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권 제 9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은 것과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가 유다와 싸워 성전에 있는 유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후에 그와 강화하고 떠난 것, 알키무스와 오니아스에 대하여

 


제 9 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은 것과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가 유다와 싸워 성전에 있는 유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후에 그와 강화하고 떠난 것, 알키무스와 오니아스에 대하여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바사에서 죽다[마카비 1서6 : 1]



  이 무렵 북부지방을 순회하고 있던 안티오쿠스왕은[㈜ 그의 동부로의 원정은 주전 165년 여름부터 주전 163년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바사에엘리마이스(Elymais)라는[㈜ 마카비 1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으며, 아마도 도시가 아닌 엘리마이스(Elymais)지경을 언급하는 것같으며,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다리오 제국의 8번째 도(道)인 수시아나(Susiana)에 해당하는 것같다. 마카비 2서 9 : 2에 의하면 그곳은 안티오쿠스가 약탈하려 했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였다.] 부유한 도시가 있으며 그 도시에는 화려한 아르테미스(Artemis)의[㈜ 폴리비우스도 xxxi 9(11) : 1에서 같은 표현을 쓰고 있으며, 제롬은 단 11장에서 폴리비우스(Polybius)와 디오도루스(Diodorus)를 인용하면서 라틴어 형태의 디아나(Diana)라고 적고 있다.] 사원이 있어 그 안에 마게도냐의 왕 빌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남기고 간 많은 무기들과갑옷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물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이 소식을 접한 안티오쿠스왕은 흥분하여 엘리마이스로 떠나 그곳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엘리마이스의 주민들은 안티오쿠스의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과감하게 대항하여 그의기대를 무산시켰다. 이들은 성에서 안티오쿠스를 쫓아냈을 뿐아니라 추격전을 전개하였으므로 안티오쿠스는 많은 군대를 잃고 바벨론(Babylon)으로[㈜ 마카비 1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폴리비우스(Polybius)는 안티오쿠스가 죽었을 때 바사의 타바이(Tabae)로 그 성을 명명하였다.]피신하였다. 그가 자신의 실패에 낙담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을 공격하러 갔던 군대가 패배하고 유대인들은 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는 이러한 시름이 겹쳐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자신의 병이 깊어져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친구들을불러 자신의 병이 심각한 상태임을 말하고[㈜ 혹은 \’넌지시 암시하다.\’]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 그가 유대민족을 괴롭히고 하느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여기서 나는[㈜ 다른 본문에는 \’어떤 사람이\’로 나와 있다.] 정직한 사람인 메\’로폴리스의 폴리비우스(Polybius of Megalopolis)가 안티오쿠스는 바사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약탈하고자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의외라고 생각한다.[㈜ 참). 폴리비우스(Polybius) xxxi 9(11).] 왜냐하면 어떠한 일을 행하지 않고 단지 기대했다는 것만으로는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리비우스는 안티오쿠스가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고 약탈하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폴리비우스의 견해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믿는 자들과 논쟁을 하지는않을 것이다.[㈜ 본문이 약간 불확실하다.]



 2. 빌립이 셀류키드 왕국의 섭정에 임명되다[마카비1서 6 : 14]



  안티오쿠스는 죽기 전에 친구인[㈜ 마카비 1서에는 전문적인 의미로\’친구들 \’이라고 나와 있다.] 빌립을 불러 자신의 왕관과 왕복과 반지를 주면서 섭정(regent)에 임명하고 이 물건들을 갖고 있다가 자신의 아들 안티오쿠스에게 주라고 부탁하였다.그는 또한 아들의 교육을 보살펴 주고 그를 대신하여 왕국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였다.[㈜ 일찍이 안티오쿠스는 서부 지역을 섭정 형식으로 루시아스(Lysias)에게 맡겼다. 안티오쿠스의 사후에 그 지역의 실권자는 루시아스였다.] 안티오쿠스는 셀류키드 왕조 제 49년에 사망하였다.[㈜ 셀류키드 왕조 149년은 주전 164년 10월부터 163년 10월 까지에 해당된다. 다른 고대의 자료들은 안티오쿠스가 주전 163년 봄 혹은 여름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Eusebius, \’연대기.\’] 루시아스는 백성들에게 왕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선포하고 그를 유파토르(Eupator)라고 불렀다.



3. 유다가 예루살렘 성채에서 수리아인들을 공격하다[마카비1서 6 : 18]



  이 무렵 예루살렘 성채(Akra)의 수비대와 변절한 유대인들은[㈜ 유대인 개종자들에 대해서는 마카비 1서의 이 부분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더 나아가 21절에서 언급되지만 마카비 1서는 요세푸스가 진술한 것처럼 그들이 아크라(Akra)에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유대인들이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갈 때 수비대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살해하곤 하였다. 성채에서는 성전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를 그리 확대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유다는 수비대를 축출하리라 결심하고 모든 백성들을 모아 성채의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이때가 셀류키드 왕조(朝) 150년이었다.[㈜ 셀퓨키드 왕조 150년은 주전 163년 10월부터 162년 10월에 해당된다. 마카비 2서 13 : 1은 안티오쿠스 유파토르(Antiochus Eupator)에 의한 유대(Judaea) 침입을 셀류키드 왕조 149년으로 한다.] 그는 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보루를 쌓는 등 성채를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성채 안의 유대인 변절자들은 야음을 틈타 밖으로 나와 그들과 비슷한 무리들과 연합하여 안티오쿠스왕에게가서[㈜ 안디옥(Antioch)에서 참). (367). 마카비 1서는 왕이 그 곳에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를 유대인들의 박해로부터 벗어 나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부친의 명을 따라 조상대대로 믿어 온 종교를 버리고 부친께서 명하신 바를 따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왕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유다와 그의 군대들에 의해 성채 안에 주둔하고 있는 왕의 수비대와 우리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어린 안티오코스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군대의 장교들과 친구들을 불러 외국 용병들과 그의 왕국 내에서 징집연령에 해당하는 자들을 소집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약 100,000명의 보병과 20,000여명의 기병,[㈜ 대부분의 사본들과 마카비 1서는 같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A사본은 \’말들\’이라고 쓰고 있다. 요세푸스는 전쟁. 1권. 41에서 50,000의 보병과 5,000의기병, 80마리의 코끼리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2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대부대가 조직되었다.



4. 유파토르 안티오쿠스 Ⅴ세가 유대를 공격하다[마카비1서 6 : 31]



  안티오쿠스왕은 이렇게 소집한 군대를 이끌고 총사령관 루시아스와 함께 안디옥을 출발하여 이두매를 거쳐 벧술을 공격하기위해 진군하였다.[㈜ 주 385.] 벧술은 매우 견고한 요새로서 함락시키기가 용이하지 않았으나 그는 이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벧술의 주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공격용 무기들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대치상태로 소비하게 되었다. 한편 왕이 벧술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성채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왕과 싸우기 위해 나아갔다. 그는 적진에서 70스다디온(stadion)[㈜ 약 8마일. 이 측정은 단지 앞에서 기술된 벧자키리아스(Bethzacharias)와 벧술(Bethsur) 사이의 실제 거리이다.] 떨어진 벧자카리아스(Bet-hzacharias)라는 [㈜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마일, 벧술(Bethsur)에서 북동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현대의 베이트 스카리아(Beit Skaria)이다.] 골짜기 근처에 진을 쳤다. 이에 왕은 벧술을 떠나 유다가 진을 치고 있는 골짜기로 가서 다음 날 아침 그의 군대를 전투대형으로 배치하였다[㈜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에 있는 수리아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 \’포도열매의 즙(즉, 붉은 술)과 오디(mulberry)를 보여주었다\’고 기록한 내용을 생략한다.][마카비1서 6 : 33]. 그는 코끼리를 일렬종대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골짜기가 너무 협소하여 횡대로는 진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장은 A사본과 루키안 사본의 내용과 마카비 1서 6 : 35, \’그들은 종대로 서있는 코끼리들을 나누었다\’라는 내용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각 코끼리의 주변에1,000명의 보병과 기병 500명씩을 배치한 다음 코끼리의 등에는 높은 [㈜ 다른 본문에는 \’그리고 강한\’으로 나와 있다.] 망루와 궁수들을 태웠다.[㈜ 마카비 1서에는 코끼리 등위의 가마에 불가능해 보이는 수 30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하였다. ] 그리고 경무장한 군사들은 골짜기 양쪽의 산에 올라가 유대인들의 정면에서 햇빛을 반사하도록 시켰다.[㈜ \’경무장한 부대들\’은 대다수 사본들의 \’친구들\’에 대한 네이버(Naber)의추정이다. 그 추정이 마카비 1서의 본문에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대. 12권. (426)에서 볼 수 있는 댓구의 관점에서는 가능성 있는 견해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군사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금과 구리로 만든 방패로[㈜ 금방패들은 가공적인 서술이다. 폴리비우스는 우리에게, 필로푀멘(Philopoemen)이 그의 군사들에게 적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들의 무기를 밝게 빛나게 하라고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폴리비우스 xi.9 : 1.] 유대인들에게 빛을 반사시켜 눈을 못뜨게 하였다. 이들의 고함소리는 온 산과 골짜기를 울렸다. 그러나 유다는 이를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용감하게 싸워 적군 600여명을 살해하였다. 아우란(Auran)이라고 불리우는[㈜ 참). (266) 각주 317.] 유다의 동생 엘르아살은 왕의 것과 유사한 갑옷으로 무장한 가장 큰 코끼리를 보고 왕이 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과감히 달려들어 코끼리 주변의 많은 적들을 처치하고 달려드는 적들을 쫓아낸 후에 코끼리의 배 밑으로 들어가 칼로 찔러 죽였다[마카비1서 6 : 43]. 그러나 코끼리가 엘르아살의 위로 쓰러지면서 이 용감한 영웅은 압사하고 말았다. 많은 적들을 용감하게 물리친 후에[㈜ 다른 본문에는 \’그리고 그토록 용감한 후\’라고 나와 있다.] 엘르아살은 이와 같이 장렬하게 죽었던 것이다.



5.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가 벧술을 장악하다[마카비1서6 : 49]



  유다는 적의 공격이 매우 막강함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전쟁. 1권. (45)에 의하면 유다는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한 고푸나(Gophna)로 철수했다.] 되돌아와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에 안티오쿠스는 군대의 일부분을 벧술로 보내 그 곳을 공격하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벧술의 주민들은 왕의 군대의 막강함과 자신들의 식량이 매우 부족함을 깨닫고 항복하더라도 절대로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은 후에왕에게 항복하였다.[㈜ 마카비 1서는 \’맹세의 확증\’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단지 왕이 \’그들과 우호조약을 맺었다\’라고만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성을 함락시킨 후에 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쫓아낸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은 벧술에 자신의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할 때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는데 이는 그곳의 주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었다[마카비1서 6 : 51]. 왕이 만든 공격용 무기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은 다른 무기를 만들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비축된  곡식이 다 떨어지고 그 해가 7년 되는 해이었던 까닭에 밭을 갈 수 없게 되자 식량공급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여기서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였다. 이 7년째란 연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363이하에 의하면 벧술(Bethsur)에 대한 루시아스의 원정은 셀류키드 왕조 150년에 시작되었다. 안식년이 디스리월(TIshri, 대략 10월)부터 환산되기 때문에, 이 해는 셀류키드 왕조 150년과 일치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또 이때는 이 해의 끝무렵인 주전 162년 여름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음식물이 부족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것은 고대. 13권. (234)에 나오는 진술이 지지하는데 이곳에는 안식년이 시몬이 죽은 후 시작되었다고 나온다. 시몬이 죽은 것은 주전 135년경이며 안식년은 주전 135년 10월에 시작된다. 안식년은 다음과 같이 ① 주전 163년 10월에서 162년 10월까지 ② 주전 156년 10월에서 155년 10월까지 ③ 주전 149년 10월에서 148년 10월까지 ④ 주전 142년 10월에서 141년 10월까지 ⑤ 주전 135년 10월에서 134년 10월까지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대. 14권. (475)와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는 헤롯과 소시우스가 안식년 동안 예루살렘을 점령했다고 나오며 그 사건이 주전 37년 여름에 발생했고 안식년은 주전 38년 10월에 시작했기 때문에 위에 기록된 표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 부분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년에는 밭을 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참). 출 23 : 10이하, 레 25 : 2이하.] 그러므로 생활필수품이 부족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쳐 성전 안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6.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가 빌립의 득세에 위협을 느껴 예루살렘 성전 안의 유대인들과 타협하다[마카비 1서



  이상이 성전 안에서 고립되어 있던 유대인들의 상황이었다. 한편 군대의 총사령관인 루시아스와 안티오쿠스왕은 빌립이 바사에서 돌아와 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빌립과 싸우기 위해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병사들이나 장교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카비 1서 6 : 57에 대한 현 본문은 루시아스가 왕과 관료들과 백성들에게 동시에 연설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루시아스가 그의 연설가운데 빌립(Philip)을 언급하지 않은 사실로부터 왕의 옆에서 비빌리에 말했다고 추론한다.] 그 대신 왕은 루시아스로하여금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다른 본문에는 \’그들\’로 나와 있다.] 빌립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주민들의 저항이 너무나 완강하여 포위기간이 더 오래 될 것같습니다. 이미 우리들에 대한 식량의 보급이 어려워진지 오래되고 또 본국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으므로 유대인들과 조약을 맺어 그들 선조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가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들과 우호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므로 이를 용인해 주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루시아스가 이같이 말하자 병사들과 장교들은[㈜ 마카비 1서에는 \’왕과 관료들\’이라고 나와 있다. 참). 각주 481.] 그의 말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7.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가 성전의 벽을 허물다[마카비1서 6 : 60]



  그리하여 안티오쿠스왕은 유다와 그의 백성들에게 사신을 보내 화약(和約)을 맺을 것을 제안하고 동시에 그들 선조들의 법에 따라 살아도 무방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왕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 성전에서 나왔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그 곳이 매우 견고한 요새임을 알고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에게 성전 주위를 돌면서[㈜ 다른 본문에는 \’그를 동행시키려고\’로 나와 있다. 현 본문의 내용이 마카비 1서에 더 가깝다.] 벽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였다.[㈜ 다음 단락(383-388)은 마카비 1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약속을 어기고 성전 벽을 무너뜨린 그는 메넬라우스(Menelaus)라고[㈜ (283)에 의하면 그는 시몬 Ⅱ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연소했으며 오니아스 Ⅲ세와 예수-야손(Jesus-Jason)의 형제였다.] 불리우는 대제사장 오니아스를 포로로 잡고안디옥으로[㈜ 자이틀린(Zeitlin)은 \’Meg. Taanit\’의 p.80이하에서 이 사건과 쉐밧월(Shebat)(대략2월) 28일의 메길랏 타아니시(Megilath Taanith)에 나오는 진술인\’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갔다\’라는 진술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Derenbourg, p.59와 Lichetenstein, \’Fastenrolle\’p.279에서는 이 기간과 아달(Adar)월(대략3월) 28일에 있었던 메길랏 타아닛에 나오는 진술인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좋은 소식이 왔다\’는 것을 연결시킨다(참). 마카비2서 11 : 24이하). 이 진술은 고대의 주석들이 하드리안(Hadrian) 시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 진술들이 모호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알려진 역사적 그 진술들을 결부시키지 않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 돌아갔다. 루시아스는 왕에게 만일 유대인들이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있어 주기를 원한다면 메넬라우스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메넬라우스가왕의 부친을 충동질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여 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말하였다. 이에왕은 메넬라우스를 수리아의 베뢰아(Beroea)로 보내 거기서 사형에 처했다.[㈜ 메넬라우스(Menelaus)의 처형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마카비 2서 13 : 4에 기록되어 있다.]  메넬아우스는 10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며[㈜ 이것은 그의 재임 시기를 주전 172년 경으로 잡는 것이다.] 자신만이 유일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만든 사악하고 부정한 사람이었다. 메넬라우스가 죽고 난 후 자케이모스(Jakeimos)라[㈜ 다른 본문들에는 요아키모스(Joakimos), 요아케이모스(Joakeimos)로 나와 있다.] 불리우는 알키무스(Alcimus)가[㈜ 헬라어로는 알키모스(Alkimos). 마카비 1서 7 : 5에서 의하면 알레이무스(Aleim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왕이었다. 하지만 마카비 2서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곧 14 : 3이하에서 데메트리우스가 왕이 되기전에 알레이무스는 이미 대제사장이었다고 진술한다. 여하튼 알레이무스는 주전 162년 말 메넬라이우스를 계승했다.] 대제사장직에 올랐다. 안티오쿠스왕은 빌립이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고[㈜ 다른 본문에는 \’보았다\’로 나와 있다.] 그와 싸워 실권을 탈취한 후에 빌립을 처형하였다. 대제사장의[㈜ 오니아스 Ⅲ세. 전쟁. 7권. (423)에 의하면 톨레미에게로 달아난 사람은 시몬의 아들 오니아스였다. 본문에서와 고대. 13권. (62)이하에서와 같이 이 사람은 오니아스 Ⅲ세이며 오니아스 Ⅳ세는 아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으이 사절이었던 안드로니쿠스(Andronicus)는 메넬라우스의 교사를 받고 안디옥 근처 다프네(Daphne)에서 오니아스를 살해하였다(마카비2서 4 : 32이하). 이 오니아스는 오니아스 Ⅲ세이며 오니아스 Ⅳ세가 아니다. 그의 순교는 단 9 : 26에 기름부은 대제사장을 의미하는 기름부은 자(흠정역은 \’메시야\’)로 암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들 오니아스는 [㈜즉 오니아스 Ⅳ세(Onias Ⅳ).]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는 왕이 삼촌 메넬라우스를 사형시키고 대제사장의 가문이[㈜ 마카비 1서 7 : 14에 의하면 아시다이오이(Asidaioi, 혹은 히브리어로 Hasidim), 즉 경건한 유대인들은 알레이무스를 \’대제사장 가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이라고 말했다. 참). 고대. 20권. (235).] 아닌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 것을보았으며 또한 루시아스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다른 가문으로 양보하라는 강요를 받고는 애굽의 왕 톨레미에게로 피신하였다.톨레미왕과 왕후 클레오파트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에그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노메(nome)라는 지역을 하사받아 그 곳에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성전을 지었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적절한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고대. 13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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