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아시아의 왕들이 세운 유대나라를 존경한 것과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도시의 시민으로 삼은 것에 대하여
1. 셀류쿠스 니카토르와 유대인
유대인들은 아시아의 왕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았다.[㈜ 본문은 특권에 대해서 초기 셀류키드(Seleucid) 통치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인정받아 왔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셀류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는[㈜ 수리아와 소아시아에 있는 셀류키드 왕조의 창설자로 주전 312년에서 281(280)년까지 통치했다.] 아시아와 하부 수리아(Lower Syria)의 여러 도시들과 수도 안디옥(Antioch)에서 유대인들에게 시민적 제(諸)권리를 부여하였으며, 이 도시들에 거주하고 있는 마게도냐인들이나 헬라인들과 동등한 특권이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시민의여러 권리는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기름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은 자국산 기름을 사용하기 위한 비용을 훈련대장(gymnasiarchs)에게서 받아야 된다고 그가 지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마지 못해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기름을 사옹한 것에 대해 자서. (74), 전쟁. 2권. (591)을 보라. 참). 로스토프체프(Rostovtzeff)가 \’CAH\’, vii. 178 이하에서 헬레스폰트(Hellespont, 고대헬라) 시의 헬라 비명(\’SEG\’ii. 663)에 관한 언급에서 안티오쿠스 Ⅲ세 시대로부터 \’도시의 체욱장(palaestrae)들의 필요에 따른 감람유의 얼마간을 국고에서 보조했다\’고 한다. 부록을 보라.] 그리고 안디옥 주민들이 이들의 이러한 특권을 취소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리아의 총독으로있던 무키아누스(Mucianus)는 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의 아들 티투스(Titus)가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학 해 달라고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로마인들, 특히 베스파시안과 티투스가 유대인들을 얼마나 공정하고 관대하게 다루었는가를 알 수 있다<참). 전쟁 7권. (110이하>.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바람에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안과 티투스는 이들로부터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제(諸)권리를 박탈하지 안항T다.실로[㈜ 다른 사본에는 \’그러나.\’] 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하였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고 유대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부터 베풀어 주었던 관대한 조치를 철회하고자 하는 유혹데 대하여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으며, 이들과 전쟁을 치른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알렉산드리와 안디옥 주민들에 대항하고 무장하여 전투를 벌인 유대인들은 이미 그벌을 받았소.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기존의 권리들을 박탈할 수는 없소.\’[㈜ 다른 사본에는 \’그르지 않은 일을 해온 사람들에게서 권리를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2. 마르쿠스 아그립바도 소아시아 지역에서의 유대인의 특권을 보장하다
우리는 이미 마르쿠스 아그립바(Marcus Agrppa)[㈜ 아구스도대제의 유명한 친구이자 양자임. 그는 주전 16-13년 사이에 아구스도의 부섭정으로 동방을 방문했다. 참). 고대16권. (12)이하. 최근에 라인홀드(M. Reinhold)에 의해 전기가 발간되었다(1933년).] 역시 유대인들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오니아인(Ionians)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흥분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들만이, 셀류쿠스의 손자이며 헬라인들이 데오스(Theos)라고[㈜ 그는 주전 262년부터 247년까지 다스렸다.] 부른 안티오쿠스(Antiochus)가 그들에게[㈜ \’그들\’은 라이나흐(Reinach)가 말한대로 헬라인인지 유대인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헤라인 자신을 의미하는 듯하다. 부록에 있는 토론을 보라.] 부여한 시민권을 누릴[㈜ 문자적으로는 \’나눠갖다\’.]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참). 고대.16권.(27)이하>. 그리고 만일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동족이[㈜ 문자적으로는 \’같은 가족\’.] 되려고 한다면, 이오니아인들의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고유한 관습을 지켜도 좋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이들을 후원하였던 사람은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sacus)였다.[㈜ 헬라 역사에 대한 요세푸스의자료에 관해 참). 고대. 1권.(94) 주 96과 이 역본 마지막권의 부록을 보라.] 유대인들이 승소한 이유는 아그립바 왕이 새로운 벌률을 제정하는 것은 적법한 것이 아니라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립바가 호의적인 결정을 한 원인은 고대. 16권. 2 ; 6(60)에 나오는 설명과 약간 다르다. 상기한 본문, 고대. 12권. 3 ; 2(125, 126)은 자코비(F.Jacoby)의 \’헬라 역사의 단편들\'(Die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 Pt, Ⅱ, A, 1926, p.379(단편 81)에서 언급한 니콜라스(Nicalas)의 \’역사서\'(History)의 단편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일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니콜라스의 저서인 「역사」의 제 123건과 124권을 읽어보라. 아그립바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민족들은 로마인들과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과 커다란 전쟁을 치른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관용을 베푼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의 조처는 가히 놀랄만하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즉 셀류키드 치하에서의 유대 역사의 기록에 관하여.] 그만두고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로 하겠다.
3. 안티오쿠스 대왕이 톨레미 왕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다
안티오쿠스 대왕이 아시아를 통치하던 시기는[㈜ 주전 223년에서 187년.] 수많은 유대인들이 토지의 황폐화로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지역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왕이 톨레미 필로파토르(Ptolemy Philopator)와 에피파네스(Epiphanes)라 불리우는 그의 아들 톨레미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대왕의 승패와 관계없이 그들은 모두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안티오쿠스대제와 톨레미 필로파토르의 군대는 주전 221년 레바논 근처에서 접전이 있었고, 주전 219년과 218년 사이에 다시 같은 곳과 데가볼리(Decapolis)의 도시들에서 싸웠다(폴리비우스 v. 45, 70이하). 주전 217년에 필로파토르는 가사(Gaza) 남서쪽으로 몇마일 안되는 팔레스틴의 해안 근처 라피아(Raphia)전에서 안티오쿠스를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이 패배로 인해 안티오쿠스는 \’레바논에 이르는 전 도시를 비워야 했다\'(베반(Bevan), \’톨레미 왕조하의 애굽 역사\'(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basty), 1927>. 필로파토르는 주전 203년에 죽었고 2년 후 그의 후계자인 톨레미 에피파네스(Ptolemy Epiphanes)는 안티오쿠스의 승리군에게 팔레스틴을 내주어야 했다. 참). 주 143.] 그러므로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거센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배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며, 안티오쿠스의 승리와 패배 사이에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는 톨레미를 제압하고 난 후 유대지방을 병합하였다.[㈜ 상기 본문에서 \’톨레미\’라는 것은 톨레미 필로파토르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필로파토르가 죽고(주전 203년), 톨레미 에피파네스가 등극한 후 안티오쿠스는 주전 201년과 198년 사이에 있었던 두 원정에서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장군인 아이톨리안 스코파스(Aetolian Scopas)를 물리쳤다. 그래서 결국 팔레스틴의 톨레미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안티오쿠스가 톨레미를 물리쳤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톨레미 필로파토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참). 베반(Bevan),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1902. 2권. 37 2n 6에서 \’코엘레 – 수리아는 라피아(Raphia)에 이르기까지 연속 안티오쿠스에 의해 두 번 점령당해야 했다. 이것은 톨레미 필로타토르가 죽기 전 안티오쿠스가 이곳을 정복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한 실제 사실이다. 스코파스가 셀류키드 점령지에 그 지역이 속해 있다는 것에서 나온 요세푸스의 성급한 추론디다.\’ 그러나 역자(Ralph Marcus)는 요세푸스가 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130)에서 그는 안티오쿠스의 승리에 대해서, 그리고 필로파토르와 에피파네스를 물리친 것에 대해 기록한다. 본문에서 \’톨레미\’라고 하는 것은 필로파토르가 아니라 에피파네스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다음 문장에서 de를 \’그리고\’ 나 \’그러나\’로가 아니라 전술한 문장을 설명하는 \’ 때문에\'(랙)로 번역해야 한다. 즉 이 문장은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에피파네스)를 물리친 후 유대를 병합시켰다. 그러므로 필로파토르가 죽자 그의 아들(에피파네스) 등등\’이 된다.] 필레파토르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은 사령관 스코파스(Scopas)와 함께 막강한 군대를 보내 코엘레 – 수리아의 주민들을 공격하여 그 지역의 많은 도시들과 유대인들을 정복하였다.[㈜ 이 정보는 폴리비우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참). (136).] 그러나 얼마 후에, 안티오쿠스가 요단강의 발원지[㈜ 파네이온(Paneion)이나 파네아스(Paneas). 신약 성경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이는 분봉왕 빌립 이후에 불린 이름이다. 현재는 바니아스(Banias). 참). 고대. 18권. (28), 전쟁. 2권. (168).] 부근의 전투에서 스코파스를 격퇴하고 그의 군대 대부분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후에 안티오쿠스는 스코파스가 점령하였던 코엘레 – 수리아의[㈜ 본문에서 코엘레 수리아는 데가볼리(Decapolis)이다. 참). 다음 본문(136), 고대. 11권. (25) 각주. 그러나 고대. 12권. (131)에서는 코엘레 수리아로 반복할 뿐이며 이 뜻은 레바논 남쪽에 있는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의미한다.] 도시들을 장악하였으며, 그때에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여 그의 입성을 허용하고 그의 군대와 코끼리들을 위해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또한 그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요새에 잔류해 있던 스코파스의 수비대를 포위공격할 때에도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참). (252).] 이에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열성과 노력에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안티오쿠스는총독들과[㈜ 혹은 \’장군들\’. 참). (138).] 친구들에게[㈜ 본문에 나오는 \’친구들\’은 전문적인 의미가 있다. 마게도냐 왕조(Macedonian Kingdoms) 때에는 군사귀족(military aristocracy)의 두 서열이 있었다(초기 바사시대와 같다). 즉(왕의) 친족 서열과(왕의) 친구들의 서열이다. 참).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cus), 1902, ii. 280이하.] 편지를 보내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환대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에 보답하기로 했다고 썼다. 따라서 필자는 유대인들에 대해 총독에게 보낸 편지들을 다음에서 인용할 것이며, 유선 메갈로폴리스의 폴리비우스(Polybius ofMegalopolis)가 필자의 이러한 설명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다른 곳에는 보존되어 있~지 않는) 폴리비우스(Polybius)에서 나온 다음의 발췌 내용은 라이나흐(Reinach)가 지적한대로 유대인에게 받은 도움에 관해 안티오쿠스가 감사를 표시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은 전혀 증명할 수 없다. 라이나흐는 요세푸스가 \’독자의 눈을 속이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ii, 297에는 \’그런 상황에서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에게 얼마간의 호의를 베풀어 왔으며 성전에 선물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가능한 일이다\’고 한다.] \’역사서\'(History) 제 16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톨레미 왕의 사령관 스코파스여! 고지대 지방으로[㈜ 북 팔레스틴을 의미한다.]출발하라! 그리고 겨울이 지나기 전에 유대국을 함락시키라!\’ 또한 같은 책에서 그는 \’안티오쿠스가 스코파스를 패배시킨 이후에 바타나이아(Batanaia),[㈜ 성경과 관련시킨다면 데가볼리(Decapolis)의 북동 지역인 바산(Bashan).] 사마리아, 아빌라(Abi-la)와[㈜ 아벨 – 벳 – 마아가(Abel-beth-maacah). 즉 레바논 남쪽에 있는 현재의 아빌(Abil)이나 아벨 – 싯딤(Abel-shittim), 즉 여리고 지역의 요단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되는 현재의 키르벳 – 엘 – 케프레인(Khirbet-el-keffrein)이 아니라 (참). 고대. 4권. (176)주), 북쪽을 흐르는 야르묵(Yarmuk)강 약간 서쪽에 있는 가다라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정도되는 곳을 의미한다.] 가다라(Gadara)를[㈜ 복음서에 잘 나오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 현재 무케스(Muk\’). 야르묵과 요단강의 합류 지점에서 서쪽으로 수마일되는 곳에 있다. 요세푸스의 후기 역사의 기록에 자주 언급된다(전쟁. 1권. 고대. 14권. – 16권).] 점령하였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에게 정복당했다.예루살렘 성전의 명성 등에 대해[㈜ 혹은 \’성전과 관련된 하느님의 임재에 관하여\’. ejpifavneia (나타남, 현현)는 이 두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문맥상 분명치 않다. Diod. Sic. xl. 3. 3에 나오는 Hecataeus를 참조하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다른 적당한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이 폴리비우스가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안티오쿠스 왕의 편지들을[㈜ 안티오쿠스가 썼다는 고대. 12권.(138-153)에 나오는 편지와 조서의 진정성에 대해서 부록에서 논의 된다.] 인용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다.
\’안티오쿠스 왕이 톨레미 왕에게[㈜ 드라세아스(Thraseas)의 아들 톨레미라고 추정된다. 그는 안티오쿠스 통치시에 코에렐 수리아와 베니게(Phoenicia)의 총독이었다. 참). 미쉘(Mishell), \’헬라비명집\'(Recueil d\’inscriptions grecques), 1900, No.1229 (P. 858) : 베반(Bevan)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ii, 297에서는 빌리히(Willich)가 폴리비우스 v, 65 : 3을 근거로 톨레미가 애굽에서 일했던 날을 고려하여 \’유대인과 헬라인\'(Juden und Griechen), p.40에서 \’톨레미가 218년에 총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케라이아스(Ceraeas)와 히폴로쿠스(Hippolochus)와 함께 218년에 셀류키드로 탈주했다는 것(폴리비우스, v. 70. 10)은 추정일 뿐이다. 그가 코엘레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빌리히는 그의 후기 작품, 즉 \’Urkundenfalschung in der herlenistisch-Judischen Literatur\’,(1924)에서 이 의의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인사드립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나라에 들어간 바로 그 후부터 유대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들을 접대해 주었으며,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는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 주었고, 그들의 의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 gerousiva는 문자적으로 \’장로들의 의회\’를 가리키는데 후대의 산헤드린과 관련된 유대 최고 입법기관이며 대제사장이 합석한 재판기관일 것이다. 마카비서에서는 이 의회의 구성인들은 주로 백성의 \’장로들\'(prevsbuteroi)로 불린다. 흩어진 유대인(Diaspora)들의 도시에 있는 유대인 gerousiva에 대해서 유익한 책인 J. B Frey의 \’Corpus Inscriptionum Iudicarum\’. 1권. 1936, p. 85이하와 부록을 보라.] 그리고 병사들과 코끼리에게 풍부한 식량을 주었고, 요새 안에 남아있는 애굽 수비대를 구축하는데 도와주었습니다.[㈜ 참). 주 291.] 이에 우리는 이러한 환대에 보답하고 전쟁으로[㈜ 다른 사본에는 \’사람들\’.] 말미암아 파괴된 도시들을 복구하여 주며,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와서 이 도시에 살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유대인들의 신앙심을 생각하여 은화[㈜ 드라크마를 의미한다.] 20,000개 상당의 제사지낼 동물과 포도]주, 향유, 유향 등을 보내고, 그들의 고유한 법에[㈜ 성전 도량형일 것이다. 뷔힐러(Buchler)와 라이나흐(Reinach)가 생각한 대로 아르타배(artabae)를 언급한 것은 그 편지의 \’애굽인 편집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톨레미 시대의 도량형은 셀류키드 정복 후까지도 계속 팔레스틴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ajrtavbh(아르타베)는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허용한 히브리 도량형이다(히브리어로 아르답). 이는 S. Krauss가\’Talmudische Archaologie\’, ii, 395에서 인용했다. Krauss는 톨레미 시대의 아르타바는 히브리의 호멜과 같다고 한다. ] 따라 절 좋은 밀가루와[㈜ 본문이 불확실함. 아프타바(Artaba)는 다양한 용량을 재는 애굽(원래는 바사)의 측정 단위이다. A. S. Hunt와 C. C. Edgar의 \’Select Papyri\'(Loeb 판 고대 문헌), I, 447d 의하면 40리터쯤 되는게 보통이다. F. Heickelheim의 \’Wirtschaftliche schwankungen der zeit von Alexander bis Augustus\’, 1930, p. 118이하에 보면 3세기에 애굽에서 밀 한 아르타바의 가격은 2드라크마 내지 5드라크마에 달했다(예외적인 해에는 2이하 5이상의 드라크마). ] 밀 1460메딤노이(medimnoi),[㈜ (아덴과 시실리의)메딤누스(Medimnus)는 약 50리터에 달한다. 146이란 숫자가 뷔휠러(Buchler)가 말한대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365×4) 애굽의 태양년을 전제했는지 매우 불확실하다.] 그리고 소금 375메딤니를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성전에 대한 이 황실의 호의는 고레스<고대. 11권.(62), 에스드라일서 4 : 52 이하>. 크세르크세스(Xerxes, 성경에는 아닥사스다, 고대. 11권. (127), 에스드라일서 8 : 19이하)가 행한 것들에 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 고레스는 밀 20,500아르타배를 주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한대로 이 물건들이 그들에게 잘 전달되고 성전 건축 작업이 현관공사와 기타 부대시설 등을 포함하여 완벽하게 끝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이에 필요한 목재들은 유대지방 뿐 아니라 레바논(Lebanon)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부터[㈜ 혹은 \’이방인들\’이나 \’외국인들\’.] 아무런 통행세도 부과하지 않고 공급될 것입니다. 성전을 보다 웅장하게 재건하는데 필요한 다른 물자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운반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 고유의 법에 따라 정부형태를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의원들과 제사장들, 성전의 율법학자들(scribes), [㈜ 성전의 서기관들은 고대. 11권. (128)(에스드라일서 8 : 22)에 언급된다.] 성가대원들은 모두 현재 그들이 지불하고 있는 인두세(poll-tax)와[㈜ 참). 부록. 168) 빌리히(H. Willrich)는 \’Urkundenfalschung\’ p.73에서 유대인들이 직접 셀류키드 왕에게 인두세나 다른 세금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셀류키드 시대의 조세 체제를 판단할 만한 지식이 없다. 또한 셀류키드 시대의 인두세는 후기 로마 시대의 다양한 인종이나 사업세를 포함한 도의 인도세(tributum capitis)와 같다고 추정된다. 차마). Arnold와 Bouchier, \’로마의도행정체제\'(The Roman System of Provincial Administration), 1914, 0.199이하. 셀류키드 왕조 시대의 인두세에 관해 Xchurer 1권. 229, 주 14를 보라. 또한 Bikerman의 \’Institutions des seleucides,\’ 1938, p.3과 Rostovtzeff의 \’HHW\’p.469, 471을 보라.] 왕관세(crown-tax), 염세(salt-tax)[㈜ 수정된 본문. 사본들은 \’다른 세금들\’.] 등을 면제받게 될 것이니다. 또한 빠른 시일내에 이 도시에 더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현재의 주민들과 휘페르베레타이오스(Hyperberetaios)월[㈜ 대략 10월. 고대. 히브리력으로는 해의 첫달인 티스리Tishri)달에 해당한다.] 이전에 돌아오는 사람 모두를 3년동안 각종 세금으로부터 기꺼이 면제해 줄 것입니다.[㈜ 이방인 통치자들이 유대인에게 호의를베풀어 세금을 면제해 준 예에 관하여 참). 고대. 11궈. (16)(에스드라일서 4 : 49-다리오) ; 12권. (15)(안티오쿠스 Ⅲ세) ; 13권. (52)(마카비일서 10 : 29-데메트리우스) ; 대헤롯도 최소 2번은 그랬다. 안티오쿠스 Ⅲ세가 헬라 도시에 세금을 면제해 준 실제적인 예에 관해 Rostovtzeff, \’CAH\’, vii, 179를 보라.] 앞으로는 유대인들이 유리에게 바치는 조공 중에서 1/3을 감면해 줄 것이며, 그럼으로써 조공으로 인한 그들의 손해는 상쇄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끌려와 현재 이곳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모두 해방될 것이며 그들의 재산도 모두 되돌려 줄 것입니다.\’
4.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대한 안티오쿠스 Ⅲ세의 법령
이상이 그 편지의 내용이다. 왕은 성전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서를 전국에[㈜ 이 조서가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까지도 \’전국에\’라는 본문의 구절은 후대의 첨가이거나 요세푸스의 과장이라고 인정한다.] 배포하였다. \’모든 외국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성전 울타리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법이미을 명심하라.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 고유의 법에 따라 몸을 정화시킨 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제외한다.[㈜ 이 금기에 대해 참0. 전쟁. 5권. 5 : 2(194) 각주, 5 : 6(227) ; 이와 유사한 랍비의 금기에 대해 미쉬나,\’Kelim\’, 1 : 8을 보라.] 어떠한 사람도 예루살렘 안으로 말이나 노새, 야생, 또는 가축으로 사육되는 당나귀, 표범, 여우, 토끼 등의 고기, 즉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모든 동물들의 고기를 반입하지 말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물들의 가죽을 갖고 들어오거나예루살렘 성안에서 기르는 것은 더욱 안된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도록 되어 있으나 어떤 목적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최소한 길들인 것)이나 예루살렘에 그 가죽들을 반입하는 것을 금한 증거는 없다. 이 이상한 금기에서 뷔힐러는 안티오쿠스의 조서가 원래는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에 내려졌던 것이라는 또다른 암시를 발견한다. 참). 부록] 다만, 유대인들의 조상 대대로 인정한 제사용 동물과 하느님께 제사드리기에필요한 동물난은 허용된다. 이 법중에서 한가지라도 위반하는사람은 은 3,000드라크마를 제사장에게 바쳐야 할 것이다.[㈜ 유대인이 종교에 관한 법을 위반함으로써 유대 공동사회나 유대 회당으 금고에서 지불해야하는 벌금에 관해 언급한 고대 유대인의 헬라 비문들이 많이 남아있다. 예) 스미르나(Smyrna), 톨로스(Tolos), 브루기아의 히에랴 폴리스(Hierapolis in Phrygia, 1,000데나리온), 마게도냐의 스토비(Stobi in Macedonia, 250,000데나리온).]\’ 왕은 또한 총독 지배하에 있는 북쪽 지방을 순시하고 있을 때,프리기아(Phrygia)와 루디아(Lydia)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소식을 듣고 유대인들의 신앙심과 충성심을 그의 글에서 밝히고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며 총독인 쥬시스(Zeuxis)에게[㈜ 이 사람은 주전 약 220년 경에 바벨론의 총독(혹은 통치자,strathgov\”)이었으며 (폴리비우스, v, 45이하), 또한 주전 201년 경에는 루디아의 총독이었다(폴리비우스, xvi, 1 : 8). 이 셋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죽시스가 주전 213년 후에 바벨론에서 루디아로 보내졌으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때는 아카이우스(A촘뎐)에 의해 장악된 소아시아의 도들을 안티오쿠스 Ⅲ세가 정복했었다.] 일부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프리기아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안티오쿠스 왕이 쥬시스와 그의 부친께[㈜ 셀류키드 왕이 그 부하에게 \’아버지\’라고 한 것에 대한 다른 예들이 고대. 13권. (127)<마카비일서 11 : 32에서 데메트리우스가 라스데네스(Lasthenes)에게 나온다. 참). 고대. 11권. (218)(외경 에스더 13 : 6에서 아닥사스다가 하만에게).] 문안드리오. 건강하다니 다행이오. 나 역시 매우 건강하오. 루디아와 브루기아(Phrygia)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이 매우 세심한주의를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소. 그래서 나의친구들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유대인2,000가구와 그들의 재산을 메소보다미아와 바벨론으로부터 브루기아와 루디아 등 매우 중요한 장소로 이주시키기로 결심하였소. 그들은 하느님께[㈜ 다른 사본에는 \’그들의 하느님\’. Holleaux는 이방인 통치자의 발언으로는 더 적당한 표현인 \’그 하느님\'(the Deity)으로 수정한다. 다른 사본의 원문을 받아들인다면 수정할 필요는 없다.] 대한 신앙심이 깊기 때문에 우리의재산을 충성스럽게 지켜주리라고 확신하오. 또한 나는 그들이 이미나의 선조들에게 충성심과 신앙심을 인정받아왔음을 잘 알고 있소. 그러므로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을 그곳에 이주시키고 내가 약속한 대로 그들 고유의 법을 지키도록 하시오.[㈜ 본문이 불확실함.] 당신은 유대인들을 앞서 말한 곳으로 이주시킨 후에 각 기구 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소와 경작할 토지, 작물 등을 심을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하고 10년 동안 토지로부터 나온 생산물에 대해 세금을 면제시켜 주도록 하시오.[㈜ 참). 고대. 12권. (143).] 또한 그들이 토지로부터 수확할 수 있을 때까지 식솔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곡식을 나누어 주고 공적인 업무에[㈜ toi\’\” eij\” tal\” crevia\” uJphretou\’sin 의 뜻이 약간 불확실함. 고대. 13권. (67)에 나오는 tai\’\” sai\’\” djxuphretei\’n creivai\”의 뜻은 \’당신(톨레미 필로메토르)에게 이익이 되도록\’.]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식량을 제공해 주시오. 이는 우리가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여 줌으로써 그들이 우리에게 더 열심히 충성할 것이기 때문이오. 또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유대인들을 배려해 줌으로써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이상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안티오쿠스대왕의 우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라이나흐는 우리의기억을 일깨운다. 즉 유대인들과 \’다른 야만인들\’만이 조서들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사인들과 마게도냐인들이 썼다는 친 유다적인 조서의 진정성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다는 것을 요세푸스 자신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고대. 14권. (187).]

제 3 장
아시아의 왕들이 세운 유대나라를 존경한 것과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도시의 시민으로 삼은 것에 대하여
1. 셀류쿠스 니카토르와 유대인
유대인들은 아시아의 왕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았다.[㈜ 본문은 특권에 대해서 초기 셀류키드(Seleucid) 통치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인정받아 왔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셀류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는[㈜ 수리아와 소아시아에 있는 셀류키드 왕조의 창설자로 주전 312년에서 281(280)년까지 통치했다.] 아시아와 하부 수리아(Lower Syria)의 여러 도시들과 수도 안디옥(Antioch)에서 유대인들에게 시민적 제(諸)권리를 부여하였으며, 이 도시들에 거주하고 있는 마게도냐인들이나 헬라인들과 동등한 특권이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시민의여러 권리는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기름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은 자국산 기름을 사용하기 위한 비용을 훈련대장(gymnasiarchs)에게서 받아야 된다고 그가 지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마지 못해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기름을 사옹한 것에 대해 자서. (74), 전쟁. 2권. (591)을 보라. 참). 로스토프체프(Rostovtzeff)가 ‘CAH’, vii. 178 이하에서 헬레스폰트(Hellespont, 고대헬라) 시의 헬라 비명(‘SEG’ii. 663)에 관한 언급에서 안티오쿠스 Ⅲ세 시대로부터 ‘도시의 체욱장(palaestrae)들의 필요에 따른 감람유의 얼마간을 국고에서 보조했다’고 한다. 부록을 보라.] 그리고 안디옥 주민들이 이들의 이러한 특권을 취소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리아의 총독으로있던 무키아누스(Mucianus)는 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의 아들 티투스(Titus)가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학 해 달라고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로마인들, 특히 베스파시안과 티투스가 유대인들을 얼마나 공정하고 관대하게 다루었는가를 알 수 있다<참). 전쟁 7권. (110이하>.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바람에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안과 티투스는 이들로부터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제(諸)권리를 박탈하지 안항T다.실로[㈜ 다른 사본에는 ‘그러나.’] 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하였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고 유대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부터 베풀어 주었던 관대한 조치를 철회하고자 하는 유혹데 대하여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주민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으며, 이들과 전쟁을 치른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알렉산드리와 안디옥 주민들에 대항하고 무장하여 전투를 벌인 유대인들은 이미 그벌을 받았소.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기존의 권리들을 박탈할 수는 없소.’[㈜ 다른 사본에는 ‘그르지 않은 일을 해온 사람들에게서 권리를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2. 마르쿠스 아그립바도 소아시아 지역에서의 유대인의 특권을 보장하다
우리는 이미 마르쿠스 아그립바(Marcus Agrppa)[㈜ 아구스도대제의 유명한 친구이자 양자임. 그는 주전 16-13년 사이에 아구스도의 부섭정으로 동방을 방문했다. 참). 고대16권. (12)이하. 최근에 라인홀드(M. Reinhold)에 의해 전기가 발간되었다(1933년).] 역시 유대인들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오니아인(Ionians)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흥분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들만이, 셀류쿠스의 손자이며 헬라인들이 데오스(Theos)라고[㈜ 그는 주전 262년부터 247년까지 다스렸다.] 부른 안티오쿠스(Antiochus)가 그들에게[㈜ ‘그들’은 라이나흐(Reinach)가 말한대로 헬라인인지 유대인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헤라인 자신을 의미하는 듯하다. 부록에 있는 토론을 보라.] 부여한 시민권을 누릴[㈜ 문자적으로는 ‘나눠갖다’.]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참). 고대.16권.(27)이하>. 그리고 만일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동족이[㈜ 문자적으로는 ‘같은 가족’.] 되려고 한다면, 이오니아인들의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고유한 관습을 지켜도 좋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이들을 후원하였던 사람은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sacus)였다.[㈜ 헬라 역사에 대한 요세푸스의자료에 관해 참). 고대. 1권.(94) 주 96과 이 역본 마지막권의 부록을 보라.] 유대인들이 승소한 이유는 아그립바 왕이 새로운 벌률을 제정하는 것은 적법한 것이 아니라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립바가 호의적인 결정을 한 원인은 고대. 16권. 2 ; 6(60)에 나오는 설명과 약간 다르다. 상기한 본문, 고대. 12권. 3 ; 2(125, 126)은 자코비(F.Jacoby)의 ‘헬라 역사의 단편들'(Die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 Pt, Ⅱ, A, 1926, p.379(단편 81)에서 언급한 니콜라스(Nicalas)의 ‘역사서'(History)의 단편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일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니콜라스의 저서인 「역사」의 제 123건과 124권을 읽어보라. 아그립바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민족들은 로마인들과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과 커다란 전쟁을 치른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관용을 베푼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의 조처는 가히 놀랄만하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즉 셀류키드 치하에서의 유대 역사의 기록에 관하여.] 그만두고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로 하겠다.
3. 안티오쿠스 대왕이 톨레미 왕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다
안티오쿠스 대왕이 아시아를 통치하던 시기는[㈜ 주전 223년에서 187년.] 수많은 유대인들이 토지의 황폐화로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지역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왕이 톨레미 필로파토르(Ptolemy Philopator)와 에피파네스(Epiphanes)라 불리우는 그의 아들 톨레미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대왕의 승패와 관계없이 그들은 모두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안티오쿠스대제와 톨레미 필로파토르의 군대는 주전 221년 레바논 근처에서 접전이 있었고, 주전 219년과 218년 사이에 다시 같은 곳과 데가볼리(Decapolis)의 도시들에서 싸웠다(폴리비우스 v. 45, 70이하). 주전 217년에 필로파토르는 가사(Gaza) 남서쪽으로 몇마일 안되는 팔레스틴의 해안 근처 라피아(Raphia)전에서 안티오쿠스를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이 패배로 인해 안티오쿠스는 ‘레바논에 이르는 전 도시를 비워야 했다'(베반(Bevan), ‘톨레미 왕조하의 애굽 역사'(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basty), 1927>. 필로파토르는 주전 203년에 죽었고 2년 후 그의 후계자인 톨레미 에피파네스(Ptolemy Epiphanes)는 안티오쿠스의 승리군에게 팔레스틴을 내주어야 했다. 참). 주 143.] 그러므로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거센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배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며, 안티오쿠스의 승리와 패배 사이에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는 톨레미를 제압하고 난 후 유대지방을 병합하였다.[㈜ 상기 본문에서 ‘톨레미’라는 것은 톨레미 필로파토르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필로파토르가 죽고(주전 203년), 톨레미 에피파네스가 등극한 후 안티오쿠스는 주전 201년과 198년 사이에 있었던 두 원정에서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장군인 아이톨리안 스코파스(Aetolian Scopas)를 물리쳤다. 그래서 결국 팔레스틴의 톨레미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안티오쿠스가 톨레미를 물리쳤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톨레미 필로파토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참). 베반(Bevan),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1902. 2권. 37 2n 6에서 ‘코엘레 – 수리아는 라피아(Raphia)에 이르기까지 연속 안티오쿠스에 의해 두 번 점령당해야 했다. 이것은 톨레미 필로타토르가 죽기 전 안티오쿠스가 이곳을 정복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한 실제 사실이다. 스코파스가 셀류키드 점령지에 그 지역이 속해 있다는 것에서 나온 요세푸스의 성급한 추론디다.’ 그러나 역자(Ralph Marcus)는 요세푸스가 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130)에서 그는 안티오쿠스의 승리에 대해서, 그리고 필로파토르와 에피파네스를 물리친 것에 대해 기록한다. 본문에서 ‘톨레미’라고 하는 것은 필로파토르가 아니라 에피파네스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다음 문장에서 de를 ‘그리고’ 나 ‘그러나’로가 아니라 전술한 문장을 설명하는 ‘ 때문에'(랙)로 번역해야 한다. 즉 이 문장은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에피파네스)를 물리친 후 유대를 병합시켰다. 그러므로 필로파토르가 죽자 그의 아들(에피파네스) 등등’이 된다.] 필레파토르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은 사령관 스코파스(Scopas)와 함께 막강한 군대를 보내 코엘레 – 수리아의 주민들을 공격하여 그 지역의 많은 도시들과 유대인들을 정복하였다.[㈜ 이 정보는 폴리비우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참). (136).] 그러나 얼마 후에, 안티오쿠스가 요단강의 발원지[㈜ 파네이온(Paneion)이나 파네아스(Paneas). 신약 성경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이는 분봉왕 빌립 이후에 불린 이름이다. 현재는 바니아스(Banias). 참). 고대. 18권. (28), 전쟁. 2권. (168).] 부근의 전투에서 스코파스를 격퇴하고 그의 군대 대부분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후에 안티오쿠스는 스코파스가 점령하였던 코엘레 – 수리아의[㈜ 본문에서 코엘레 수리아는 데가볼리(Decapolis)이다. 참). 다음 본문(136), 고대. 11권. (25) 각주. 그러나 고대. 12권. (131)에서는 코엘레 수리아로 반복할 뿐이며 이 뜻은 레바논 남쪽에 있는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의미한다.] 도시들을 장악하였으며, 그때에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여 그의 입성을 허용하고 그의 군대와 코끼리들을 위해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또한 그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요새에 잔류해 있던 스코파스의 수비대를 포위공격할 때에도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참). (252).] 이에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열성과 노력에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안티오쿠스는총독들과[㈜ 혹은 ‘장군들’. 참). (138).] 친구들에게[㈜ 본문에 나오는 ‘친구들’은 전문적인 의미가 있다. 마게도냐 왕조(Macedonian Kingdoms) 때에는 군사귀족(military aristocracy)의 두 서열이 있었다(초기 바사시대와 같다). 즉(왕의) 친족 서열과(왕의) 친구들의 서열이다. 참).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cus), 1902, ii. 280이하.] 편지를 보내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환대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에 보답하기로 했다고 썼다. 따라서 필자는 유대인들에 대해 총독에게 보낸 편지들을 다음에서 인용할 것이며, 유선 메갈로폴리스의 폴리비우스(Polybius ofMegalopolis)가 필자의 이러한 설명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다른 곳에는 보존되어 있~지 않는) 폴리비우스(Polybius)에서 나온 다음의 발췌 내용은 라이나흐(Reinach)가 지적한대로 유대인에게 받은 도움에 관해 안티오쿠스가 감사를 표시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은 전혀 증명할 수 없다. 라이나흐는 요세푸스가 ‘독자의 눈을 속이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ii, 297에는 ‘그런 상황에서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에게 얼마간의 호의를 베풀어 왔으며 성전에 선물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가능한 일이다’고 한다.] ‘역사서'(History) 제 16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톨레미 왕의 사령관 스코파스여! 고지대 지방으로[㈜ 북 팔레스틴을 의미한다.]출발하라! 그리고 겨울이 지나기 전에 유대국을 함락시키라!’ 또한 같은 책에서 그는 ‘안티오쿠스가 스코파스를 패배시킨 이후에 바타나이아(Batanaia),[㈜ 성경과 관련시킨다면 데가볼리(Decapolis)의 북동 지역인 바산(Bashan).] 사마리아, 아빌라(Abi-la)와[㈜ 아벨 – 벳 – 마아가(Abel-beth-maacah). 즉 레바논 남쪽에 있는 현재의 아빌(Abil)이나 아벨 – 싯딤(Abel-shittim), 즉 여리고 지역의 요단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되는 현재의 키르벳 – 엘 – 케프레인(Khirbet-el-keffrein)이 아니라 (참). 고대. 4권. (176)주), 북쪽을 흐르는 야르묵(Yarmuk)강 약간 서쪽에 있는 가다라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정도되는 곳을 의미한다.] 가다라(Gadara)를[㈜ 복음서에 잘 나오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 현재 무케스(Muk’). 야르묵과 요단강의 합류 지점에서 서쪽으로 수마일되는 곳에 있다. 요세푸스의 후기 역사의 기록에 자주 언급된다(전쟁. 1권. 고대. 14권. – 16권).] 점령하였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에게 정복당했다.예루살렘 성전의 명성 등에 대해[㈜ 혹은 ‘성전과 관련된 하느님의 임재에 관하여’. ejpifavneia (나타남, 현현)는 이 두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문맥상 분명치 않다. Diod. Sic. xl. 3. 3에 나오는 Hecataeus를 참조하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다른 적당한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이 폴리비우스가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안티오쿠스 왕의 편지들을[㈜ 안티오쿠스가 썼다는 고대. 12권.(138-153)에 나오는 편지와 조서의 진정성에 대해서 부록에서 논의 된다.] 인용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다.
‘안티오쿠스 왕이 톨레미 왕에게[㈜ 드라세아스(Thraseas)의 아들 톨레미라고 추정된다. 그는 안티오쿠스 통치시에 코에렐 수리아와 베니게(Phoenicia)의 총독이었다. 참). 미쉘(Mishell), ‘헬라비명집'(Recueil d’inscriptions grecques), 1900, No.1229 (P. 858) : 베반(Bevan)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s), ii, 297에서는 빌리히(Willich)가 폴리비우스 v, 65 : 3을 근거로 톨레미가 애굽에서 일했던 날을 고려하여 ‘유대인과 헬라인'(Juden und Griechen), p.40에서 ‘톨레미가 218년에 총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케라이아스(Ceraeas)와 히폴로쿠스(Hippolochus)와 함께 218년에 셀류키드로 탈주했다는 것(폴리비우스, v. 70. 10)은 추정일 뿐이다. 그가 코엘레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빌리히는 그의 후기 작품, 즉 ‘Urkundenfalschung in der herlenistisch-Judischen Literatur’,(1924)에서 이 의의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인사드립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나라에 들어간 바로 그 후부터 유대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들을 접대해 주었으며,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는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 주었고, 그들의 의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 gerousiva는 문자적으로 ‘장로들의 의회’를 가리키는데 후대의 산헤드린과 관련된 유대 최고 입법기관이며 대제사장이 합석한 재판기관일 것이다. 마카비서에서는 이 의회의 구성인들은 주로 백성의 ‘장로들'(prevsbuteroi)로 불린다. 흩어진 유대인(Diaspora)들의 도시에 있는 유대인 gerousiva에 대해서 유익한 책인 J. B Frey의 ‘Corpus Inscriptionum Iudicarum’. 1권. 1936, p. 85이하와 부록을 보라.] 그리고 병사들과 코끼리에게 풍부한 식량을 주었고, 요새 안에 남아있는 애굽 수비대를 구축하는데 도와주었습니다.[㈜ 참). 주 291.] 이에 우리는 이러한 환대에 보답하고 전쟁으로[㈜ 다른 사본에는 ‘사람들’.] 말미암아 파괴된 도시들을 복구하여 주며,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와서 이 도시에 살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유대인들의 신앙심을 생각하여 은화[㈜ 드라크마를 의미한다.] 20,000개 상당의 제사지낼 동물과 포도]주, 향유, 유향 등을 보내고, 그들의 고유한 법에[㈜ 성전 도량형일 것이다. 뷔힐러(Buchler)와 라이나흐(Reinach)가 생각한 대로 아르타배(artabae)를 언급한 것은 그 편지의 ‘애굽인 편집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톨레미 시대의 도량형은 셀류키드 정복 후까지도 계속 팔레스틴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ajrtavbh(아르타베)는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허용한 히브리 도량형이다(히브리어로 아르답). 이는 S. Krauss가’Talmudische Archaologie’, ii, 395에서 인용했다. Krauss는 톨레미 시대의 아르타바는 히브리의 호멜과 같다고 한다. ] 따라 절 좋은 밀가루와[㈜ 본문이 불확실함. 아프타바(Artaba)는 다양한 용량을 재는 애굽(원래는 바사)의 측정 단위이다. A. S. Hunt와 C. C. Edgar의 ‘Select Papyri'(Loeb 판 고대 문헌), I, 447d 의하면 40리터쯤 되는게 보통이다. F. Heickelheim의 ‘Wirtschaftliche schwankungen der zeit von Alexander bis Augustus’, 1930, p. 118이하에 보면 3세기에 애굽에서 밀 한 아르타바의 가격은 2드라크마 내지 5드라크마에 달했다(예외적인 해에는 2이하 5이상의 드라크마). ] 밀 1460메딤노이(medimnoi),[㈜ (아덴과 시실리의)메딤누스(Medimnus)는 약 50리터에 달한다. 146이란 숫자가 뷔휠러(Buchler)가 말한대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365×4) 애굽의 태양년을 전제했는지 매우 불확실하다.] 그리고 소금 375메딤니를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성전에 대한 이 황실의 호의는 고레스<고대. 11권.(62), 에스드라일서 4 : 52 이하>. 크세르크세스(Xerxes, 성경에는 아닥사스다, 고대. 11권. (127), 에스드라일서 8 : 19이하)가 행한 것들에 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 고레스는 밀 20,500아르타배를 주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한대로 이 물건들이 그들에게 잘 전달되고 성전 건축 작업이 현관공사와 기타 부대시설 등을 포함하여 완벽하게 끝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이에 필요한 목재들은 유대지방 뿐 아니라 레바논(Lebanon)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부터[㈜ 혹은 ‘이방인들’이나 ‘외국인들’.] 아무런 통행세도 부과하지 않고 공급될 것입니다. 성전을 보다 웅장하게 재건하는데 필요한 다른 물자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운반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 고유의 법에 따라 정부형태를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의원들과 제사장들, 성전의 율법학자들(scribes), [㈜ 성전의 서기관들은 고대. 11권. (128)(에스드라일서 8 : 22)에 언급된다.] 성가대원들은 모두 현재 그들이 지불하고 있는 인두세(poll-tax)와[㈜ 참). 부록. 168) 빌리히(H. Willrich)는 ‘Urkundenfalschung’ p.73에서 유대인들이 직접 셀류키드 왕에게 인두세나 다른 세금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셀류키드 시대의 조세 체제를 판단할 만한 지식이 없다. 또한 셀류키드 시대의 인두세는 후기 로마 시대의 다양한 인종이나 사업세를 포함한 도의 인도세(tributum capitis)와 같다고 추정된다. 차마). Arnold와 Bouchier, ‘로마의도행정체제'(The Roman System of Provincial Administration), 1914, 0.199이하. 셀류키드 왕조 시대의 인두세에 관해 Xchurer 1권. 229, 주 14를 보라. 또한 Bikerman의 ‘Institutions des seleucides,’ 1938, p.3과 Rostovtzeff의 ‘HHW’p.469, 471을 보라.] 왕관세(crown-tax), 염세(salt-tax)[㈜ 수정된 본문. 사본들은 ‘다른 세금들’.] 등을 면제받게 될 것이니다. 또한 빠른 시일내에 이 도시에 더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현재의 주민들과 휘페르베레타이오스(Hyperberetaios)월[㈜ 대략 10월. 고대. 히브리력으로는 해의 첫달인 티스리Tishri)달에 해당한다.] 이전에 돌아오는 사람 모두를 3년동안 각종 세금으로부터 기꺼이 면제해 줄 것입니다.[㈜ 이방인 통치자들이 유대인에게 호의를베풀어 세금을 면제해 준 예에 관하여 참). 고대. 11궈. (16)(에스드라일서 4 : 49-다리오) ; 12권. (15)(안티오쿠스 Ⅲ세) ; 13권. (52)(마카비일서 10 : 29-데메트리우스) ; 대헤롯도 최소 2번은 그랬다. 안티오쿠스 Ⅲ세가 헬라 도시에 세금을 면제해 준 실제적인 예에 관해 Rostovtzeff, ‘CAH’, vii, 179를 보라.] 앞으로는 유대인들이 유리에게 바치는 조공 중에서 1/3을 감면해 줄 것이며, 그럼으로써 조공으로 인한 그들의 손해는 상쇄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끌려와 현재 이곳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모두 해방될 것이며 그들의 재산도 모두 되돌려 줄 것입니다.’
4.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대한 안티오쿠스 Ⅲ세의 법령
이상이 그 편지의 내용이다. 왕은 성전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서를 전국에[㈜ 이 조서가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까지도 ‘전국에’라는 본문의 구절은 후대의 첨가이거나 요세푸스의 과장이라고 인정한다.] 배포하였다. ‘모든 외국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성전 울타리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법이미을 명심하라.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 고유의 법에 따라 몸을 정화시킨 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제외한다.[㈜ 이 금기에 대해 참0. 전쟁. 5권. 5 : 2(194) 각주, 5 : 6(227) ; 이와 유사한 랍비의 금기에 대해 미쉬나,’Kelim’, 1 : 8을 보라.] 어떠한 사람도 예루살렘 안으로 말이나 노새, 야생, 또는 가축으로 사육되는 당나귀, 표범, 여우, 토끼 등의 고기, 즉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모든 동물들의 고기를 반입하지 말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물들의 가죽을 갖고 들어오거나예루살렘 성안에서 기르는 것은 더욱 안된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도록 되어 있으나 어떤 목적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최소한 길들인 것)이나 예루살렘에 그 가죽들을 반입하는 것을 금한 증거는 없다. 이 이상한 금기에서 뷔힐러는 안티오쿠스의 조서가 원래는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에 내려졌던 것이라는 또다른 암시를 발견한다. 참). 부록] 다만, 유대인들의 조상 대대로 인정한 제사용 동물과 하느님께 제사드리기에필요한 동물난은 허용된다. 이 법중에서 한가지라도 위반하는사람은 은 3,000드라크마를 제사장에게 바쳐야 할 것이다.[㈜ 유대인이 종교에 관한 법을 위반함으로써 유대 공동사회나 유대 회당으 금고에서 지불해야하는 벌금에 관해 언급한 고대 유대인의 헬라 비문들이 많이 남아있다. 예) 스미르나(Smyrna), 톨로스(Tolos), 브루기아의 히에랴 폴리스(Hierapolis in Phrygia, 1,000데나리온), 마게도냐의 스토비(Stobi in Macedonia, 250,000데나리온).]‘ 왕은 또한 총독 지배하에 있는 북쪽 지방을 순시하고 있을 때,프리기아(Phrygia)와 루디아(Lydia)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소식을 듣고 유대인들의 신앙심과 충성심을 그의 글에서 밝히고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며 총독인 쥬시스(Zeuxis)에게[㈜ 이 사람은 주전 약 220년 경에 바벨론의 총독(혹은 통치자,strathgov”)이었으며 (폴리비우스, v, 45이하), 또한 주전 201년 경에는 루디아의 총독이었다(폴리비우스, xvi, 1 : 8). 이 셋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죽시스가 주전 213년 후에 바벨론에서 루디아로 보내졌으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때는 아카이우스(A촘뎐)에 의해 장악된 소아시아의 도들을 안티오쿠스 Ⅲ세가 정복했었다.] 일부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프리기아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안티오쿠스 왕이 쥬시스와 그의 부친께[㈜ 셀류키드 왕이 그 부하에게 ‘아버지’라고 한 것에 대한 다른 예들이 고대. 13권. (127)<마카비일서 11 : 32에서 데메트리우스가 라스데네스(Lasthenes)에게 나온다. 참). 고대. 11권. (218)(외경 에스더 13 : 6에서 아닥사스다가 하만에게).] 문안드리오. 건강하다니 다행이오. 나 역시 매우 건강하오. 루디아와 브루기아(Phrygia)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이 매우 세심한주의를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소. 그래서 나의친구들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유대인2,000가구와 그들의 재산을 메소보다미아와 바벨론으로부터 브루기아와 루디아 등 매우 중요한 장소로 이주시키기로 결심하였소. 그들은 하느님께[㈜ 다른 사본에는 ‘그들의 하느님’. Holleaux는 이방인 통치자의 발언으로는 더 적당한 표현인 ‘그 하느님'(the Deity)으로 수정한다. 다른 사본의 원문을 받아들인다면 수정할 필요는 없다.] 대한 신앙심이 깊기 때문에 우리의재산을 충성스럽게 지켜주리라고 확신하오. 또한 나는 그들이 이미나의 선조들에게 충성심과 신앙심을 인정받아왔음을 잘 알고 있소. 그러므로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을 그곳에 이주시키고 내가 약속한 대로 그들 고유의 법을 지키도록 하시오.[㈜ 본문이 불확실함.] 당신은 유대인들을 앞서 말한 곳으로 이주시킨 후에 각 기구 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소와 경작할 토지, 작물 등을 심을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하고 10년 동안 토지로부터 나온 생산물에 대해 세금을 면제시켜 주도록 하시오.[㈜ 참). 고대. 12권. (143).] 또한 그들이 토지로부터 수확할 수 있을 때까지 식솔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곡식을 나누어 주고 공적인 업무에[㈜ toi'” eij” tal” crevia” uJphretou’sin 의 뜻이 약간 불확실함. 고대. 13권. (67)에 나오는 tai'” sai'” djxuphretei’n creivai”의 뜻은 ‘당신(톨레미 필로메토르)에게 이익이 되도록’.]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식량을 제공해 주시오. 이는 우리가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여 줌으로써 그들이 우리에게 더 열심히 충성할 것이기 때문이오. 또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유대인들을 배려해 줌으로써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이상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안티오쿠스대왕의 우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라이나흐는 우리의기억을 일깨운다. 즉 유대인들과 ‘다른 야만인들’만이 조서들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사인들과 마게도냐인들이 썼다는 친 유다적인 조서의 진정성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다는 것을 요세푸스 자신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고대. 14권.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