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요나단이 음모에 빠져 살해된 것과, 그래서 유대인들이 시몬을 그들의 총 사령관과 대제사장으로 삼은 것과, 특히 트리폰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시몬의 용감성에 대하여
1. 왕권에 대한 트리폰의 열망과 요나단에 대한 그의 음모(마카비 1서 12 : 39)
한편 트리룬은 데메트리우스가 시도한 것이 그같이 끝났다는소식을 들고 안티오쿠스를 지원하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에 그는 안티오쿠스를 즉이고 자기가 왕관을 차지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요세푸스는 마카비 Ⅰ서 12 : 39를 부연하면서 파르티아(Parthlans)인이 데메투리우 스(Demetrlus)를 포획한 사건뒤에 트리폰(Tryphon)의 강탈사건을 기록한 것에 대해 아피안(Appian),\’Syr. \’ 67-68과 유스티누스(Jus- tinus) xxxvi. 1과 동의한다. 그 러나 주화가 밝혀 주듯이 마카비 1서 13 : 31, 41에 의해 지적되듯이 트리폰 (Tryphon)의 재위기간은 주전 142 흑은 1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참). 쉬러 (Schiirer) i . 172,\’CAH\’viii. 527에 있는 Bevan. ]. 그러나 이같은 계획에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안티오쿠스의 친구인 요나단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간은 이유로 인하여 그는 먼저 요나단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 안티오쿠스를 제거하리라 마음 먹였다. 그래서 트리폰은 요나단에게 속임수를 써서그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이 스구도볼리(Scythopolis)라고 부르는 벧산(Bethsan)으로[㈜ 현지명은 베이산(Belsfn), 참). 고대 5권. 1 : 22(83) 각주] 갔다. 요나단은 40,000명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그들과 함께 거기에서 트리폰과 만났다. 왜냐하면 그는 혹시 트리폰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트리폰은 요나단이 싸울 준비를 하고 온 것을 발견하고, 요나단에게 선물들과호의로 환심을 사려하였으며 자신의 관리들에게 요나단의 말에 복중하도록 명령 하였다. 왜냐하면 트리폰은 이같이 함으로써요나단에게 자신의 선의를 알게 하여 요나단으로 하여금 모든의심을 떨쳐 버리도록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이 의심했던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안심하여 그의 호위병을 떼어놓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트리폰(Tryphon)의 동기들은 마카비 1서의 이 부분에서 진술되지 않고 있음. ] 트리폰은 또한 요나단에게 그의 군대를 떠나보낼 것을 권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는 전쟁은 없으며 전역에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에 군대를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트리폰은 또 요나단에게, 톨레마이스를 그에게 넘겨주고 그 나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성채들도 그의 권세 아래 놓이게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들을데리고 톨레마이스로 오라고 그를 초청하였다. 그러면서 그는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2. 트리폰의 배반으로 요나단이 체포되다[마카비 1서 12:46)
요나단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트리폰이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진실하게 권고했음을 믿었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자신의 군대를 떠나보내고 오직 3,000명만 데리고 있었다. 그는 또 그들 중 2,000명을 갈릴리에 남겨 두고 오직 1,000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트리폰과 함께 톨레마이스로 갔다. 그러나 톨레마이스의 주민들은 모든 성문들을 닫았다(이것은 트리폰이 그들에게 미리 지시 놓은 것이다). [㈜ 이 중요한 설명은 마카비 1서에 빠져 있음. ] 그리고 그는[㈜ 마카비 1서은 \”그들(they)\”(톨레미의 거주민들)이라고 봄] 요나단만 살려두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 모두를 죽였다. 그는 또한 갈릴리 에 남아 있는 2,000명 마저 죽이려고 그들에게 군대를 보냈다. [㈜ 마카비 1서 12 : 49에는 \”그리고 커다란(에스드라엘론의)평원\”의 라는 구 절이 첨가되어 있음. ] 그러나 그들은 요나단과 그와 같이 간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모두 무기를 들고 자신의신변을 보호하면서 트리폰이 보낸 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빠져 나와 결사 항전의 준비를 마쳤다. 그들을 처치하라고 트리폰이 보낸 군사들은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 떠 한 방법으로도 그들을 괴롭히 못하고 트리폰에게로 되돌아갔다.
3. 요나단이 붙잡힌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낙담하다(마카비 1서 12 : 52]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요나단이 붙잡혔다는 소식과 그와 함께간 모든 군사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도 요나단이 쓰러지게 된 운명을 슬퍼하였으며 영웅 하나를 잃었음을 몹시 아쉬워하였다. 그와 동시에 자연적으로 커다란 두려움이 그들에게로 엄습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두려워한 이유는, 자신들이 요나단의 용기와 지혜를 모두 잃게 되었으므로 자신들에게 냉담해져 있었으나 오직 요나단 때문에 그대로 있었던 주위의 나라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들고 일어서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하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어 가장 극심한 위험들을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사실 쳐들어오는 적들을 쓰러뜨릴 수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외국나라들이 그들에게는 이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이려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트리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또한 유대로 쳐들어가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이 기 위하여 군사를 모았다.
4. 유대인들이 시몬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다[마카비 1서 13 : 7]
시몬은 이러한 연설을 함으로써 군중들에게 용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었던 백성들은 이제 정신을 차리 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 하여 모든 백성들은 함 목소리로 시몬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그는 또 자신들 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그의 형 유다와 요나단의 지위를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들은 시몬이 무슨 명령을하든지 간에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말하였다. [㈜ 유대지도자로서 시몬(Simon)의 선출은 마카비 1서 13 : 41이하, 14 . 27에 의하면 주전 143-142년인 셀류키드 왕조 170년에 있었다. 고대 13권. 6 : 6(212).] 그후 시몬은 자기 자신의 군사중에서 싸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즉각 소집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그 도시의 성벽들을 재건하였다. 시몬은 매우 높고 견고한 망대들을 세워 도시를 안전하게 만든 후에, 자기의 친구들 중 하나인 압살롬(Absa10m)의 아들[㈜ 몇몇 주석가들은 그를 압살롬(Absalom)과 동일시하는데 그의 아들 마타디아스(Mattathias)는 요나단(Jonathan)의 신복중의 하나였다. 참). 위의 고대. 13권. 5 : 7(161) (마카비 1서 11 : 70). ]요나단에게군대를 이끌고 욥바로 갈 것을 명하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그곳주민들을 쫓아낼 것을 지시하였다. 왜냐하면 시몬은 그들이 그도시를 트리폰에게 내어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이러한 동기는 마카비 1서에 진술되지 않음. ] 시몬자신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하여 그대로 남아있었다. [㈜ 마카비 1서 13 : 11도 요세푸스와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그리고 그(압살롬의 아들 요나단)가 거기(욥바, Joppa)에 있는 그 성읍에 주둔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
5. 유대인들에 대한 트리폰의 배반[마카비 1서 13 : 12]
그러는 동안 트리폰은 큰 군대를 이끌고 톨레마이스에서 진군하여 유대로 왔는데 그는 또한 요나단을 포로로 끌고 왔다. 그래서 시몬도 군대를 이끌고 아디다(Addida)[㈜ 지금의 엘-하디테 (el-Hadithe)로 아벨(Abel),\’GP. \’ii : 340에 따르면 룻다 (Lydda) 북동쪽 약 4마일 떨어진 곳이다. ]시에서 그와 만났다. 그 시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아래로 유대의 평지들이 놓여 있었다. 트리폰은 시몬이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시몬을 속이고 배반하여 더 쉽게 붙잡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일 형 요나단이 풀려나기를 원한다면 은 100달란트와요나단이 풀려났을 때 그가 유대로 하여금 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요나단의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달라는 말을 시몬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동시에 요나단이 계속 감금되고 있는 이유는 요나단이 왕에게 빌렸다가 아직도 갚지 않은 돈 때문이라는 말을 전달하였다. [㈜ 마카비 1서 13 : 15, \”네 동생 요나단(Jonathan)은 그 직책상 왕의 금고에 돈을 바쳐야 하는데 그 돈 때문에 우리에게 붙잡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관리\” creiva\”라는 단어를 \”빛\”(debts)이라는 다른 의미로 취하고 있다. 마카비 1서에 나타나는 암시는 셀류키드왕의 가신으로 요나단(Jonathan)으로부터 요구되어진 조공에 관한 것이다. 참), 고대. 13권. 4 : 9(125) (마카비 1서 11 : 28). ] 시몬은 트리폰의 교활한 속임수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트리폰에게 주는 돈은 . 찾지 못할 것이며 형도 풀려나지 못하리라는 것과 나아가 형의 아들들도 적에게 건네주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몬은, 만일 자기가 트리폰에 게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주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자기가 형을 죽인 것이라고 비난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한데 모아 그들에게 트리폰의 제안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그는 \’트리폰의 제안은 속임수요 음모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트리폰의 제안을 거절하여 마치 내가 형을 구원하지 않은 것처럼 비난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그에게 보내는 편이 더 낫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 요세푸스는 시몬이 자신의 군대를 자문하는 세부묘사를 조작한다. 그리고 마카비 1서 13 : 17-18의 두 구절을 크게 부연하는데, 이 두 구절은 트리폰 (Tryphon)에 대한 시몬(Simon)의 의심을 묘사한다. ] 이리하여 시몬은 돈뿐만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들도 보냈다. 그러나 트리폰은,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요나단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유대 전국으로 행군하였다. 이두매 (Idumaea)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올라가리라고 결심한 트리폰은,[㈜ 예루살렘에 대한 트리폰(Tryphon)의 계획은 마카비 1서 13 : 20의 \”길을 돌아갔다(ejkuvklwsn oJdovn) \”란 단어로부터 요세푸스에 의해 추론되어진다.] 마침내 이두매 안에 있는 시(市)인 아도라(Adora)에[㈜ 요세푸스의 사본에 기록된 도라(Dora)에 대한 마카비 1서의 추측된 형태(요세푸스 는 유사한 실수에 대하여 아피온(Apion)에 의해 인용되어진 므낫세(Mnaseas)를 비 판한다) 참). 아피 2권. 9(116). 아도라(Adorn)는성경적으로 아도라임 (Adoraim)이 며, 지금의 두라(Dura)로 유대(Judaea)와 이두매(Idumaea)사이의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헤브론(Hebron) 남서쪽 5마일 떨어진 곳이다. ] 도착했다. 그러나 시몬은 항상 트리폰과 반대편에 진을 치면서, 자기 군대 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행군하였다.
6. 요나단이 트리폰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마카비 1서 13 : 21]
그 성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램의 아크라(Akra)에 있는 수리아 수비대와 유대교로 개종한 배교자들. ] 트리폰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자신들에게 와줄 것과 식 량을 보내 줄 것을 그에 게 요청하였을 때, 트리폰은 바로 그날 밤에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여 기병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그때 폭설이 내려 모든 길을 온통 뒤덮었으며 노상에 높게 쌓였다. [㈜ 이 눈보라에 대 한 회화적 묘사는 요세푸스에 의해 첨가되어 짐. ] 그리하여 그길로 지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특히 말을 타고는 더욱 지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트리론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트리폰은 아도라에서 떠났다. 그는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에[㈜ 여기서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는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을 포함하고 있 다. 참). 고대. 11권. 2 : 1(25). ]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갈라디티스(Galaaditis)로 침입해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요나단을 죽인후[㈜ 바스카마(Bascama)의 성읍에서, 다음 각주를 볼 것. ] 그를 매장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안디옥으로돌아갔다. 그러자 시몬은 바스카(Basca)[㈜ 바스카마(Baskamav )로 마카비 1서에 나와있음. 이곳은 갈릴리(Galilee)호수 북동쪽 지금의 텔 바죽(Gell B\’z\’k)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베베노(Beveno시)에 의해 주장되어 있다. 이 주장은 바스카마(Bascama)라고 추정되어진 어원에 근거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엘-굼메이즈(el-Gummeize : 무화과나무)라고 주장하는 아벨(Abel)의 \’GP\’ ii : 261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 시로 사람을 보내자기 형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의 시신을그의 출생지인 모데이(Modeei)에서[㈜ 성경에는 모딘(Modin), 참). 고대. 12권. 6 : 1(265) 각주. ] 장사지냈다. 그러는 동안 모든 백성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시몬은 또한 자기의 아버지와 형들을 위하여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거대한 기념비를 제작하여 그것을 눈에 잘 띄는 높은 곳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주위에는 주랑(柱廊) 현관들을 만들어 놓았고, 또 보기에도 훌륭한 돌 하나로 이루어진 기둥들을 세워놓았다. [㈜ 마카비 1서는 그 회랑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음. 한편으로 요세푸스도 갑옷과 그 기념물의 조각된 배들을 빠뜨리고 있다. 건축술에 대해서는 Watzinger, Denkmaler, ii : 22를 볼 것. 또한 \’JHS\’59(1939), 125-126에 있는 W. W. Tarn을 볼 것. ] 이러한 것들외에 그는 자신의 부모와ㅏ 형제들을 위하여 각각 한개씩 일곱 개의 피라밋을 세웠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 경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왔다. 시몬이 요나단을 장사지내고 가족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데서 보여주었던 열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서 죽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4년 동안 유대의 통치자로 있어 왔다. [㈜ 고대. 20권. 10 L 3(238)에서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으로서 요나단(Jonathan)의 재위기간을 7년으로 본다. 그러나 정확한 연수는 10년이다. 요나단은 주전 143년 혹은 142년에 죽었다<참). 고대. 13권. 6 : 4(201)>. 그리고 주전 152년<참). 고대. 13권. 2 : 3(46)과 마카비 1서 10 : 21>에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재위기간은 10년이다.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고대. 20권. 에서처럼 부주의 했든지 혹은 서기의 잘못이 있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아마 라이나흐(Reinnach)의 주장대로 hevssara\”는 원문이 devka(10)의 축약인 수를 나타내는 문자 d v의 확장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것들이 그가 죽을 때의 상황이었다.
7. 시몬이 유대를 셀류키드(Seleucid)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다[참). 마카비 1서 13 : 36]
시몬은 전(全)주민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선출된 이후, 자신이 대제사장직에 오른 첫 해에 마게도냐인들의 노예 상태에 있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마게도냐인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자유와 공물로부터의면제는, 니카토르(Nicator)라 [㈜ \’Nicanor\’사본의 정정. 서기의 실수는 고대. 12권. 3 : 1(119)와 18권. 9 : 8(372)에서 또한 발견됨. ] 불리는 셀류쿠스(Seleucus)가수리아를[㈜ 異文에는 \’앗수르의. \’] 점령한 때부티 계산하여 수리아 왕국(the SyrianKingdom)의 제 170년에 유대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 셀류키드 왕조 170년은 유대계산법으로는 주전 142년 4월에 시작되었다<참). 고대. 12권. 5 : 1(240) 각주>. 마카비 1서 13 : 34-40은 파르티아(Parthian)로 원정하기 전에 데메트리우스 Ⅱ세(Demetrius Ⅱ)가 유대인들에게 준 특권들을 다소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이 특권은 그들의 정치적인 독립의 인가를 제정한 것이다. 시몬(Simon)치하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주화에 대해서는 부록에 인용된 문헌들을 참고할 것. ] 그리하여 시몬에 대한 백성들의 경의는 아주 대단하였다. 그들은공적인 기록문서 뿐만 아니라 개인 상호간의 계약서까지도 연도(날짜)표기를 이렇게 하였다(유대인들의 은인이요 지배자인시몬의 통치 첫해부티[㈜ 사본의 관점에서 보면 \’in(안에. \’] 제 몇 년). [㈜ 참). 마카비 1서 13 : 42,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인 시온\’. 에트나크(Ethnarch)는 로마인들에 의해 후기 하스모네안(Hasmonaean)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참). 고대. 14권. 8 : 5(151), 10 : 2(191). ] 왜냐하면 그의 통치 아래서 그들은 최고로 번영하였으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異文에는 \’열방들(nations)\’이라고 되어 있음. ] 물리쳤기 때문이었다. [㈜ 묵시적인 책에 대한 요세푸스의 부연은 마카비 1서 13 : 42로써 끝나는데 이는 시몬(Simon)의 통치를 포함하여 세장 반이상의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와 이후의 시기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헬라적 자료(주로 다메섹의 니콜라스 : Nicolas of Damascus)에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이를 요세푸스가 그의 \’유대전쟁사\'<참). Thackery, \’Josephus\’ p. 86과 리키오티(Ricciotti), \’Introduzione\’pp. 140-143>에서의 논고. 요세푸스는 시몬(Simon)의 치세동안 모은 헬라적 자료만을 사용하는 것이 마카비 1서의 이야기를 메우려고 그것들로부터 계속하여 발췌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고 보는 듯 하다. ] 또한 시몬은 가자라(Gazara)[㈜ 마카비 1서 13 : 43에서처럼 \’가사(Gaza)\’라고 異文에 되어 있음<그러나 가자라(Gazara)로는 13 : 53에 나옴>. 전쟁. 1권. 2 :2(50)에도 가자라(Gazara)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정확하다. 그 장소에 대하여는 참). 고대. 12권. 7 : 4(308). 마카비 1서 13 : 53은 시몬(Simon)이 그의 아들 요한(John Hyrcanus)을 가자라(Gazara)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말해준다. ] 시와 욥바(Joppa), 그리고 얌네이아(Jamneia)시를 정복하였다. 그런 후 예루살렘의 성을 포위공격하여 성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왜냐하면 그 성채는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큰 (危害)를 가해왔으며 적들의 전진기지가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성채를 적들에게 제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수리아 수비대의 배제는 이야르(Iyyar), 대개 5월 23일로 거술러 올라간다(대략 5월임). 이는 마카비 1서 13 : 51과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나옴. ] 이사아과 같은 일들을 다 행한 이후에 시몬은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전을 그 성채가 있던 언덕 보다도 높게 하기 위하여 그 언덕마저도 평지와 같이 낮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을 모은 후에, 그들이 그 수비대와유대인 변절자들의 손에 얼마타 큰 고통을 겪었는가를 회상히키며 또한 만일 외국의 통치자가 다시금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하여 그곳에 수비대를 설치하게 된다면 그때 자신들이 겪어야 할고통들도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같이 행할 것을설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시몬은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익한가를 권고함으로써 백성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그 언덕을 평지와 같은 높이로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밤낮을쉬지 않고 일하기 시작했다. 3년이 꼬박 지난후에 그 언덕을 평지면과 같은 높이로 낮출 수 있었다. 그러자 성전은 다른 어느곳보다도 더 높게 되었다. 그 성채와 한때 그 성채가 세워져 있었던 그 언덕은 이제 무너지고 평지가 되어버렸다. 시몬의 시대에 이루어진 일중에서 특징적인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 시몬(Simon)이 그 언덕을 평탄케 하여 그위에 성채가 세워졌다라고 말하는 이 부분과 전쟁. 1권. 2 : 2(50)에서의 요세푸스의 진술들은 마카비 1서 14 : 37-시몬(Simon)이 그 성을 축조했다-의 내용과는 상충되고 있다. 하스모네안인들(Hasmonaeans)이 그 요새언덕을 평탄케했다고 말하는 전쟁. 5권. 4 : 1(139)에서의 요세푸스 진술이 더 정확하다. 참). 마지막 부분에 대한 택커래이(Thackeray)의 소고. ~~]

제 6 장
요나단이 음모에 빠져 살해된 것과, 그래서 유대인들이 시몬을 그들의 총 사령관과 대제사장으로 삼은 것과, 특히 트리폰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시몬의 용감성에 대하여
1. 왕권에 대한 트리폰의 열망과 요나단에 대한 그의 음모(마카비 1서 12 : 39)
한편 트리룬은 데메트리우스가 시도한 것이 그같이 끝났다는소식을 들고 안티오쿠스를 지원하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에 그는 안티오쿠스를 즉이고 자기가 왕관을 차지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요세푸스는 마카비 Ⅰ서 12 : 39를 부연하면서 파르티아(Parthlans)인이 데메투리우 스(Demetrlus)를 포획한 사건뒤에 트리폰(Tryphon)의 강탈사건을 기록한 것에 대해 아피안(Appian),’Syr. ‘ 67-68과 유스티누스(Jus- tinus) xxxvi. 1과 동의한다. 그 러나 주화가 밝혀 주듯이 마카비 1서 13 : 31, 41에 의해 지적되듯이 트리폰 (Tryphon)의 재위기간은 주전 142 흑은 1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참). 쉬러 (Schiirer) i . 172,’CAH’viii. 527에 있는 Bevan. ]. 그러나 이같은 계획에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안티오쿠스의 친구인 요나단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간은 이유로 인하여 그는 먼저 요나단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 안티오쿠스를 제거하리라 마음 먹였다. 그래서 트리폰은 요나단에게 속임수를 써서그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이 스구도볼리(Scythopolis)라고 부르는 벧산(Bethsan)으로[㈜ 현지명은 베이산(Belsfn), 참). 고대 5권. 1 : 22(83) 각주] 갔다. 요나단은 40,000명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그들과 함께 거기에서 트리폰과 만났다. 왜냐하면 그는 혹시 트리폰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트리폰은 요나단이 싸울 준비를 하고 온 것을 발견하고, 요나단에게 선물들과호의로 환심을 사려하였으며 자신의 관리들에게 요나단의 말에 복중하도록 명령 하였다. 왜냐하면 트리폰은 이같이 함으로써요나단에게 자신의 선의를 알게 하여 요나단으로 하여금 모든의심을 떨쳐 버리도록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이 의심했던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안심하여 그의 호위병을 떼어놓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트리폰(Tryphon)의 동기들은 마카비 1서의 이 부분에서 진술되지 않고 있음. ] 트리폰은 또한 요나단에게 그의 군대를 떠나보낼 것을 권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는 전쟁은 없으며 전역에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에 군대를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트리폰은 또 요나단에게, 톨레마이스를 그에게 넘겨주고 그 나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성채들도 그의 권세 아래 놓이게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들을데리고 톨레마이스로 오라고 그를 초청하였다. 그러면서 그는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2. 트리폰의 배반으로 요나단이 체포되다[마카비 1서 12:46)
요나단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트리폰이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진실하게 권고했음을 믿었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자신의 군대를 떠나보내고 오직 3,000명만 데리고 있었다. 그는 또 그들 중 2,000명을 갈릴리에 남겨 두고 오직 1,000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트리폰과 함께 톨레마이스로 갔다. 그러나 톨레마이스의 주민들은 모든 성문들을 닫았다(이것은 트리폰이 그들에게 미리 지시 놓은 것이다). [㈜ 이 중요한 설명은 마카비 1서에 빠져 있음. ] 그리고 그는[㈜ 마카비 1서은 “그들(they)”(톨레미의 거주민들)이라고 봄] 요나단만 살려두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 모두를 죽였다. 그는 또한 갈릴리 에 남아 있는 2,000명 마저 죽이려고 그들에게 군대를 보냈다. [㈜ 마카비 1서 12 : 49에는 “그리고 커다란(에스드라엘론의)평원”의 라는 구 절이 첨가되어 있음. ] 그러나 그들은 요나단과 그와 같이 간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모두 무기를 들고 자신의신변을 보호하면서 트리폰이 보낸 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빠져 나와 결사 항전의 준비를 마쳤다. 그들을 처치하라고 트리폰이 보낸 군사들은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 떠 한 방법으로도 그들을 괴롭히 못하고 트리폰에게로 되돌아갔다.
3. 요나단이 붙잡힌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낙담하다(마카비 1서 12 : 52]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요나단이 붙잡혔다는 소식과 그와 함께간 모든 군사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도 요나단이 쓰러지게 된 운명을 슬퍼하였으며 영웅 하나를 잃었음을 몹시 아쉬워하였다. 그와 동시에 자연적으로 커다란 두려움이 그들에게로 엄습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두려워한 이유는, 자신들이 요나단의 용기와 지혜를 모두 잃게 되었으므로 자신들에게 냉담해져 있었으나 오직 요나단 때문에 그대로 있었던 주위의 나라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들고 일어서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하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어 가장 극심한 위험들을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사실 쳐들어오는 적들을 쓰러뜨릴 수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외국나라들이 그들에게는 이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이려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트리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또한 유대로 쳐들어가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이 기 위하여 군사를 모았다.
4. 유대인들이 시몬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다[마카비 1서 13 : 7]
시몬은 이러한 연설을 함으로써 군중들에게 용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었던 백성들은 이제 정신을 차리 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 하여 모든 백성들은 함 목소리로 시몬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그는 또 자신들 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그의 형 유다와 요나단의 지위를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들은 시몬이 무슨 명령을하든지 간에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말하였다. [㈜ 유대지도자로서 시몬(Simon)의 선출은 마카비 1서 13 : 41이하, 14 . 27에 의하면 주전 143-142년인 셀류키드 왕조 170년에 있었다. 고대 13권. 6 : 6(212).] 그후 시몬은 자기 자신의 군사중에서 싸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즉각 소집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그 도시의 성벽들을 재건하였다. 시몬은 매우 높고 견고한 망대들을 세워 도시를 안전하게 만든 후에, 자기의 친구들 중 하나인 압살롬(Absa10m)의 아들[㈜ 몇몇 주석가들은 그를 압살롬(Absalom)과 동일시하는데 그의 아들 마타디아스(Mattathias)는 요나단(Jonathan)의 신복중의 하나였다. 참). 위의 고대. 13권. 5 : 7(161) (마카비 1서 11 : 70). ]요나단에게군대를 이끌고 욥바로 갈 것을 명하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그곳주민들을 쫓아낼 것을 지시하였다. 왜냐하면 시몬은 그들이 그도시를 트리폰에게 내어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이러한 동기는 마카비 1서에 진술되지 않음. ] 시몬자신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하여 그대로 남아있었다. [㈜ 마카비 1서 13 : 11도 요세푸스와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그리고 그(압살롬의 아들 요나단)가 거기(욥바, Joppa)에 있는 그 성읍에 주둔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
5. 유대인들에 대한 트리폰의 배반[마카비 1서 13 : 12]
그러는 동안 트리폰은 큰 군대를 이끌고 톨레마이스에서 진군하여 유대로 왔는데 그는 또한 요나단을 포로로 끌고 왔다. 그래서 시몬도 군대를 이끌고 아디다(Addida)[㈜ 지금의 엘-하디테 (el-Hadithe)로 아벨(Abel),’GP. ‘ii : 340에 따르면 룻다 (Lydda) 북동쪽 약 4마일 떨어진 곳이다. ]시에서 그와 만났다. 그 시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아래로 유대의 평지들이 놓여 있었다. 트리폰은 시몬이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시몬을 속이고 배반하여 더 쉽게 붙잡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일 형 요나단이 풀려나기를 원한다면 은 100달란트와요나단이 풀려났을 때 그가 유대로 하여금 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요나단의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달라는 말을 시몬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동시에 요나단이 계속 감금되고 있는 이유는 요나단이 왕에게 빌렸다가 아직도 갚지 않은 돈 때문이라는 말을 전달하였다. [㈜ 마카비 1서 13 : 15, “네 동생 요나단(Jonathan)은 그 직책상 왕의 금고에 돈을 바쳐야 하는데 그 돈 때문에 우리에게 붙잡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관리” creiva”라는 단어를 “빛”(debts)이라는 다른 의미로 취하고 있다. 마카비 1서에 나타나는 암시는 셀류키드왕의 가신으로 요나단(Jonathan)으로부터 요구되어진 조공에 관한 것이다. 참), 고대. 13권. 4 : 9(125) (마카비 1서 11 : 28). ] 시몬은 트리폰의 교활한 속임수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트리폰에게 주는 돈은 . 찾지 못할 것이며 형도 풀려나지 못하리라는 것과 나아가 형의 아들들도 적에게 건네주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몬은, 만일 자기가 트리폰에 게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주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자기가 형을 죽인 것이라고 비난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한데 모아 그들에게 트리폰의 제안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그는 ‘트리폰의 제안은 속임수요 음모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트리폰의 제안을 거절하여 마치 내가 형을 구원하지 않은 것처럼 비난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그에게 보내는 편이 더 낫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 요세푸스는 시몬이 자신의 군대를 자문하는 세부묘사를 조작한다. 그리고 마카비 1서 13 : 17-18의 두 구절을 크게 부연하는데, 이 두 구절은 트리폰 (Tryphon)에 대한 시몬(Simon)의 의심을 묘사한다. ] 이리하여 시몬은 돈뿐만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들도 보냈다. 그러나 트리폰은, 돈과 요나단의 아들들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요나단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유대 전국으로 행군하였다. 이두매 (Idumaea)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올라가리라고 결심한 트리폰은,[㈜ 예루살렘에 대한 트리폰(Tryphon)의 계획은 마카비 1서 13 : 20의 “길을 돌아갔다(ejkuvklwsn oJdovn) “란 단어로부터 요세푸스에 의해 추론되어진다.] 마침내 이두매 안에 있는 시(市)인 아도라(Adora)에[㈜ 요세푸스의 사본에 기록된 도라(Dora)에 대한 마카비 1서의 추측된 형태(요세푸스 는 유사한 실수에 대하여 아피온(Apion)에 의해 인용되어진 므낫세(Mnaseas)를 비 판한다) 참). 아피 2권. 9(116). 아도라(Adorn)는성경적으로 아도라임 (Adoraim)이 며, 지금의 두라(Dura)로 유대(Judaea)와 이두매(Idumaea)사이의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헤브론(Hebron) 남서쪽 5마일 떨어진 곳이다. ] 도착했다. 그러나 시몬은 항상 트리폰과 반대편에 진을 치면서, 자기 군대 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행군하였다.
6. 요나단이 트리폰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마카비 1서 13 : 21]
그 성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램의 아크라(Akra)에 있는 수리아 수비대와 유대교로 개종한 배교자들. ] 트리폰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자신들에게 와줄 것과 식 량을 보내 줄 것을 그에 게 요청하였을 때, 트리폰은 바로 그날 밤에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여 기병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그때 폭설이 내려 모든 길을 온통 뒤덮었으며 노상에 높게 쌓였다. [㈜ 이 눈보라에 대 한 회화적 묘사는 요세푸스에 의해 첨가되어 짐. ] 그리하여 그길로 지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특히 말을 타고는 더욱 지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트리론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트리폰은 아도라에서 떠났다. 그는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에[㈜ 여기서 “코엘레수리아”(Coele Syria)는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을 포함하고 있 다. 참). 고대. 11권. 2 : 1(25). ]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갈라디티스(Galaaditis)로 침입해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요나단을 죽인후[㈜ 바스카마(Bascama)의 성읍에서, 다음 각주를 볼 것. ] 그를 매장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안디옥으로돌아갔다. 그러자 시몬은 바스카(Basca)[㈜ 바스카마(Baskamav )로 마카비 1서에 나와있음. 이곳은 갈릴리(Galilee)호수 북동쪽 지금의 텔 바죽(Gell B’z’k)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베베노(Beveno시)에 의해 주장되어 있다. 이 주장은 바스카마(Bascama)라고 추정되어진 어원에 근거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엘-굼메이즈(el-Gummeize : 무화과나무)라고 주장하는 아벨(Abel)의 ‘GP’ ii : 261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 시로 사람을 보내자기 형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의 시신을그의 출생지인 모데이(Modeei)에서[㈜ 성경에는 모딘(Modin), 참). 고대. 12권. 6 : 1(265) 각주. ] 장사지냈다. 그러는 동안 모든 백성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시몬은 또한 자기의 아버지와 형들을 위하여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거대한 기념비를 제작하여 그것을 눈에 잘 띄는 높은 곳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주위에는 주랑(柱廊) 현관들을 만들어 놓았고, 또 보기에도 훌륭한 돌 하나로 이루어진 기둥들을 세워놓았다. [㈜ 마카비 1서는 그 회랑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음. 한편으로 요세푸스도 갑옷과 그 기념물의 조각된 배들을 빠뜨리고 있다. 건축술에 대해서는 Watzinger, Denkmaler, ii : 22를 볼 것. 또한 ‘JHS’59(1939), 125-126에 있는 W. W. Tarn을 볼 것. ] 이러한 것들외에 그는 자신의 부모와ㅏ 형제들을 위하여 각각 한개씩 일곱 개의 피라밋을 세웠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 경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왔다. 시몬이 요나단을 장사지내고 가족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데서 보여주었던 열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서 죽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4년 동안 유대의 통치자로 있어 왔다. [㈜ 고대. 20권. 10 L 3(238)에서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으로서 요나단(Jonathan)의 재위기간을 7년으로 본다. 그러나 정확한 연수는 10년이다. 요나단은 주전 143년 혹은 142년에 죽었다<참). 고대. 13권. 6 : 4(201)>. 그리고 주전 152년<참). 고대. 13권. 2 : 3(46)과 마카비 1서 10 : 21>에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재위기간은 10년이다.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고대. 20권. 에서처럼 부주의 했든지 혹은 서기의 잘못이 있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아마 라이나흐(Reinnach)의 주장대로 hevssara”는 원문이 devka(10)의 축약인 수를 나타내는 문자 d v의 확장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것들이 그가 죽을 때의 상황이었다.
7. 시몬이 유대를 셀류키드(Seleucid)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다[참). 마카비 1서 13 : 36]
시몬은 전(全)주민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선출된 이후, 자신이 대제사장직에 오른 첫 해에 마게도냐인들의 노예 상태에 있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마게도냐인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자유와 공물로부터의면제는, 니카토르(Nicator)라 [㈜ ‘Nicanor’사본의 정정. 서기의 실수는 고대. 12권. 3 : 1(119)와 18권. 9 : 8(372)에서 또한 발견됨. ] 불리는 셀류쿠스(Seleucus)가수리아를[㈜ 異文에는 ‘앗수르의. ‘] 점령한 때부티 계산하여 수리아 왕국(the SyrianKingdom)의 제 170년에 유대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 셀류키드 왕조 170년은 유대계산법으로는 주전 142년 4월에 시작되었다<참). 고대. 12권. 5 : 1(240) 각주>. 마카비 1서 13 : 34-40은 파르티아(Parthian)로 원정하기 전에 데메트리우스 Ⅱ세(Demetrius Ⅱ)가 유대인들에게 준 특권들을 다소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이 특권은 그들의 정치적인 독립의 인가를 제정한 것이다. 시몬(Simon)치하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주화에 대해서는 부록에 인용된 문헌들을 참고할 것. ] 그리하여 시몬에 대한 백성들의 경의는 아주 대단하였다. 그들은공적인 기록문서 뿐만 아니라 개인 상호간의 계약서까지도 연도(날짜)표기를 이렇게 하였다(유대인들의 은인이요 지배자인시몬의 통치 첫해부티[㈜ 사본의 관점에서 보면 ‘in(안에. ‘] 제 몇 년). [㈜ 참). 마카비 1서 13 : 42,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인 시온’. 에트나크(Ethnarch)는 로마인들에 의해 후기 하스모네안(Hasmonaean)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참). 고대. 14권. 8 : 5(151), 10 : 2(191). ] 왜냐하면 그의 통치 아래서 그들은 최고로 번영하였으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異文에는 ‘열방들(nations)’이라고 되어 있음. ] 물리쳤기 때문이었다. [㈜ 묵시적인 책에 대한 요세푸스의 부연은 마카비 1서 13 : 42로써 끝나는데 이는 시몬(Simon)의 통치를 포함하여 세장 반이상의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와 이후의 시기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헬라적 자료(주로 다메섹의 니콜라스 : Nicolas of Damascus)에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이를 요세푸스가 그의 ‘유대전쟁사’<참). Thackery, 'Josephus' p. 86과 리키오티(Ricciotti), 'Introduzione'pp. 140-143>에서의 논고. 요세푸스는 시몬(Simon)의 치세동안 모은 헬라적 자료만을 사용하는 것이 마카비 1서의 이야기를 메우려고 그것들로부터 계속하여 발췌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고 보는 듯 하다. ] 또한 시몬은 가자라(Gazara)[㈜ 마카비 1서 13 : 43에서처럼 ‘가사(Gaza)’라고 異文에 되어 있음<그러나 가자라(Gazara)로는 13 : 53에 나옴>. 전쟁. 1권. 2 :2(50)에도 가자라(Gazara)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정확하다. 그 장소에 대하여는 참). 고대. 12권. 7 : 4(308). 마카비 1서 13 : 53은 시몬(Simon)이 그의 아들 요한(John Hyrcanus)을 가자라(Gazara)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말해준다. ] 시와 욥바(Joppa), 그리고 얌네이아(Jamneia)시를 정복하였다. 그런 후 예루살렘의 성을 포위공격하여 성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왜냐하면 그 성채는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큰 (危害)를 가해왔으며 적들의 전진기지가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성채를 적들에게 제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수리아 수비대의 배제는 이야르(Iyyar), 대개 5월 23일로 거술러 올라간다(대략 5월임). 이는 마카비 1서 13 : 51과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나옴. ] 이사아과 같은 일들을 다 행한 이후에 시몬은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전을 그 성채가 있던 언덕 보다도 높게 하기 위하여 그 언덕마저도 평지와 같이 낮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을 모은 후에, 그들이 그 수비대와유대인 변절자들의 손에 얼마타 큰 고통을 겪었는가를 회상히키며 또한 만일 외국의 통치자가 다시금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하여 그곳에 수비대를 설치하게 된다면 그때 자신들이 겪어야 할고통들도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같이 행할 것을설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시몬은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익한가를 권고함으로써 백성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그 언덕을 평지와 같은 높이로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밤낮을쉬지 않고 일하기 시작했다. 3년이 꼬박 지난후에 그 언덕을 평지면과 같은 높이로 낮출 수 있었다. 그러자 성전은 다른 어느곳보다도 더 높게 되었다. 그 성채와 한때 그 성채가 세워져 있었던 그 언덕은 이제 무너지고 평지가 되어버렸다. 시몬의 시대에 이루어진 일중에서 특징적인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 시몬(Simon)이 그 언덕을 평탄케 하여 그위에 성채가 세워졌다라고 말하는 이 부분과 전쟁. 1권. 2 : 2(50)에서의 요세푸스의 진술들은 마카비 1서 14 : 37-시몬(Simon)이 그 성을 축조했다-의 내용과는 상충되고 있다. 하스모네안인들(Hasmonaeans)이 그 요새언덕을 평탄케했다고 말하는 전쟁. 5권. 4 : 1(139)에서의 요세푸스 진술이 더 정확하다. 참). 마지막 부분에 대한 택커래이(Thackeray)의 소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