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권 제 4장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와 동맹을 맺은 것과, 오니아스가톨레미 유에르게테스를 화나게 한 것, 요셉이 모든 일을 정상화시키고 그와 다시 우정을 갖게 된 것과 요셉과 그의 아들 힐카누스의 치적에 대하여

 


제 4 장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와 동맹을 맺은 것과, 오니아스가톨레미 유에르게테스를 화나게 한 것, 요셉이 모든 일을 정상화시키고 그와 다시 우정을 갖게 된 것과 요셉과 그의 아들 힐카누스의 치적에 대하여



  1. 톨레미 에피파네스와 대제사장 오니아스



이 일이 있고 난 후 안티오쿠스는 톨레미와183) 고대. 12권. (154-236)에 이르는 긴 본문은 토비아드, 요세푸스, 힐카누스에 관한 것인데 어떤 원자료들, 즉 어떤 것은 신뢰할 만하며 어떤 것은 거짓된 것이 분명하므로 많은 학자들의 토론의 주제가 된다. 연대기적인 문제와 기타 다양한 문제들이 부록의 인용된 작품에서 다뤄진다. [㈜ 톨레미 에피파네스, 그는 주전 204(3)년에서 181년까지 재위했다.]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그와 혼인시켰다.[㈜ 그 결혼은 주전 193년 경에 이뤄졌다. 이는 그 먼저 즉 196년 경이라고 이제까지 알려져 왔었다. 참).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us), 2권. 57, Holleaux의 \’CAH\’, viii. 199.] 그는 딸의 지참금 명목으로 코엘레 수리아 지방과[㈜ 본문에서 코엘레 수리아는 데가볼리(Decaoplis)나 더 넓게는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이다. 참). 고대. 11권. (25), 12권. (133) ; 베반 \’셀류쿠스 왕실\’ 2권. 297에서는 갈릴리(의문과 함께)라고 한다.] 사마리아,유대,[㈜ 한 사본에서는 이두매.] 베니게(Phoenicia)[㈜ 이 선물에 관해서는 몇몇 고대 자료들에서 언급된다. 폴리비우스 xxviii, 20. 0 :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주장한 바의 동의가 이뤄졌다. 톨레미가 클레오파트라 -현(애굽) 통치자의 어머니-와 결혼의 지참금으로 코엘레 수리아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톨레미와 그의(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아버지 사이에 최근에 이뤄진 것이다라고 한다.\’ 참). 아피안(Appian)의 \’Syr.\’ 5에서는 \’로마와 전쟁을 하려는 마당에 그는 (안티오쿠스 Ⅲ세) 결혼 동맹으로써  인근 왕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수리아인으로 불리는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를 결혼 시키면서 선물로 코엘레 수리아를 주어서 애굽의 톨레미에게 보낸다. 그곳은 톨레미에게서 그 자신이 장악했던 곳이다\’ ; 또한 유세비우스(Eusebius) \’연대기\'(Chronicon)에서 Porphyry는 수리아, 사마리아, 유다에 관해 언급하며, 제롬(Jerome)은 다니엘 11 : 17절의 논급에서 코엘레 수리아의 모든 것을 언급한다. 셀류키드 왕조가 전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통치하였고 후에 안티오쿠스가 주전 200년에서 198년에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물리쳤던<참). 주 143, 144>것을 짐작하여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158)에 나오는 톨레미가 에피파네스라면(주 195) 톨레미 에피파네스에게 할당된 코엘레 수리아의 세금은 전혀 거둬지지 않았다. 또한 이것은 이전에 그곳이 셀류키드 정복지였음에도 톨레미가 실제로 팔레스틴과 트랜스요르단 전체나 혹은 부분적으로 통치했었다는 요세푸스(혹은 그의 자료)를 따르는 것이다. 부록에 인용된 \’duard Cuq의 작품을 보라.] 지역을 톨레미에게 주었다. 이들 지역으로부터 오는 조공을 두 군주가 나누어 갖게 되자[㈜ Holleaux가 \’REF\’39권 1899, 0.161이하에서 확신있게 보여주는 것과 같이 톨레미와 안티오쿠스 Ⅲ세 사이가 아니라 톨레미 에피파네스와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이다 우리는 토비아드 요셉(Tobiad Joshep)이 한 농담의 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178). Momigliano의 이의에 대해서 부록에 인용된 그의 논문을 보라.] 세력가들(prominent men)을 각 지역으로부터의[㈜ 문자적으로 \’마을들\’. 팔레스틴과 트랜스요르단의 소읍들이다.] 세금징수권을부여받아 일정량의 세금을 거두어 안티오쿠스와 톨레미 왕에게바쳤다. 당시 번성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헬라어로는 \’사마리아인들\’. 참). 고대. 9권. (61) 각주.] 유대인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그들을 노예로 끌고감으로써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Buchler는 \’Tobiaden\’ p.88에서, 본문에서 요세푸스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한사마리아인\'(a samaritan)으로 나와있다고 한다.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톨레미군이 주전 218년 유다의친 셀류키드파를 공격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오니아스(Onias)가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엘르아살이 죽자 그의 삼촌인 므낫세(Manasses)가 대제사장직을 승계하였으며 므낫게가 죽은후 시몬(Simon)의 아들이며 의인(the Just)이라 불리우는 오니아스가 대제사장이 되었다.[㈜ 본문의 대제사장에 관해 부록을 보라.] 필자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몬은 엘르아살의 동생이었다.[㈜ 고대. 12권. (44).] 오니아스는 매우 소심하고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세입의 일부 중에서 조상 대대로 왕에게 바쳐온 은 20달란트의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이로 말미암아 그는 톨레미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톨레미 왕은 오니아스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경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만일 그가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지않는다면 유대인들의 토지를 병합하고 군대를 보내 그 곳에 주둔시킬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왕의 말을 듣고 당황하였으나, 오니아스는 어떠한 위협에도 조금도 동요되지않았다. 그만큼 그는 매우 탐욕스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2. 요셉 토비아드와 그의 삼촌 오니아스 Ⅱ세



  예루살렘에 요셉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고상한 성품과 선견지명을 갖춘 까닭에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의롭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195) 즉 톨레미 에피파네스. 다른 본문에는 \’톨레미\’다음에 필로파토르의 아버지였던 유에르게테스(Euergetes)를 첨가한다. 이 점은 부록에서 논의된다. 다른 본문은 라이나흐가 결정적으로 \’어리석은 주석\’이라고 불렀듯이 불필요한 것인 반면,요세푸스 본문에 대한 첨가는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속국으로서 코엘레 수리아를 표현하는데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 같다. 그곳은 결국 주전 198년에 셀루키드가 정복한다. 요세푸스가 이미 위에서 유에르게테스의 재위(주전 246-221)를 말했고 에피파네스와 그와 동시대인 안티오쿠스 Ⅲ세를 언급했듯이(131이하), 토비아드 요셉은 유에르게테스가 아닌 에피파네스(참). 위의 주 188)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다른 본문에 나오는 유에르게테스는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223)에서 요셉은 22년동안 세금 징수원을 한 후 주전 187년 셀류쿠스 Ⅳ세의 등극 즈음해서 죽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최소 주전 209년에 그의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즉 톨레미 에피파네스 등극 수년 전이 된다. 또한 그는 주전 187년 쯤 공직에서 물러난 듯하다.. 이것은 그의 공무 기간의 시작을 유에르게테스 재위의 끝인 주전 221년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고로 본문에 나타나는 가필(加筆, interpolation)은 요세푸스가 사용한 토비아드 자료의 모순을 아는 어떤 사람의 작품이다.[㈜ 다른 본문에는 \’그의 품위와, 정의를 돌보는 것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토비아스(Tobias)였으며 [㈜  혹은 \’토비아드\’, 즉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토비아(tobiah)의 후손.] 어머니는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누이였다. 그가 고향인 피콜라(Phichola)에[㈜ 異文에는 피콜라(Phicola). 장소는 불분명하지만 토비아드족이 원래 암몬인이었으므로 트랜스요르단에 있다고 추정된다. 참). 주 253.] 낙향해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왕의 사신이 찾아왔음을 알려주자 그는 사신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오니아스를 비난하였다. 그는 오니아스가 백성들의 안전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대신 수장권(chiefmagistracy)과[㈜ 본문의 prostasivan은 단순히 th\’\” ajrcieratikh\’\” timh\’\”의 동의어인지 아니면 시의 관직(civil office) (참). Preisigke의 \’Fachworter\’. p. 152)을 가리키는 분명하고 전문적인 용어인지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이에 관해 부록에 인용된 작품을 보라. 다음 구절과 외부의 본문들은 전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참) Diodor. Sic. xl. 4에서의.  헤카타이우스의 본문. 초기 헬라 시기에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최고 치안관(Chief magistrate)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85)에서는 마타디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다(Judas)가 prostasivan tw\’n pragmavtwn을 계승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  반역자들의 제일의 권력이나 지도력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셀류키드 왕조하에서) 시의 관직을 의미하는 전문적 용어가 아니다. 요셉이 후에(167) prostsivan을 맡았다는 것과 그래서 오니아스에게서 공식적인 역할을 박탈했다는 것등은 뷔흘러(Buchler)나 최근에 모미글리아노(Momigliano)와 프루인(Fruin)이 주장하듯이, 전혀 충분한 근거가 없다. 프로스타테스(prostath\”), 신의 수호자) 시몬과 대제사장 오니아스 사이의 아고라노미아(ajgoranomiva, 성직 : 마카비 2서 3: 4) 싸움과 관련된 문제가 같은 문제로 부상한다. 이에 관해 부록에 나오는 작품을 보라.]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계속해서 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결국 국가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은 온갖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오니아스에게 왕을 방문하여 조공의 전부 또는 그 일부를 면제하여 줄 것을 간청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자신은 대제사장직을 고수하고 싶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이 직분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오니아스가 프로스타테스(prostathv\”)의 자리가 아닌 대제사장의 직분을 내놓는 것을 보라.] 왕을 찾아가지[㈜ 문자적으로는 \’올라가다\’, 즉 놓은 권력으로. 유대 자료들은 거의 항상 팔레스틴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와같이 이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요셉은 그에게 국가를 위하여 톨레미 왕에게[㈜ 다른 본문에는 \’톨레미 유에르게테스\’. 참). (158).] 자신을 사신으로[㈜ 이 표현은 본문이 톨레미 왕조하에서 대제사장과 시의 통치자 사이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다른 표현인 것 같다.]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오니아스가 이를 허락하자 요셉은 성전으로 올라가 백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삼촌 오니아스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해서결코 동요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고 마음을 편하게 갖고불길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신의 자격으로 왕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은 결코 어떠한 옳지 않은 행동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였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고 요셉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요셉은 다시 성전에서 내려와 톨레미가 보낸 사신을 정중하게 맞아 들였다. 갓비싼 선물을 주고 여러날 동안의 호화스런 대접을 한 후에, 요셉은 사신에게 자신도 따라 가겠노라고 말하고 그를 왕에게로 돌려보냈다. 사신이 그를 격려하고 애굽을 방문해 줄 것을부탁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톨레미 왕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자, 요셉은 더욱더 왕을 만나고자 하였다. 사신이 이와 같이 약속한 것은 요셉의 공평무사함과[㈜ 혹은 \’순진함\’.] 고상한 성격에 크게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3. 요셉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채비를 갖추다



  사신은 애굽으로 돌아가 왕에게 오니아스의 오만한 행위를 보고하는 한편, 요셉이란 인물의 훌륭한 성품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요셉이 왕을 찾아와 유대인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즉 본문이 표현한대로 그들의 대변인이나 사신 <참). 주 199>만을 의미한다. 그가 백성들에 의해 정식으로 시의 최고위직에 뽑혔다면 요세푸스 자료가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여하튼 왕 자신은 그를 그만큼 인정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해 줄 것을 간청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요셉을 계속해서 칭찬하자, 왕과 왕후 클레오파트라는[㈜ 이 사건이 그의 아내가 아르시노에였던 톨레미 필로파토르의 재위싱 일어난 일이라고믿는(이유 없이는 아님) 학자들은 주전 1 \’ 2세기에 있었던 요세푸스의 근거 문서들이 에피파네스의 아내 후에 몇몇 톨레미 왕녀들이 가졌던 클레오파트라란 이름에 더 정통하다고 생각하므로 아르시노에 클레오파트라라고 부르는 실수로 자연적으로 흘러간다(물론 요세푸스 자신이 클레오파트라로 아르시노에를 대신하지 않는다면). 참). 부록. Livy는 xxvii. 4 : 10에서 유사한 실수를 한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요셉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요셉은 그의 친구들을 사마리아로[㈜ (암몬인) 토비아드가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우정은 느헤미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 고대. 11권. 174(느 4: 3).] 보내 돈을 빌려오도록 한 후에, 의복,음료수병, 짐싣는 동물 등과 같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다. 그가 준비한 장비들은 약 20,000드라크마[㈜ 전체 내용과 배경이 매우 역사적이라 하더라도 요셉과 힐카누스 이야기 중에 자유롭게 언급된 본문에서와 또한 유사한 총액들은 이야기의 성격상 허위성이 강하다.] 정도였으며이와 같이 준비한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요셉이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수리아와 베니게의 각 도시들의 유력인사들과 행정장관들이 왕이 매년 각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곤 했던 세금징수권(tax-farmingright)을 입찰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가는 때와 일치되었다.[㈜ 참). Rostovtzeff의 \’CAH\’ 7 : 129이하에서 \’납세 징수 정부인들은 지방 사람들이었지만 세금은 지방에서 매긴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매겨졌다. 이것은 제노의 편지들(특히\’P. Cairo Zen.\’59037)에 나오는 여러 문서들이 입증한다.\’ 톨레미 시대에 애굽의 조세 체제는 C. Preaux의 \’L Economie royale des Lagides\’, 1939, pp. 61-435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도중에 요셉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요셉의 가난하고 초라한 행색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요셉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톨레미 왕이 멤피스(Me-mphis)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곧 멤피스로 가서 왕을 만났다.[㈜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왕은 왕후와 친구 아데니온(Athenion)과 함께전차(戰車)에 앉아 있었는데, 아데니온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을때, 말씀드린 바 있던 그 훌륭하고 공평무사한[㈜ 혹은 \’야망이 있는\’.] 젊은이라고 왕에게 소개하였다. 이에 왕은 요셉에게 인사를 청하고[㈜ 즉 \’요셉이 인사하기 전에\’. 참). 고대. 11권. 331, 알렉산더대제가 유대의 대제사장 야두아(Jaddua)에게 비슷한 예우를 함.] 자신의 전차로 올라오라고 말하였다. 요셉이 좌석에 앉자, 왕은 오니아스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었다. 이에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나이를 보아 그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44, 157)에 보면 오니아스는 요세푸스가 톨레미 필라델푸스와 동시대인으로 만든 의인 시몬의 아들이다. 그의 삼촌엘르아살이 필라델푸스 재위시 얼마간 시몬을 계승했을 때 아이였었다. 그러면 오니아스는 이 당시에 최소 70살이었어야 한다. 이것은 톨레미 에피파네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한때(154)인 주전 193(192)년 후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가 의인 시몬을 너무 이른 주전 3세기 사람으로 만든 실수를 하고 있다할지라도 그는 최소한 이 당시에 오니아스를 노인으로 하는데는 일관성이 있다. 참). 부록.] 폐하께서는 노인과 유아들의 지적 수준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저희들이 아무런 실수 없이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치겠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재치와 매력에 끌려 톨레미는 마치 그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요셉을 왕궁의 숙소로 데려가, 매일 자신의 식탁에서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왕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수리아의 유력인사들은 요셉이 왕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한 감정을 품었다.



 4. 요셉이 무리하게 세금 액수를 높이다



  각 도시에서의 세금징수권을 매입하는 날이 되자, 여러 지역에서[㈜ 참). 주 190.] 온 유력인사들은 입찰을 실시하였다. 코엘레 수리아와[㈜ 트랜스요르단인 것으로 추정됨. 참). (154) 각주 186, (224).] 베니게, 유대지방과 사마리아로부터의 세금 합계가 8,000달란트[㈜ 우리가 보아왔던 세금에 비추어서 너무 많은 총액인 것이 분명하다. 참). Buche-Leclercq, 3 : 401. 제롬은 톨레미 필라델푸스 시대에 애굽 자체만의 세금이 14,800달란트라고 한다. 헤로도투스 3 :91에서는 다리우스가 베니게, 팔레스틴, 구브로에서 걷은 세금이 350달란트라고 한다. 키케로는 톨레미 아울레테스(Ptolemy Auletes)의 총 세금을 12, 500달란트라고 말한다. 참). 마바비이서 4 : 8 이하.]에 이르자, 요셉은 앞으로 나아가 입찰자들이 낮은 세금액수를 왕에게 제시하기로 담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그두배를 주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 일을 반대하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들의 재산은 왕의 재산에 예속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당시 입찰에서는 세금징수권과 함께 이와 같은 권한도 매매되엇던[㈜ 異文은 \’그가(왕이)팔았던.\’]것이다. 요셉의 말을 듣고 왕은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요셉이 나의 세입을 증가시켜 줄 사람 같으니 나는그에게 세금징수권을 팔기로 하였노라.\’ 그리고는 요셉에게 보증을 서 줄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요셉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전혀 불신할 수 없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인물을 보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왕이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요셉은 \’폐하여! 폐하 자신과 왕후를 나의 보증인으로 추천하고자 합니다. 폐하야말로 확실한 보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익살에 관해 Holleaux가 처음으로 만족하게 설명했다. 참). (155) 주 189.] 이에 톨레미는 크게 웃고 그에게 아무런 보증인도없이 세금징수권을 부여하였다. 왕의 이와 같은 조치에 각 도시에서 애굽으로 갔던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으로 실망한 마음을 안고 돌아갔다.



5. 요셉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세금징수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다.



  요셉은 각 도시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왕에게 도움을 청하여 2,000명의[㈜ 다른 사본에는 1,000니이제(Niese)가 말한대로 마병의 수는 원래 기록되어 있었지만 우연히 본문에서 빠졌다.] 보병을 지원받은후, 알렉산드리아의 왕의 친구들로부터 500달란트를[㈜ 참). 주 208.] 빌려 수리아로 떠났다. 그는 아스글론(Ascalon)에 도착하여 주민들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에게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모욕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요셉은 주동자급[㈜ 다른 사본에는 \’그들의 유력인사들\’.] 중에서 약 20여명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1,000달란트에 달하는 그들의 전 재산을 왕에게 보내면서 사건의 전모를 보고하였다. 톨레미는 요셉의 이러한 투철한 사명의식과 현명한 조치를 치하하면서 소신껏 일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수리아인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경악을금치 못하였으며, 아스글론인들에 대한 학살이 명령에 불복종한 결과의 한  예(例)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요셉을 맞아들이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스구도볼리(Schthopo-lis)의[㈜ 참). 고대. 5권. (83) 주 58.] 주민들 역시 요셉을 모욕하고, 자신들이 전에 바쳤던조공을 거부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으나, 요셉은 아스글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동자급들을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국고에 귀속시켰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징수하고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상당한이익을 본 후에, 요셉은 자신의 부(富)를 , 그가 지금 갖고 있는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력을 이용하여 자신에게행운을 가져다 준 권력기반을 보존하는데 전념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은밀하게 왕과 왕후 클레오파트라, 왕의 친구들과 궁중의 세력가들에게 많은 선물을 바쳐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6. 요셉이 아들 힐카누스를 얻게 된 경위



  요셉은 이러한 행운을 20여년간 누렸으며, 한 아내에게서 일곱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형 솔리미우스(Solymius)의 딸과 결혼하여 힐카누스(Hyrcanus)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형의 딸과 결혼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전에 그는 그의 형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의 형은 딸을 유대인의 귀족층과 혼인시키기 위하여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갔다.요셉이 왕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무희가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그는 곧 이 여인에게 반해 버렸다.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형에게 말하고 유대인들이 이방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죄를 감추어주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요셉의 형은 기꺼이 도와 주겠노라고 대답한 후에 자신의 딸을 아름답게 치장하여 밤에 요셉과 함께 동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형의 딸과 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일이 여러번 계속되자, 요셉은 형의 딸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형에게 왕이 아마 자신이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것이므로 이 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그러나 그의 형 솔리미우스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하는 여인과 계속 관계를 갖고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요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요셉이 부도덕하게 보이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딸이 그 멍에를 대신 지게 되는 경위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이에 요셉은 형 솔리미우스의 우애를 치하한 후에,그의 딸과 혼인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힐카누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참) (186).] 힐카누스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타고난 용맹성과 총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형제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Sillrich는 \’JG\’ p.93이하에서 젊은 힐카누스의 이런 묘사는 \’대담하고 조숙한 지성적 존재\’에 대해 칭찬하는 유대인의 한 예를 보여준다. 또한 그를 젊은 사무엘, 젊은 다윗, 젊은 다니엘, 역사가 요세푸스 자신과 비교한다 <참). 자서. (7) 이하.> 그 설명에 더 나아가서 그는 더 오래된 성경의 주제를 추적한다. 즉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기만이나 요셉 형제들의 시기, 바로가 요셉에게 보여준 호의 같은 것들이다. 동시에 그는 토비아드 이야기와 마카비서에 나오는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에 관계된 이야기 사이의 병행 부분들을 추적한다. 그는 \’토비아드 이야기에 나오는 요셉은 실제로 마카비이서에 나오는 메넬라우스이다. 반면 힐카누스는 야손을 마음대로 개작(Umgestaltung)한 것이다\’라고 한다. 물론 토비아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허구임을 의심할 바 없지만 역사적 자료가 발견되기도 한다.] 요셉은 그의 아들 중에서 누가 가장 덕성을 갖춘 인물인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아들들을 차례로 유명한 스승에게 보냈다. 힐카누스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모두 게으르고 학업에 싫증을 느끼는 어리석고 무식한 인물로 되돌아왔다. 그 후에 요셉은 막내아들 힐카투스를 이틀 가야 할 거리 정도 떨어진 광야로 보내 300쌍의 황소를 주어 밭을 갈도록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멍에줄(yoke-straps)은 감추고 주지 않았다. 멍에줄이 없이 광야에 도착한 힐카누스는 사람 몇 명을 되돌려 보내 멍에줄을 갖고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몰이꾼들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경험많은 사람처럼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10쌍의 황소를 잡아 고기는 인부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가죽을 잘라 멍에를 고정시킬수 있는 끈을 만들었다. 힐카누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셉이 경작하라고 한 밭을 일군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요셉은 그의 총명함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민첩한 두뇌회전과 그 대담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요셉이 힐카누스만을 자신의 친자식인 것처럼 사랑하였으므로 다른 형제들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7. 힐카누스가 톨레미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다



  이 무렵 요셉은 톨레미왕이 아들을[㈜ 톨레미 에피파테스의 장남인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는 주전 187(186)년에 태어났다. 그의 차남이 sxhffpal 유에르게테스 Ⅱ세(Physcoh)는 주전 185년 이후 언젠가에 태어났다. 참). 베반의 \’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naty\’, 1927, pp.282-285.] 낳아 수리아의 모든 유력인사들과 식민지의 백성들이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갈 수 없어서 대신 그의 아들 중에서 누굴 왕에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고대. 12권. 4 : 2(160)에서 요세푸스는 요세이 톨레미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약 주전 193년) 코엘레 수리아의 세금 징수원이 되었을때 \’여전히 젊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톨레미가 아들을 낳았을 때 요셉이 \’그의 나이 때문에 가지 못했다\’거나 외국에 나갈 정도로 나이가 든 아들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요셉이 톨레미 에피파네스 재위시에 활동을 시작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인해 야기된 몇 명 난해한 부분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형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모임에 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고대 사본(부록에 인용된  작품들)에 보존딘 이전의토비아드와 톨레미 필라델푸스와의 서신 교환을 언급할 수 있다. 그것은 암몬인 우두머리가 왕에게 말할 때에까지도 얼마나 거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양하였다.대신 막내동생 힐카누스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요셉에게 진언하였다.이들의 말을 기쁘게 듣고 요셉은 힐카누스를 불러 왕에게 갈 수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이에 힐카누스는 자신은 검소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서,10,000드라크마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요셉은 그의검소함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힐카누스는 요셉에게 왕에게 드릴 선물을 이곳에서[㈜ 예루살렘. 참). 고대. 12권. 4 :9(222).] 가져 갈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집사에게 편지를 보내자 아름답고 정성이 깃든 선물을 살 만큼의 돈을 준비하도록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요셉은 그의 제안을 칭찬하고 왕에게 바칠 선물비용으로 10달란트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3,000달란트[㈜ 고대. 12권. 4: 4(176). 요셉(Joseph)은 코엘레수리아(Coele-Syria)지역을 조세 징수 도급권을 따내기 위해 톨레미에게 9,000달란트의 두배인 16,000달란트를 지불하였다. 여기에서 3,000달란트는 명백히 수년 동안의 그의 수익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그리 심각하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토비아드 이야기(Tobiad story)중 이 부분은 대부분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상되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아리온((Arion)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셉은 수리아에서 거두어 들인돈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내곤 했으므로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날이 다가오면, 종종 아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조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힐카누스는 아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들고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가 출발하자 그의 형제들은 왕의 모든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힐카누스를 죽여야 한다고 모함하였다.



8. 힐카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버지의 집사를 벌하다



  힐카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아리온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리온은 그에게 몇 다란트가 필요하는냐고 물었다.그는 힐카누스가 10달란트나 그보다 조금 많은 액수를 요구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힐카누스가 1,000달란트가 필요하다고 하자, 아리온은 화를 내면서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힐카누스에게 그의 아버지가 고된 일과 욕망을 억제해 가면서 재산을 축적한 과정을 말해 주면서 아버지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또한 왕에게 바칠 선물비용으로 10달란트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힐카누스는 분노하여 아리온을 감옥게 집어 넣었다. 아리온의 아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힐카누스를 꾸짖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리온의 아내는 그의 남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일을 왕에게 고하였다. 이에 톨레미 왕은 힐카누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그를 보낸 이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사를 투옥시켰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고 말하였다. 왕은 힐카누스에게 자신 앞에 나아와 그의 행위를 해명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힐카누스는 왕이 보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대 나라에는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 제사지내기 전에는 먼저 생일을 축하하는 일을 금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gennhqevnta,\’태어난 아이\’ 혹은 \’사내 아이\’에 대해 허워든(Herwerden)의 수정, geneqliavxonta, 즉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두 번째 견해를 수용할 수는 없다. 그 견해를 따르면 \’그의(그 아이의) 아버지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라고 읽어야 한다. 힐카누스(Hyrcanus)는, 톨레미가 유대인들의 율법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방신전 안에서 제사드리고 있는 이교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게 하였다는 것을 믿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제가 왕을 찾아 뵙지 않고, 제부친의 은인이셨던 왕께 드릴 선물을 갖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저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징벌한 것입니다. 주인이 보잘것 없는 사람이든, 위대한 사람이든 간에 모두 저와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폐하도 폐하의 백성들로부터 모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톨레미 왕은 이 말을 듣고 파안대소하며 힐카누스의 총명함을 칭찬하였다.



 9. 힐카누스가 경쟁자들로부터 조롱받다



  아리온은 왕의 의중을 파악하였으며 자신을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힐카누스에게 1,000달란트를 주고 풀려 나왔다. 3일이 지난 후, 힐카누스는 톨레미왕 부부에게 문안드리기위해 올라갔다. 그들은 그를 기쁘게 맞이하였으며,  그의 부친을 생각하여 마치 친구처럼 대접하였다. 힐카누스는 몰래 노예상인들에게 다가가서 잘 교육받은 젊은 소년 노예 100명과 처녀 100명을 1달란트씩 주고 샀다. 한번은 그가 그 나라의 유력인사들과 함께 왕의 식사에 초대받게 되었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서열에 따라 좌석이 배정되었기 때문에 식탁의 제일 끝에 앉게 되었다. 힐카누스와 함께 식탁에 않아있던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은 고기뼈를 힐카누스 앞에 쌓아 놓았다. 그리하여 그의 식탁이 뼈로 가득 덮히자, 재담가이자 주연(酒宴)에서 남 웃기기 잘하는 트리폰(Tryphon)이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권유로 왕앞에 서서 말하였다. \’폐하! 힐카누스 앞에 쌓인 뼈들이 보이십니까\’ 폐하가 보고 계신 것처럼 고의 아버지는 마치 힐카누스가 뼈만 앙상하게 남겨놓은 것처럼 수리아를 착취해 갔습니다.\’ 왕은 트리폰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힐카누스에게 왜 앞에  뼈가 그렇게 많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힐카누스는 대답하기를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 개들은 고기와 함께 뼈까지도 몽땅 먹어 치웁니다. 마치 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식탁을 가리키면서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그러나 사람은 고기만 먹고 뼈는 버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인 제 앞에는 이렇게 많은 뼈가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에 왕은 다시 한번 그의 재치있는 대답에 탄복하면서 좌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갈채를 보낼 것을 명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모두에게 박수를 치고 그의 지혜(wit)를 인정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이라고 명령했다\’라고 나와 있다. 비슷환 이야기가 헤로도투스 3 : 32에 나온다.] 그러나 다음날 힐카누스는 왕의 친구들과 궁정의 세력가들을 방문하여 문안한 다음에, 그들의 종들에게 주인이 왕자의 생일선물로 무엇을 준비하였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어떤 사람은 10달란트 상당의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고, 서열이 높은 사람들의 종들은 주인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은 5달란트 이상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큰선물을 드릴 수가 없다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종들은 힐카누스의 말을 듣고 주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그 주인들은 요셉이 선물을 적게 보낸 까닭에 왕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고 신임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모두 기뻐하였다. 왕자의 생일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왕께 선물을 바쳤는데 가장 많이 바쳤다고 생각한 사람도 20달란트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힐카누스는 전에 사두었던 소년, 소녀 100명씩의 노예들에게 1달란트씩 주어 소년들은 왕에게, 그리고 소녀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각각 바치도록 하였다. 힐카누스가 이렇게 엄청난 양의 선물을 바치자, 톨레미 부부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은 깜짝놀랐다. 힐카누스는 또한 왕의 친구들과 그 측근들에게도 상당한 양의 선물을 주었는데, 이는 힐카누스의 형들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위험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톨레미는 힐카누스의 대담함에 감탄하면서[㈜ 다른 본문에는 \’우뢰와 같은 환호, 환영\’으로 나와 있다.] 무슨 선물을 원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자신에 대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준다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은 그에게 최고의 사의(謝意)를 표하고 많은 선물을 준 후에, 그의 부친과 형제들, 그리고 모든 족장(all governors and administrators)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돌려 보냈다. 그러나 힐카누스의 형제들은 그가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 위해 마중나갔다. 이러한 계획을 그의 아버지도 알고 있었는데, 요셉은 힐카누스가 너무 많은 비용을 선물비로 탕진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무사함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셉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이러한 분노를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A. Tscherikower는 \’유대인과 헬라인\'(Jews and Greeks), 1930년도 판, p.175이하에서 힐카누스에 대한 요세푸스의 후대의 적대감과 힐카누스 형제의 시기심에 대한 진짜 이유는 그 젊은이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고 톨레미로부터 이미 그 정표(perquisite)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설들력있게 주장한다.] 힐카누스와 그의 형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힐카누스는 형 2명과 그의 부하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로 피신하였다. 힐카누스는 그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요단강을 건너가 그 곳에 정착하면서 야만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참). (229).]



10. 세금징수인 요셉의 죽음



  [㈜ 다음에 이어 나오는 단락(223-236)<몰론(225-227)의 \’스파르타인의 편지\'(Spartan letter)를 제외하고>은 토비아드 이야기(Tobiad story)의 선행 단락보다 더 많은 역사적 자료와 또 하나의 다른 자료로부터 그 내용을 뽑아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당시 아시아는 안티오쿠스 대왕의 아들인 소테르(Soter) 셀류쿠스(Seleucus)가[㈜ 셀류쿠스 Ⅳ세 (주전 185-175)의 이름은 필로파토르(Philopator)이다. 소테르(Soter)는 그의 삼촌 셀류쿠스 Ⅲ세(주전 226-223)의 이름이다.] 지배하고 있었다.[㈜ ejbasivleuse는 동작의 원인을 나타내는 부정과거(inceptive aorist)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힐카누스의 아버지 요셉이 사망하였는데, 그는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 수리아와 베니게, 사마리아 등지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22년동안 유대인들을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구제해 주었던 인물이었다.[㈜ 참). (175), \’코엘레 수리아, 베니게, 사마리아를 포함한 유다의 세금\’.] 또한 그의 사촌 오니아스 역시 대제사장직을 아들 시몬에게[㈜ 시몬 Ⅱ세.] 물려주고 사망하였다. 시몬이 죽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가[㈜ 오니아스 Ⅲ세. 참). 부록.]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는데 이때 라케다이모니아의 왕아레이오스(Lacedaemonian king Areios)가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카비 일서 12 : 20이하에서 발견되고(167)에서 재 언급되니) 이 편지에 관한 문헌에 대해서는 부록을 보라.] \’라케다이 모니아(Lacedaemonia)의 왕[㈜ 마카비 1서에는 \’스파르타인의\'(우리는 여기의 마카비 1서 본문이 원래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 번역했다가 헬라어로 재번역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레이오스(Areios)가[㈜ 아레우스(Areus)가 좀더 정확하다<몇몇 사본들과 고대. (167)에서처럼>. 이 이름을 가진 스파르타 왕은 아레우스 I 세(주전 309-265)와 주전 255년에 아이일 때 죽은 아레우스 Ⅱ세 단 2명 뿐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주전 300년 경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I 세 대신에 오니아스 Ⅲ세 시대에 아레우스를 집어넣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참). 고대. 11권. (347)] 오니아스에게 문안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문서를 읽다가 우연히 유대인들과 라케다이모니아인들이 한 민족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카비 1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참). 고대. 14권. 255, 여기에서 페르가멘 사람들(the Pergamenes)은 아브라함 시대의 유대인들과 그들 조상들 사이에 존재하던 우정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인 당신들이 바라는 바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원하는 바를 당신들에게 알려 줄 것이며 당신들의 무제를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길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도 당신들과 함께 해결할 것이오.[㈜ 다음의 세 문장은 마카비 1서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사신으로[㈜ 직역하면 \’그 편지를 전달하는 자.\’] 보낸 데모텔레스(Dem-oteles)가[㈜ 라이나흐(Reinach)는 데모텔레스(Demoteles)라는 이름을 크세노폰(Xenophon)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한다. 참). \’Hell.\’ vii. 1. 32에서 그 이름은 스파르타인 고지자(告知者, 사자의 역할을 하는)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이 편지를[㈜ ejpistolav\”는 여기에서 라틴어 편지(litterae라는 단어처럼 단수적인 의미가 강하다.] 당신에게 전해 줄 것입니다. 이 편지는 정방형이며[㈜ 혹은 허드슨(Hudson)이 제안하고 휘스턴(Whiston)이 번역한대로 \’정방형종이에 씌여진\’일 수도 있다.] 문장(紋章)은 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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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권 제 4장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와 동맹을 맺은 것과, 오니아스가톨레미 유에르게테스를 화나게 한 것, 요셉이 모든 일을 정상화시키고 그와 다시 우정을 갖게 된 것과 요셉과 그의 아들 힐카누스의 치적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4 장


    안티오쿠스가 톨레미와 동맹을 맺은 것과, 오니아스가톨레미 유에르게테스를 화나게 한 것, 요셉이 모든 일을 정상화시키고 그와 다시 우정을 갖게 된 것과 요셉과 그의 아들 힐카누스의 치적에 대하여


      1. 톨레미 에피파네스와 대제사장 오니아스


    이 일이 있고 난 후 안티오쿠스는 톨레미와183) 고대. 12권. (154-236)에 이르는 긴 본문은 토비아드, 요세푸스, 힐카누스에 관한 것인데 어떤 원자료들, 즉 어떤 것은 신뢰할 만하며 어떤 것은 거짓된 것이 분명하므로 많은 학자들의 토론의 주제가 된다. 연대기적인 문제와 기타 다양한 문제들이 부록의 인용된 작품에서 다뤄진다. [㈜ 톨레미 에피파네스, 그는 주전 204(3)년에서 181년까지 재위했다.]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그와 혼인시켰다.[㈜ 그 결혼은 주전 193년 경에 이뤄졌다. 이는 그 먼저 즉 196년 경이라고 이제까지 알려져 왔었다. 참). 베반의 ‘셀류쿠스 왕실'(The house of Seleucus), 2권. 57, Holleaux의 ‘CAH’, viii. 199.] 그는 딸의 지참금 명목으로 코엘레 수리아 지방과[㈜ 본문에서 코엘레 수리아는 데가볼리(Decaoplis)나 더 넓게는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이다. 참). 고대. 11권. (25), 12권. (133) ; 베반 ‘셀류쿠스 왕실’ 2권. 297에서는 갈릴리(의문과 함께)라고 한다.] 사마리아,유대,[㈜ 한 사본에서는 이두매.] 베니게(Phoenicia)[㈜ 이 선물에 관해서는 몇몇 고대 자료들에서 언급된다. 폴리비우스 xxviii, 20. 0 :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주장한 바의 동의가 이뤄졌다. 톨레미가 클레오파트라 -현(애굽) 통치자의 어머니-와 결혼의 지참금으로 코엘레 수리아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톨레미와 그의(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아버지 사이에 최근에 이뤄진 것이다라고 한다.’ 참). 아피안(Appian)의 ‘Syr.’ 5에서는 ‘로마와 전쟁을 하려는 마당에 그는 (안티오쿠스 Ⅲ세) 결혼 동맹으로써  인근 왕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수리아인으로 불리는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를 결혼 시키면서 선물로 코엘레 수리아를 주어서 애굽의 톨레미에게 보낸다. 그곳은 톨레미에게서 그 자신이 장악했던 곳이다’ ; 또한 유세비우스(Eusebius) ‘연대기'(Chronicon)에서 Porphyry는 수리아, 사마리아, 유다에 관해 언급하며, 제롬(Jerome)은 다니엘 11 : 17절의 논급에서 코엘레 수리아의 모든 것을 언급한다. 셀류키드 왕조가 전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통치하였고 후에 안티오쿠스가 주전 200년에서 198년에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물리쳤던<참). 주 143, 144>것을 짐작하여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158)에 나오는 톨레미가 에피파네스라면(주 195) 톨레미 에피파네스에게 할당된 코엘레 수리아의 세금은 전혀 거둬지지 않았다. 또한 이것은 이전에 그곳이 셀류키드 정복지였음에도 톨레미가 실제로 팔레스틴과 트랜스요르단 전체나 혹은 부분적으로 통치했었다는 요세푸스(혹은 그의 자료)를 따르는 것이다. 부록에 인용된 ‘duard Cuq의 작품을 보라.] 지역을 톨레미에게 주었다. 이들 지역으로부터 오는 조공을 두 군주가 나누어 갖게 되자[㈜ Holleaux가 ‘REF’39권 1899, 0.161이하에서 확신있게 보여주는 것과 같이 톨레미와 안티오쿠스 Ⅲ세 사이가 아니라 톨레미 에피파네스와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이다 우리는 토비아드 요셉(Tobiad Joshep)이 한 농담의 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178). Momigliano의 이의에 대해서 부록에 인용된 그의 논문을 보라.] 세력가들(prominent men)을 각 지역으로부터의[㈜ 문자적으로 ‘마을들’. 팔레스틴과 트랜스요르단의 소읍들이다.] 세금징수권을부여받아 일정량의 세금을 거두어 안티오쿠스와 톨레미 왕에게바쳤다. 당시 번성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헬라어로는 ‘사마리아인들’. 참). 고대. 9권. (61) 각주.] 유대인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그들을 노예로 끌고감으로써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Buchler는 ‘Tobiaden’ p.88에서, 본문에서 요세푸스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한사마리아인'(a samaritan)으로 나와있다고 한다.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톨레미군이 주전 218년 유다의친 셀류키드파를 공격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오니아스(Onias)가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엘르아살이 죽자 그의 삼촌인 므낫세(Manasses)가 대제사장직을 승계하였으며 므낫게가 죽은후 시몬(Simon)의 아들이며 의인(the Just)이라 불리우는 오니아스가 대제사장이 되었다.[㈜ 본문의 대제사장에 관해 부록을 보라.] 필자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몬은 엘르아살의 동생이었다.[㈜ 고대. 12권. (44).] 오니아스는 매우 소심하고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세입의 일부 중에서 조상 대대로 왕에게 바쳐온 은 20달란트의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이로 말미암아 그는 톨레미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톨레미 왕은 오니아스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경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만일 그가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지않는다면 유대인들의 토지를 병합하고 군대를 보내 그 곳에 주둔시킬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왕의 말을 듣고 당황하였으나, 오니아스는 어떠한 위협에도 조금도 동요되지않았다. 그만큼 그는 매우 탐욕스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2. 요셉 토비아드와 그의 삼촌 오니아스 Ⅱ세


      예루살렘에 요셉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고상한 성품과 선견지명을 갖춘 까닭에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의롭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195) 즉 톨레미 에피파네스. 다른 본문에는 ‘톨레미’다음에 필로파토르의 아버지였던 유에르게테스(Euergetes)를 첨가한다. 이 점은 부록에서 논의된다. 다른 본문은 라이나흐가 결정적으로 ‘어리석은 주석’이라고 불렀듯이 불필요한 것인 반면,요세푸스 본문에 대한 첨가는 톨레미 에피파네스의 속국으로서 코엘레 수리아를 표현하는데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 같다. 그곳은 결국 주전 198년에 셀루키드가 정복한다. 요세푸스가 이미 위에서 유에르게테스의 재위(주전 246-221)를 말했고 에피파네스와 그와 동시대인 안티오쿠스 Ⅲ세를 언급했듯이(131이하), 토비아드 요셉은 유에르게테스가 아닌 에피파네스(참). 위의 주 188)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다른 본문에 나오는 유에르게테스는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223)에서 요셉은 22년동안 세금 징수원을 한 후 주전 187년 셀류쿠스 Ⅳ세의 등극 즈음해서 죽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최소 주전 209년에 그의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즉 톨레미 에피파네스 등극 수년 전이 된다. 또한 그는 주전 187년 쯤 공직에서 물러난 듯하다.. 이것은 그의 공무 기간의 시작을 유에르게테스 재위의 끝인 주전 221년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고로 본문에 나타나는 가필(加筆, interpolation)은 요세푸스가 사용한 토비아드 자료의 모순을 아는 어떤 사람의 작품이다.[㈜ 다른 본문에는 ‘그의 품위와, 정의를 돌보는 것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토비아스(Tobias)였으며 [㈜  혹은 ‘토비아드’, 즉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토비아(tobiah)의 후손.] 어머니는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누이였다. 그가 고향인 피콜라(Phichola)에[㈜ 異文에는 피콜라(Phicola). 장소는 불분명하지만 토비아드족이 원래 암몬인이었으므로 트랜스요르단에 있다고 추정된다. 참). 주 253.] 낙향해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왕의 사신이 찾아왔음을 알려주자 그는 사신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오니아스를 비난하였다. 그는 오니아스가 백성들의 안전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대신 수장권(chiefmagistracy)과[㈜ 본문의 prostasivan은 단순히 th'” ajrcieratikh'” timh'”의 동의어인지 아니면 시의 관직(civil office) (참). Preisigke의 ‘Fachworter’. p. 152)을 가리키는 분명하고 전문적인 용어인지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이에 관해 부록에 인용된 작품을 보라. 다음 구절과 외부의 본문들은 전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참) Diodor. Sic. xl. 4에서의.  헤카타이우스의 본문. 초기 헬라 시기에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최고 치안관(Chief magistrate)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85)에서는 마타디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다(Judas)가 prostasivan tw’n pragmavtwn을 계승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  반역자들의 제일의 권력이나 지도력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셀류키드 왕조하에서) 시의 관직을 의미하는 전문적 용어가 아니다. 요셉이 후에(167) prostsivan을 맡았다는 것과 그래서 오니아스에게서 공식적인 역할을 박탈했다는 것등은 뷔흘러(Buchler)나 최근에 모미글리아노(Momigliano)와 프루인(Fruin)이 주장하듯이, 전혀 충분한 근거가 없다. 프로스타테스(prostath”), 신의 수호자) 시몬과 대제사장 오니아스 사이의 아고라노미아(ajgoranomiva, 성직 : 마카비 2서 3: 4) 싸움과 관련된 문제가 같은 문제로 부상한다. 이에 관해 부록에 나오는 작품을 보라.]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계속해서 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결국 국가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은 온갖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오니아스에게 왕을 방문하여 조공의 전부 또는 그 일부를 면제하여 줄 것을 간청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자신은 대제사장직을 고수하고 싶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이 직분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오니아스가 프로스타테스(prostathv”)의 자리가 아닌 대제사장의 직분을 내놓는 것을 보라.] 왕을 찾아가지[㈜ 문자적으로는 ‘올라가다’, 즉 놓은 권력으로. 유대 자료들은 거의 항상 팔레스틴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와같이 이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요셉은 그에게 국가를 위하여 톨레미 왕에게[㈜ 다른 본문에는 ‘톨레미 유에르게테스’. 참). (158).] 자신을 사신으로[㈜ 이 표현은 본문이 톨레미 왕조하에서 대제사장과 시의 통치자 사이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다른 표현인 것 같다.]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오니아스가 이를 허락하자 요셉은 성전으로 올라가 백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삼촌 오니아스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해서결코 동요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고 마음을 편하게 갖고불길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신의 자격으로 왕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은 결코 어떠한 옳지 않은 행동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였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고 요셉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요셉은 다시 성전에서 내려와 톨레미가 보낸 사신을 정중하게 맞아 들였다. 갓비싼 선물을 주고 여러날 동안의 호화스런 대접을 한 후에, 요셉은 사신에게 자신도 따라 가겠노라고 말하고 그를 왕에게로 돌려보냈다. 사신이 그를 격려하고 애굽을 방문해 줄 것을부탁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톨레미 왕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자, 요셉은 더욱더 왕을 만나고자 하였다. 사신이 이와 같이 약속한 것은 요셉의 공평무사함과[㈜ 혹은 ‘순진함’.] 고상한 성격에 크게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3. 요셉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채비를 갖추다


      사신은 애굽으로 돌아가 왕에게 오니아스의 오만한 행위를 보고하는 한편, 요셉이란 인물의 훌륭한 성품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요셉이 왕을 찾아와 유대인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즉 본문이 표현한대로 그들의 대변인이나 사신 <참). 주 199>만을 의미한다. 그가 백성들에 의해 정식으로 시의 최고위직에 뽑혔다면 요세푸스 자료가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여하튼 왕 자신은 그를 그만큼 인정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해 줄 것을 간청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요셉을 계속해서 칭찬하자, 왕과 왕후 클레오파트라는[㈜ 이 사건이 그의 아내가 아르시노에였던 톨레미 필로파토르의 재위싱 일어난 일이라고믿는(이유 없이는 아님) 학자들은 주전 1 ‘ 2세기에 있었던 요세푸스의 근거 문서들이 에피파네스의 아내 후에 몇몇 톨레미 왕녀들이 가졌던 클레오파트라란 이름에 더 정통하다고 생각하므로 아르시노에 클레오파트라라고 부르는 실수로 자연적으로 흘러간다(물론 요세푸스 자신이 클레오파트라로 아르시노에를 대신하지 않는다면). 참). 부록. Livy는 xxvii. 4 : 10에서 유사한 실수를 한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요셉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요셉은 그의 친구들을 사마리아로[㈜ (암몬인) 토비아드가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우정은 느헤미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 고대. 11권. 174(느 4: 3).] 보내 돈을 빌려오도록 한 후에, 의복,음료수병, 짐싣는 동물 등과 같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다. 그가 준비한 장비들은 약 20,000드라크마[㈜ 전체 내용과 배경이 매우 역사적이라 하더라도 요셉과 힐카누스 이야기 중에 자유롭게 언급된 본문에서와 또한 유사한 총액들은 이야기의 성격상 허위성이 강하다.] 정도였으며이와 같이 준비한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요셉이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수리아와 베니게의 각 도시들의 유력인사들과 행정장관들이 왕이 매년 각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곤 했던 세금징수권(tax-farmingright)을 입찰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가는 때와 일치되었다.[㈜ 참). Rostovtzeff의 ‘CAH’ 7 : 129이하에서 ‘납세 징수 정부인들은 지방 사람들이었지만 세금은 지방에서 매긴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매겨졌다. 이것은 제노의 편지들(특히’P. Cairo Zen.’59037)에 나오는 여러 문서들이 입증한다.’ 톨레미 시대에 애굽의 조세 체제는 C. Preaux의 ‘L Economie royale des Lagides’, 1939, pp. 61-435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도중에 요셉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요셉의 가난하고 초라한 행색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요셉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톨레미 왕이 멤피스(Me-mphis)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곧 멤피스로 가서 왕을 만났다.[㈜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왕은 왕후와 친구 아데니온(Athenion)과 함께전차(戰車)에 앉아 있었는데, 아데니온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을때, 말씀드린 바 있던 그 훌륭하고 공평무사한[㈜ 혹은 ‘야망이 있는’.] 젊은이라고 왕에게 소개하였다. 이에 왕은 요셉에게 인사를 청하고[㈜ 즉 ‘요셉이 인사하기 전에’. 참). 고대. 11권. 331, 알렉산더대제가 유대의 대제사장 야두아(Jaddua)에게 비슷한 예우를 함.] 자신의 전차로 올라오라고 말하였다. 요셉이 좌석에 앉자, 왕은 오니아스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었다. 이에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나이를 보아 그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44, 157)에 보면 오니아스는 요세푸스가 톨레미 필라델푸스와 동시대인으로 만든 의인 시몬의 아들이다. 그의 삼촌엘르아살이 필라델푸스 재위시 얼마간 시몬을 계승했을 때 아이였었다. 그러면 오니아스는 이 당시에 최소 70살이었어야 한다. 이것은 톨레미 에피파네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한때(154)인 주전 193(192)년 후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가 의인 시몬을 너무 이른 주전 3세기 사람으로 만든 실수를 하고 있다할지라도 그는 최소한 이 당시에 오니아스를 노인으로 하는데는 일관성이 있다. 참). 부록.] 폐하께서는 노인과 유아들의 지적 수준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저희들이 아무런 실수 없이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치겠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재치와 매력에 끌려 톨레미는 마치 그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요셉을 왕궁의 숙소로 데려가, 매일 자신의 식탁에서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왕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수리아의 유력인사들은 요셉이 왕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한 감정을 품었다.


     4. 요셉이 무리하게 세금 액수를 높이다


      각 도시에서의 세금징수권을 매입하는 날이 되자, 여러 지역에서[㈜ 참). 주 190.] 온 유력인사들은 입찰을 실시하였다. 코엘레 수리아와[㈜ 트랜스요르단인 것으로 추정됨. 참). (154) 각주 186, (224).] 베니게, 유대지방과 사마리아로부터의 세금 합계가 8,000달란트[㈜ 우리가 보아왔던 세금에 비추어서 너무 많은 총액인 것이 분명하다. 참). Buche-Leclercq, 3 : 401. 제롬은 톨레미 필라델푸스 시대에 애굽 자체만의 세금이 14,800달란트라고 한다. 헤로도투스 3 :91에서는 다리우스가 베니게, 팔레스틴, 구브로에서 걷은 세금이 350달란트라고 한다. 키케로는 톨레미 아울레테스(Ptolemy Auletes)의 총 세금을 12, 500달란트라고 말한다. 참). 마바비이서 4 : 8 이하.]에 이르자, 요셉은 앞으로 나아가 입찰자들이 낮은 세금액수를 왕에게 제시하기로 담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그두배를 주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 일을 반대하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들의 재산은 왕의 재산에 예속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당시 입찰에서는 세금징수권과 함께 이와 같은 권한도 매매되엇던[㈜ 異文은 ‘그가(왕이)팔았던.’]것이다. 요셉의 말을 듣고 왕은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요셉이 나의 세입을 증가시켜 줄 사람 같으니 나는그에게 세금징수권을 팔기로 하였노라.’ 그리고는 요셉에게 보증을 서 줄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요셉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전혀 불신할 수 없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인물을 보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왕이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요셉은 ‘폐하여! 폐하 자신과 왕후를 나의 보증인으로 추천하고자 합니다. 폐하야말로 확실한 보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익살에 관해 Holleaux가 처음으로 만족하게 설명했다. 참). (155) 주 189.] 이에 톨레미는 크게 웃고 그에게 아무런 보증인도없이 세금징수권을 부여하였다. 왕의 이와 같은 조치에 각 도시에서 애굽으로 갔던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으로 실망한 마음을 안고 돌아갔다.


    5. 요셉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세금징수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다.


      요셉은 각 도시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왕에게 도움을 청하여 2,000명의[㈜ 다른 사본에는 1,000니이제(Niese)가 말한대로 마병의 수는 원래 기록되어 있었지만 우연히 본문에서 빠졌다.] 보병을 지원받은후, 알렉산드리아의 왕의 친구들로부터 500달란트를[㈜ 참). 주 208.] 빌려 수리아로 떠났다. 그는 아스글론(Ascalon)에 도착하여 주민들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에게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모욕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요셉은 주동자급[㈜ 다른 사본에는 ‘그들의 유력인사들’.] 중에서 약 20여명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1,000달란트에 달하는 그들의 전 재산을 왕에게 보내면서 사건의 전모를 보고하였다. 톨레미는 요셉의 이러한 투철한 사명의식과 현명한 조치를 치하하면서 소신껏 일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수리아인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경악을금치 못하였으며, 아스글론인들에 대한 학살이 명령에 불복종한 결과의 한  예(例)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요셉을 맞아들이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스구도볼리(Schthopo-lis)의[㈜ 참). 고대. 5권. (83) 주 58.] 주민들 역시 요셉을 모욕하고, 자신들이 전에 바쳤던조공을 거부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으나, 요셉은 아스글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동자급들을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국고에 귀속시켰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징수하고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상당한이익을 본 후에, 요셉은 자신의 부(富)를 , 그가 지금 갖고 있는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력을 이용하여 자신에게행운을 가져다 준 권력기반을 보존하는데 전념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은밀하게 왕과 왕후 클레오파트라, 왕의 친구들과 궁중의 세력가들에게 많은 선물을 바쳐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6. 요셉이 아들 힐카누스를 얻게 된 경위


      요셉은 이러한 행운을 20여년간 누렸으며, 한 아내에게서 일곱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형 솔리미우스(Solymius)의 딸과 결혼하여 힐카누스(Hyrcanus)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형의 딸과 결혼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전에 그는 그의 형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의 형은 딸을 유대인의 귀족층과 혼인시키기 위하여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갔다.요셉이 왕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무희가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그는 곧 이 여인에게 반해 버렸다.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형에게 말하고 유대인들이 이방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죄를 감추어주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요셉의 형은 기꺼이 도와 주겠노라고 대답한 후에 자신의 딸을 아름답게 치장하여 밤에 요셉과 함께 동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형의 딸과 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일이 여러번 계속되자, 요셉은 형의 딸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형에게 왕이 아마 자신이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것이므로 이 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그러나 그의 형 솔리미우스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하는 여인과 계속 관계를 갖고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요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요셉이 부도덕하게 보이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딸이 그 멍에를 대신 지게 되는 경위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이에 요셉은 형 솔리미우스의 우애를 치하한 후에,그의 딸과 혼인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힐카누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참) (186).] 힐카누스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타고난 용맹성과 총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형제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Sillrich는 ‘JG’ p.93이하에서 젊은 힐카누스의 이런 묘사는 ‘대담하고 조숙한 지성적 존재’에 대해 칭찬하는 유대인의 한 예를 보여준다. 또한 그를 젊은 사무엘, 젊은 다윗, 젊은 다니엘, 역사가 요세푸스 자신과 비교한다 <참). 자서. (7) 이하.> 그 설명에 더 나아가서 그는 더 오래된 성경의 주제를 추적한다. 즉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기만이나 요셉 형제들의 시기, 바로가 요셉에게 보여준 호의 같은 것들이다. 동시에 그는 토비아드 이야기와 마카비서에 나오는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에 관계된 이야기 사이의 병행 부분들을 추적한다. 그는 ‘토비아드 이야기에 나오는 요셉은 실제로 마카비이서에 나오는 메넬라우스이다. 반면 힐카누스는 야손을 마음대로 개작(Umgestaltung)한 것이다’라고 한다. 물론 토비아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허구임을 의심할 바 없지만 역사적 자료가 발견되기도 한다.] 요셉은 그의 아들 중에서 누가 가장 덕성을 갖춘 인물인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아들들을 차례로 유명한 스승에게 보냈다. 힐카누스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모두 게으르고 학업에 싫증을 느끼는 어리석고 무식한 인물로 되돌아왔다. 그 후에 요셉은 막내아들 힐카투스를 이틀 가야 할 거리 정도 떨어진 광야로 보내 300쌍의 황소를 주어 밭을 갈도록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멍에줄(yoke-straps)은 감추고 주지 않았다. 멍에줄이 없이 광야에 도착한 힐카누스는 사람 몇 명을 되돌려 보내 멍에줄을 갖고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몰이꾼들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경험많은 사람처럼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10쌍의 황소를 잡아 고기는 인부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가죽을 잘라 멍에를 고정시킬수 있는 끈을 만들었다. 힐카누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셉이 경작하라고 한 밭을 일군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요셉은 그의 총명함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민첩한 두뇌회전과 그 대담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요셉이 힐카누스만을 자신의 친자식인 것처럼 사랑하였으므로 다른 형제들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7. 힐카누스가 톨레미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다


      이 무렵 요셉은 톨레미왕이 아들을[㈜ 톨레미 에피파테스의 장남인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는 주전 187(186)년에 태어났다. 그의 차남이 sxhffpal 유에르게테스 Ⅱ세(Physcoh)는 주전 185년 이후 언젠가에 태어났다. 참). 베반의 ‘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naty’, 1927, pp.282-285.] 낳아 수리아의 모든 유력인사들과 식민지의 백성들이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갈 수 없어서 대신 그의 아들 중에서 누굴 왕에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고대. 12권. 4 : 2(160)에서 요세푸스는 요세이 톨레미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약 주전 193년) 코엘레 수리아의 세금 징수원이 되었을때 ‘여전히 젊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톨레미가 아들을 낳았을 때 요셉이 ‘그의 나이 때문에 가지 못했다’거나 외국에 나갈 정도로 나이가 든 아들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요셉이 톨레미 에피파네스 재위시에 활동을 시작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인해 야기된 몇 명 난해한 부분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형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모임에 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고대 사본(부록에 인용된  작품들)에 보존딘 이전의토비아드와 톨레미 필라델푸스와의 서신 교환을 언급할 수 있다. 그것은 암몬인 우두머리가 왕에게 말할 때에까지도 얼마나 거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양하였다.대신 막내동생 힐카누스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요셉에게 진언하였다.이들의 말을 기쁘게 듣고 요셉은 힐카누스를 불러 왕에게 갈 수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이에 힐카누스는 자신은 검소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서,10,000드라크마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요셉은 그의검소함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힐카누스는 요셉에게 왕에게 드릴 선물을 이곳에서[㈜ 예루살렘. 참). 고대. 12권. 4 :9(222).] 가져 갈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집사에게 편지를 보내자 아름답고 정성이 깃든 선물을 살 만큼의 돈을 준비하도록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요셉은 그의 제안을 칭찬하고 왕에게 바칠 선물비용으로 10달란트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3,000달란트[㈜ 고대. 12권. 4: 4(176). 요셉(Joseph)은 코엘레수리아(Coele-Syria)지역을 조세 징수 도급권을 따내기 위해 톨레미에게 9,000달란트의 두배인 16,000달란트를 지불하였다. 여기에서 3,000달란트는 명백히 수년 동안의 그의 수익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그리 심각하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토비아드 이야기(Tobiad story)중 이 부분은 대부분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상되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아리온((Arion)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셉은 수리아에서 거두어 들인돈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내곤 했으므로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날이 다가오면, 종종 아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조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힐카누스는 아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들고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가 출발하자 그의 형제들은 왕의 모든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힐카누스를 죽여야 한다고 모함하였다.


    8. 힐카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버지의 집사를 벌하다


      힐카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아리온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리온은 그에게 몇 다란트가 필요하는냐고 물었다.그는 힐카누스가 10달란트나 그보다 조금 많은 액수를 요구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힐카누스가 1,000달란트가 필요하다고 하자, 아리온은 화를 내면서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힐카누스에게 그의 아버지가 고된 일과 욕망을 억제해 가면서 재산을 축적한 과정을 말해 주면서 아버지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또한 왕에게 바칠 선물비용으로 10달란트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힐카누스는 분노하여 아리온을 감옥게 집어 넣었다. 아리온의 아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힐카누스를 꾸짖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리온의 아내는 그의 남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일을 왕에게 고하였다. 이에 톨레미 왕은 힐카누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그를 보낸 이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사를 투옥시켰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고 말하였다. 왕은 힐카누스에게 자신 앞에 나아와 그의 행위를 해명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힐카누스는 왕이 보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대 나라에는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 제사지내기 전에는 먼저 생일을 축하하는 일을 금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gennhqevnta,’태어난 아이’ 혹은 ‘사내 아이’에 대해 허워든(Herwerden)의 수정, geneqliavxonta, 즉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두 번째 견해를 수용할 수는 없다. 그 견해를 따르면 ‘그의(그 아이의) 아버지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라고 읽어야 한다. 힐카누스(Hyrcanus)는, 톨레미가 유대인들의 율법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방신전 안에서 제사드리고 있는 이교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게 하였다는 것을 믿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제가 왕을 찾아 뵙지 않고, 제부친의 은인이셨던 왕께 드릴 선물을 갖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저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징벌한 것입니다. 주인이 보잘것 없는 사람이든, 위대한 사람이든 간에 모두 저와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폐하도 폐하의 백성들로부터 모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톨레미 왕은 이 말을 듣고 파안대소하며 힐카누스의 총명함을 칭찬하였다.


     9. 힐카누스가 경쟁자들로부터 조롱받다


      아리온은 왕의 의중을 파악하였으며 자신을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힐카누스에게 1,000달란트를 주고 풀려 나왔다. 3일이 지난 후, 힐카누스는 톨레미왕 부부에게 문안드리기위해 올라갔다. 그들은 그를 기쁘게 맞이하였으며,  그의 부친을 생각하여 마치 친구처럼 대접하였다. 힐카누스는 몰래 노예상인들에게 다가가서 잘 교육받은 젊은 소년 노예 100명과 처녀 100명을 1달란트씩 주고 샀다. 한번은 그가 그 나라의 유력인사들과 함께 왕의 식사에 초대받게 되었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서열에 따라 좌석이 배정되었기 때문에 식탁의 제일 끝에 앉게 되었다. 힐카누스와 함께 식탁에 않아있던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은 고기뼈를 힐카누스 앞에 쌓아 놓았다. 그리하여 그의 식탁이 뼈로 가득 덮히자, 재담가이자 주연(酒宴)에서 남 웃기기 잘하는 트리폰(Tryphon)이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권유로 왕앞에 서서 말하였다. ‘폐하! 힐카누스 앞에 쌓인 뼈들이 보이십니까’ 폐하가 보고 계신 것처럼 고의 아버지는 마치 힐카누스가 뼈만 앙상하게 남겨놓은 것처럼 수리아를 착취해 갔습니다.’ 왕은 트리폰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힐카누스에게 왜 앞에  뼈가 그렇게 많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힐카누스는 대답하기를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 개들은 고기와 함께 뼈까지도 몽땅 먹어 치웁니다. 마치 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식탁을 가리키면서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그러나 사람은 고기만 먹고 뼈는 버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인 제 앞에는 이렇게 많은 뼈가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에 왕은 다시 한번 그의 재치있는 대답에 탄복하면서 좌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갈채를 보낼 것을 명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모두에게 박수를 치고 그의 지혜(wit)를 인정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이라고 명령했다’라고 나와 있다. 비슷환 이야기가 헤로도투스 3 : 32에 나온다.] 그러나 다음날 힐카누스는 왕의 친구들과 궁정의 세력가들을 방문하여 문안한 다음에, 그들의 종들에게 주인이 왕자의 생일선물로 무엇을 준비하였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어떤 사람은 10달란트 상당의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고, 서열이 높은 사람들의 종들은 주인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은 5달란트 이상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큰선물을 드릴 수가 없다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종들은 힐카누스의 말을 듣고 주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그 주인들은 요셉이 선물을 적게 보낸 까닭에 왕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고 신임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모두 기뻐하였다. 왕자의 생일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왕께 선물을 바쳤는데 가장 많이 바쳤다고 생각한 사람도 20달란트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힐카누스는 전에 사두었던 소년, 소녀 100명씩의 노예들에게 1달란트씩 주어 소년들은 왕에게, 그리고 소녀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각각 바치도록 하였다. 힐카누스가 이렇게 엄청난 양의 선물을 바치자, 톨레미 부부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은 깜짝놀랐다. 힐카누스는 또한 왕의 친구들과 그 측근들에게도 상당한 양의 선물을 주었는데, 이는 힐카누스의 형들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위험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톨레미는 힐카누스의 대담함에 감탄하면서[㈜ 다른 본문에는 ‘우뢰와 같은 환호, 환영’으로 나와 있다.] 무슨 선물을 원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자신에 대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준다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은 그에게 최고의 사의(謝意)를 표하고 많은 선물을 준 후에, 그의 부친과 형제들, 그리고 모든 족장(all governors and administrators)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돌려 보냈다. 그러나 힐카누스의 형제들은 그가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 위해 마중나갔다. 이러한 계획을 그의 아버지도 알고 있었는데, 요셉은 힐카누스가 너무 많은 비용을 선물비로 탕진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무사함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셉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이러한 분노를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A. Tscherikower는 ‘유대인과 헬라인'(Jews and Greeks), 1930년도 판, p.175이하에서 힐카누스에 대한 요세푸스의 후대의 적대감과 힐카누스 형제의 시기심에 대한 진짜 이유는 그 젊은이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고 톨레미로부터 이미 그 정표(perquisite)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설들력있게 주장한다.] 힐카누스와 그의 형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힐카누스는 형 2명과 그의 부하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로 피신하였다. 힐카누스는 그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요단강을 건너가 그 곳에 정착하면서 야만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참). (229).]


    10. 세금징수인 요셉의 죽음


      [㈜ 다음에 이어 나오는 단락(223-236)<몰론(225-227)의 '스파르타인의 편지'(Spartan letter)를 제외하고>은 토비아드 이야기(Tobiad story)의 선행 단락보다 더 많은 역사적 자료와 또 하나의 다른 자료로부터 그 내용을 뽑아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당시 아시아는 안티오쿠스 대왕의 아들인 소테르(Soter) 셀류쿠스(Seleucus)가[㈜ 셀류쿠스 Ⅳ세 (주전 185-175)의 이름은 필로파토르(Philopator)이다. 소테르(Soter)는 그의 삼촌 셀류쿠스 Ⅲ세(주전 226-223)의 이름이다.] 지배하고 있었다.[㈜ ejbasivleuse는 동작의 원인을 나타내는 부정과거(inceptive aorist)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힐카누스의 아버지 요셉이 사망하였는데, 그는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 수리아와 베니게, 사마리아 등지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22년동안 유대인들을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구제해 주었던 인물이었다.[㈜ 참). (175), ‘코엘레 수리아, 베니게, 사마리아를 포함한 유다의 세금’.] 또한 그의 사촌 오니아스 역시 대제사장직을 아들 시몬에게[㈜ 시몬 Ⅱ세.] 물려주고 사망하였다. 시몬이 죽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가[㈜ 오니아스 Ⅲ세. 참). 부록.]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는데 이때 라케다이모니아의 왕아레이오스(Lacedaemonian king Areios)가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카비 일서 12 : 20이하에서 발견되고(167)에서 재 언급되니) 이 편지에 관한 문헌에 대해서는 부록을 보라.] ‘라케다이 모니아(Lacedaemonia)의 왕[㈜ 마카비 1서에는 ‘스파르타인의'(우리는 여기의 마카비 1서 본문이 원래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 번역했다가 헬라어로 재번역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레이오스(Areios)가[㈜ 아레우스(Areus)가 좀더 정확하다<몇몇 사본들과 고대. (167)에서처럼>. 이 이름을 가진 스파르타 왕은 아레우스 I 세(주전 309-265)와 주전 255년에 아이일 때 죽은 아레우스 Ⅱ세 단 2명 뿐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주전 300년 경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I 세 대신에 오니아스 Ⅲ세 시대에 아레우스를 집어넣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참). 고대. 11권. (347)] 오니아스에게 문안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문서를 읽다가 우연히 유대인들과 라케다이모니아인들이 한 민족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카비 1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참). 고대. 14권. 255, 여기에서 페르가멘 사람들(the Pergamenes)은 아브라함 시대의 유대인들과 그들 조상들 사이에 존재하던 우정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인 당신들이 바라는 바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원하는 바를 당신들에게 알려 줄 것이며 당신들의 무제를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길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도 당신들과 함께 해결할 것이오.[㈜ 다음의 세 문장은 마카비 1서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사신으로[㈜ 직역하면 ‘그 편지를 전달하는 자.’] 보낸 데모텔레스(Dem-oteles)가[㈜ 라이나흐(Reinach)는 데모텔레스(Demoteles)라는 이름을 크세노폰(Xenophon)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한다. 참). ‘Hell.’ vii. 1. 32에서 그 이름은 스파르타인 고지자(告知者, 사자의 역할을 하는)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이 편지를[㈜ ejpistolav”는 여기에서 라틴어 편지(litterae라는 단어처럼 단수적인 의미가 강하다.] 당신에게 전해 줄 것입니다. 이 편지는 정방형이며[㈜ 혹은 허드슨(Hudson)이 제안하고 휘스턴(Whiston)이 번역한대로 ‘정방형종이에 씌여진’일 수도 있다.] 문장(紋章)은 뱀을[㈜ 이런 도안은 고대 근동의 봉함 양식으로 일반적인 것이었다.] 움켜쥔 독수리입니다.’


     11. 힐카누스가 요단강 건너편의 요새로 철수하다


      이상이 라케다이모니아의 왕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런데요셉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들로 인해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톨레미파와 셀류키드파 사이에 일어난 당파 싸움에 관해서는 부록에 인용된 작품들을 보라.] 형들이 막내 힐카누스와 전쟁을 일으키자, 백성들은 두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형들 편에 섰는데, 대제사장인 시몬 역시 그들과 친척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지하였다.[㈜ 최소한 두가지 문제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1) 대제사장 시몬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즉 위에서 언급된 죽음이 시몬 I 세에 관한 것인지 시몬 Ⅱ세에 관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2) 여기서의 오니아드(Oniad)가문의 시몬 Ⅱ세를 의미한다면 요세푸스는 그들과 친족 관계인데 힐카누스의 형제들을 좋아했다고 말했는지 의문이다.] 이에 힐카누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요단강 건너편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아랍인들과끊임없이 전쟁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견고한 요새를 건축하였는데[㈜ 힐카누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의 폐허가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안에 있는 Arak el – Emir에서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헤스본의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요단의 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이 폐허에 대해서는 ‘Publication of the Princeton Archaeological Expedition to Syria in 1904/5’에 충분히 기술되어 있다.] 지붕 꼭대기까지 온통 하얀 벽돌을 쌓아 올렸으며[㈜ 다른 본문에는 ‘땅바닥에 이르기까지’. 문맥상으로는 현 본문에서 기록된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다.] 맹수를 거대하게 조각하였다.[㈜ 고고학적 발견들은 지붕 바로 밑을 가로지르는 사자모양의 주두(柱頭, frieze)를 밝혀낸다. 참). C. Watzinger, ‘Denkmaler Palastinas,’ ii, 1935, Tafel 22(Butler이후에 재구성).] 그리고 요새 주변에 넓고 깊은 해자(垓字)를 팠고,맞은편 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구멍을 뚫어 긴 동굴을 만들어 그곳에 방을 만든 후, 연회장이나 침실, 거실로 사용하였으며 이 안으로 많은 양의물이 흐르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풍부한 물은 그 나라의 자랑거리였다.[㈜ 이것이 여기서의 ajulhv의 의미임은 의심할 바 없다. 참). W. F. Albright ‘BASOR’, 49, Feb., 1933, pp.29, ‘토비아드 가문의 거주지는 아마 요새화 된 집이었을지 모른다.’~] 동굴의 입구는 매우 협소하게 만들어져서 단지 한번에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같이 만든 것은 형들에게 포위되어 잡히지 않도록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엄청난 크기의 저택을 지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거처를 만든 후에 그는 이곳을 두로(Tyre)라[㈜ 두로(Tyre)는 산을 의미하는 tur’라는 아람어 형태의 헬라어이다.] 불렀다. 두로는 요단강 건너편의 아라비아와 유대지방 중간에 위치하였으며, 에세보니티스(Essbonitis)와도[㈜ 성경에는 헤스본(Heshbon)으로 나와 있다. 참). 각주 253.]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힐카누스가 이 지역을 7년 동안 다스리고 있을 때, 아시아는 셀류쿠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요세푸스의 여기서의 기록은 다소 부주의 한 것이다. 셀류쿠스 Ⅳ세는 주전 187-175년의 13년간을 통치하였다. 오토(Otto)가 ‘PW’9 : 530에서 주장하듯이 그는 힐카누스의 모든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지역에 대한 통치 기간 7년은 셀류쿠스의 통치 기간 내에 포함된다고 한다.] 셀류쿠스가 죽자, 그의 동생 에피파네스라 불리우는 안티오쿠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애굽의 왕 톨레미 에피파네스도 어린 두 아들을 남겨 두고죽었는데,[㈜ 여기서도 요세푸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톨레미 에피파네스(Ptolemy Epiphanes)는 안티오쿠스(Antiochus) 에피파네스가 셀류키드 왕위를 계승하기 몇 년 전인 주전 181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형의 이름은 필로메토르(Philometor)였으며,[㈜ 그는 주전 181-145까지 통치했는데, 한 동안 그의 형제 피스콘(Physcon)과 왕권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동생의 이름은 피스콘(Physcon)이었다.[㈜ 그는 주전 145-116까지 통치했는데, 그의 공식적인 이름은 유에르게테스(Ⅱ세)였다.]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의 세력이 막강하고, 그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아랍인들에게 행한 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후 그의 전 재산은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압수되었다.[㈜ 참). 마바키 2서 3 : 11 이하에는 토비아드 힐카누스의 재산은 셀류쿠스 Ⅳ세(Seleucus Ⅳ)의 장관인 헬리오도루스(Heliodorus)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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