은 주민들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구원자(Soter)라고[㈜ 파우사니아스(pausanias) I. 8. 6에 보면 톨레미에게 이 이름을 붙인 것은 로디안이었다. 베반(E. Bevan)은 p.51에서 그가 주전 308-306년 사이에 ‘구원자와 주’란 칭호를 취했다고 한다.] 불리웠던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가 지배하던 수리아의 전지역은 그의 별명과는 정반대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톨레미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는 안식일에 제사드리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그가 어떠한 적대적인 행위를 할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입성을 막지 않았다.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안식하고 있을 때, 그들의 경계심의 부족과 안식일이란 속성을 이용하여 톨레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의 지배자가 되었고 도시를 잔인하게 통치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디아도키(Diadochi)의 역사가인 크니두스(Cnidus)의 아가다르키데스(Agatharchides)에 의해서도 증명되는데, 그는 우리가 미신을[㈜ 요세푸스가 desidaimoniva라는 단어를 그의 출처인 아가다르키데스(Agatharchides)보다 더 마음에 들어한다면<고대. 10권. (42)와 같이> ‘종교적인 양심’이 된다.] 믿고 있음을 질책하면서 우리가자유를 상실하게 된 이유를 다음의 글에서[㈜ 아가다르키데스에서 나온 긴 장황한 발췌문을 포함한 다음 진술은 아피. 1권.(205)이하에 나온다.]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견고하고 거대한 도시를 가진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장하여 싸울 것을 반대하고 그릇된 미신에 사로잡혀 가혹한 지배자인 톨레미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도록 하였다.’ 이상은 아가다르키데스가 유리 민족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였다.

      톨레미는 유대의 구릉지역(hill country)과 예루살렘의 변방지역, 또한 사마리아와 그리심(Garizein)지역으로부터[㈜ 사마리아 성전이 있던 그리심산. 참). 고대. 11권. (310, 346).] 많은포로들을 잡아 모두 애굽으로 끌고가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 정보는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편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에 관해 고대. 12권.(11), 주 14를 보라, 그러나 알렉산더의 사신들에게 한 유대인들의 대답과 유대인의 시민권 주장에 관하여 쓴 다음 문장은 Aristeas에 나오지는 않는다. 톨레미 포로들의애굽 정착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것은 주전 312년에 있었던 톨레미와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Demetrius Poliorcetes)간에 있었던 가자(Gaza) 전(戰)이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를 전투에서 패배시킨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사신을 보냈었다. 그 때에 그는 유대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민족들은 서약과 맹세를 매우 충실하게 지킨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을 자신의 경비대로 임명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마게도냐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부여하였다.9)알렉산드리아 거주 유대인의시민권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양한 언급들의 사실성(事實性)은 이 역본의 마지막권에 있는 부록에서 논의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후계자들도 유대인들을 신뢰할 것이니 그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수의다른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애굽으로 가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애굽이라는 국가의 우수성과 톨레미의 관대함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아피. 1권. (186)이하에 나오는 압데라(Abdera)의 헤카타이우스(Hecataeus)가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자(Gaza) 전(戰) 후 많은 수리아 거주자들이 ‘그의 친절함과 인간성을 듣고(th;n hjpiovthta kaiv filanq rwpvian), 애굽과 동행하기를 바랐고 그의 영토에 자신들이 연합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인 에제키아스(Ezechias)가 있었다’라고 인용된다. 헤가타이우스에서 나온 이 인용문의 진정성은 (다른 사람들 중) 루이와 올름스테드(A. Olmstead)에 의해 옹호된다. 올름스테드의 ‘미국 동양연구 협회지'(Journall of the Anerican Oriental Society)56권, 1936, p.244에서 ‘이것이 에제키아스 만을 언급한다면 그 진정성은 부인될 것이다. 그러나 셀러스(Sellers) 교수는 벧 슬(Beth Zur)에서의 발굴로 인해 다시 동시대의 것인 또 하나의 증거를 주는데 히브리어로 여호하난(Jehohanan)과 히스기야(Hezekiah)의 이름이 새겨진 블레셋-아랍(Philisto-Arab) 동전이다<셀러스(O.R. Sellers) 'Citadel of Beth Zur' 1933, p.73이하>. 여호하난은 참된 대제사장으로 혼내(Honnai)이거나 오니아스(Onias) I 세이다. 히스기야 혹은 에제키아스는 제사장으로서 그의 재정 장관 이었는데 헬라어로는 디오이케테스(dioikhghv”, 장관, 통치자)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그가 만들어낸 동전에 그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기대치 않았던 증거와 함께 헤카타이우스는 부득이 그의 진술을 받아들이는 그의 비평가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유대 병사들에게 약간 한정된 시민권을 주었던 톨레미 I 세에 잡혀 애굽으로 갔으며 병역을 조건으로하는 토지로된 땅들을 양도했다’고 기록한다. 초기 헬라시대에 있어 애굽의 유대인 정착에 관한 상세한 논의에 대해 푹스(L. Fuchs) ‘Die Juden Aegyptens’ 1924 p.5이하와ㅏ 체리코워(A. Tscherikower)의 ‘유대인과 헬라인'(Jews and Greeks). 1930. p. 278이하를 보라. 문학에 관해서는 슈바르트(W.Schubart)의 ‘Einfuhrung in die Papyruskunde’, 1918, p.329이하를 보라.] 그러나 이들의 후손들은 조상대대로 갖고 있던 생활방식과 관습을 고수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만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제물을 보낼 것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심산(Garizein Mountain)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사마리아인들(Sch-echemites)은[㈜ 헬라어로 ‘Sikemites’. 세겜은 사마리아인들이 나중에 장악한 도시의 성경이름이었다. 참). 고대. 8권. (75).] 서로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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