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시몬이 안티오쿠스 피우스와 동맹하여 트리폰과 싸우고, 조금 후에는 안티오쿠스의 군대 사령관 켄데바이우스와 싸우게 되었는지, 또한 그의 사위인 톨레미의 음모에 빠져 살해된 것에 대하여
1. 트리폰이 안티오쿠스 Ⅵ세를 죽이고 그 왕좌를 차지하다
데메트리우스가 붙잡힌지 오래되지 않아,[㈜ 트리폰(Tryphon)의 강탈 사건이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포로사건보다 선행해 있다. 참). 고대. 13권. 6 : 1(187). ] 알렉산더의 아들인 데오스(Theo니)라고[㈜ 그의 왕국 명칭에 대하여 고대. 13권. 5 : 1(131)을 볼 것. ] 불리는 안티오쿠스의 후견인으로 활동해 온 트리폰은 안티오쿠스를 그가 통치한지 4년만에 죽였다. [㈜ 주전 145에서 142까지임. 그는 7세에 죽었다. 참). Bevan \’H. Sel\’. ii : 230 각주 4. ] 그리고는 군의(軍醫)가 안티오쿠스를 죽였다고 발표하였다. [㈜ 다른 사본에는 \’방종이 과도하여 죽었다\’라고 되어 있음. 추측된 異文에는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로 되어 있음. 유사한 이야기가 리비(Livy)의 \’Epit. \’ 1v에 언급됨. 다른 자료들인 마카비 1서 13 : 31과 디오도루스(Diodorus) xxxiii : 28, 아피안(Appian)\’Syr. \’ 68과 유스티누스(Justinus) xxxvi. 1. 7들은 어떻게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살해되었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 그리고 트리폰은 자기 친구들을 군사들 가운데로 보내어 만일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다면 그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또 데메트리우스는 파르티아인들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만일 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가[㈜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 Sidetes) 참). 고대. 13권. 7 : 1(222). ] 그 왕군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반역에 대한보복으로 모진 고통을 가할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의향을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만일 그 왕권이 트리폰에게 주어진다면, 자신들은 편히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트리폰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트리폰은 그 왕좌의 주인이 되자마자 자신의 교활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기 위하여 대중들의 환심을 샀고, 또 온유한 성품을 지닌 체 하였다. 그러나 그가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트리폰의 자신의 본색을 드러냄에 따라 그의 적들은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왜냐하면 트리폰을 싫어하는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데메트리우스의 부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로[㈜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의 딸과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의 전(前) 부인, 차마). 고대. 13권. 4 : 1(80)/] 갔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셀류키아(Seleucia)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테르(Soter)라[㈜ 참). 고대. 13권. 8 : 2(244)와 고대. 7권. 15 : 3(393)에서 요세푸스는 그를 안티오쿠스 유세베스(antiochus Eusebes)로 부른다. 유세베스나 소테르<Soter, 이 이름은 데메트리우스 I 세의 성(姓)이었다>라는 이름은 안티오쿠스 Ⅶ 세의 성(姓)으로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인 성(姓)은 유에르게테스(Euergetes)이고 그의 보통 이름은 시데테스(Sidetes)이다<그가 자라난 밤빌리아(Pamphilia)의 시데(Side)성읍 출신임>. ] 불리는 데메트리우스의 형제 안티오쿠스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트리폰의 요구로 인해 어느 도시에서도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티오쿠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와서 자기와 결혼하여 왕좌를 차지해 줄것을 그에게 청하였다. [㈜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Ⅵ세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세번째 남편이 되었다 참). 고대. 13권. 7\’1 (221). ]그녀가 이러한 기간에 안티오쿠스에게 청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친구들이 그같이 행하도록 그녀를 설득하였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는 셀류키아의 몇몇의 백성들이 그 시(市)를 트리폰에게 넘겨 주는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었다.
2. 데메트리우스 ll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가 시몬과 동맹을 맺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는 셀류키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매일같이 힘을 키워나갔다. 힘을 키운 후 그는 트리폰 전쟁을 벌이기위하여 출병하였다. 트리폰은 안티오쿠스에게 패하여 상부 수리아(Upper Syria)에서부티 베니게 (Phoenicia)로 쫒겨 갔다 안티오쿠스는 그곳까지 그를 추격하였다. [㈜ 시몬(Simon)에게 보내어진 안티오쿠스의 편지는 마카비 1서 15 : 1-9에 인용되어 있음. 트리폰(Tryphon)이 도라(Dora)에게로 도망하는 기사도 11절에 언급되어 있음. ] 그리고 트리폰이 공략하기가 어려운 요새인 도라(Dora)로 피하였지만 거기서 그를포위 공격하였다. 안티오쿠스는또한특사들을 유대인의 대제사장인 시몬에게 보내어 우호동맹을 제안하였다. 시몬은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도라를 공격하고 있는 안티오쿠스의 군사들에게 막대한 양의 돈과 식량을 아낌없이 공급해 주었다. 그결과 시몬은 순식간에 그의 친밀한 친구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마카비 1서 15 26-31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는 시몬(Slmon)의 도움을 거절했고, 그들의 동맹을 끊었으며 욥바(Joppa)와 가사(Gaza)의 반환 흑은 배상금과 조공을 요구했다. ] 한편 트리폰은 도라에서 아파메아(Apamea)로 도망쳤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 포위 당한 끝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이 것은 그가 3년을 통치 한 후의 일 이 었다. [㈜ 더 정확하게는 4년 주화시기에 의하여 볼 때 주전 142에서 138년까지. 참). \’CAH\’에 있는 Bevan 8 : 527]
3. 안티오쿠스 시데레스가 유대인들을 배반하다
[㈜ 안티오쿠스 Ⅶ세와 시몬 사이의 전쟁은 마카비 1서 15 : 38-16 : 10에 더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고대사\’ 에서 이 시점으로부터 \’고대사\’와\’ 전쟁사\’의 병행관계가 시작된다. 요세푸스는 \’고대사\’의 이 부분을 쓰면서 같은 자료들(주로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그리고 스트라보(Strabo) )를 사용한다. 이 것들을 그는 \’전쟁사\’ 1. 2를 쓰는데 사용했지만 단어를 변형시킴으로 어떤 것들을 수정하고 조심스럽게 몇 개를 첨가시켰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불성실한 안티오쿠스는 시몬이 필요할 때 자신에게 제공하여 주었던 그 도움들을 잊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친구들 중 하나인 켄데바이우스(Cendebaeus)에게 일군의 군사들을 주어 그에게 유대를 약탈하고 시몬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몬은 이러한 안티오쿠스의 배신행위에 대해 들었을 때, 비록 그가 이제는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안티오쿠스로부터 받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 몹시 화가 났다. 그리하여 이전 보다도 더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하게 된 그는, 마치 청년처럼그 전쟁을 지휘하였다. [㈜ 마카비 1서 16 : 3에 따르면 시몬(Simon)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을 했다 그러나 4-7절의 구절들은 쉽게 대명사의 주격이 시몬(Simon)임을 추측케 해준다(루키안 수정본(Luc. )은 요하네느 Johannes=John이 라는 이름을 첨가한다). ]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유다(Judas)와 요한(John) , 참) . 마카비 1서 16 ; 2. ] 가장 용맹한군사들과 함께 맨 앞에 서게 했다. [㈜ 다른 본문에는 \”그의 아들을 내 보냈다\”라고 되어 있음. ] 반면에 그 자신은 자신의한대를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 異文에는 \”가까이 왔다\”라고 되어 있음] 그리고는 그 중 많은 군사들을 산중의 협곡에 매복시켰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단 한번의 전투도 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 중요한 계약은 케드른(Cedron)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의 카프라(Qafra)로 아소도(Azotus)의 북동쪽 약 6마일 떨어진 곳이다] 시몬은 그 적들을곳곳에서 패퇴시킨 후, 그의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보냈다. 그는또한 로마와도 동맹을 맺 었다. [㈜ 동맹에 대한 설명은 마카비 1서 15 : 16-24에 주어져 있다. ]
4. 시몬은 그의 사위인 틀레미의 배반으로 죽임을 당하다
시몬은 8년 동안 유대인들 위에사 통치하였다[㈜ 주전 142에서 135년까지임. 마카비 1서 16 : 14에 의하면 시몬(Simon)은 셀류키드 177년의 11월 쉐바트(Shebat) 즉 주전 135년 2월에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는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사위인 톨레미가 꾸민 흉계 때문이었다. 그 당시 톨레미는 시몬의 아내와 두 아들을[㈜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유다(Judas).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살해되었다. 참). 고대. 13권. 8 : 1(235). 마카비 1서 16장 19절은 그 아들들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그들의 어머니에 대 한 언급은 없다. ] 붙잡아 감금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의 세째 아들인 힐카누스(Myrcanus)라고도 불리는 요한(John)을 죽이기 위하여 자객을 보냈다. [㈜ 그는 마카비 1서 16장에 따르면 가자라(Gagara)에 있었으며 이 구절은 이 부분에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대한 설명을 끝낸다. ] 그러나 젊은 요한은 자객들이 온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위험을 피해 그 도시로[㈜ 예루살렘을 의미 함. ] 서둘러 갔다.왜냐하면 그는 그(예루살렘) 백성들이 자기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과 톨레미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자기를 도와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톨레미도 또한 다른 성문을 통하여 그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 주민들은 그를 몰아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힐카누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제 7 장
시몬이 안티오쿠스 피우스와 동맹하여 트리폰과 싸우고, 조금 후에는 안티오쿠스의 군대 사령관 켄데바이우스와 싸우게 되었는지, 또한 그의 사위인 톨레미의 음모에 빠져 살해된 것에 대하여
1. 트리폰이 안티오쿠스 Ⅵ세를 죽이고 그 왕좌를 차지하다
데메트리우스가 붙잡힌지 오래되지 않아,[㈜ 트리폰(Tryphon)의 강탈 사건이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포로사건보다 선행해 있다. 참). 고대. 13권. 6 : 1(187). ] 알렉산더의 아들인 데오스(Theo니)라고[㈜ 그의 왕국 명칭에 대하여 고대. 13권. 5 : 1(131)을 볼 것. ] 불리는 안티오쿠스의 후견인으로 활동해 온 트리폰은 안티오쿠스를 그가 통치한지 4년만에 죽였다. [㈜ 주전 145에서 142까지임. 그는 7세에 죽었다. 참). Bevan ‘H. Sel’. ii : 230 각주 4. ] 그리고는 군의(軍醫)가 안티오쿠스를 죽였다고 발표하였다. [㈜ 다른 사본에는 ‘방종이 과도하여 죽었다’라고 되어 있음. 추측된 異文에는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로 되어 있음. 유사한 이야기가 리비(Livy)의 ‘Epit. ‘ 1v에 언급됨. 다른 자료들인 마카비 1서 13 : 31과 디오도루스(Diodorus) xxxiii : 28, 아피안(Appian)’Syr. ‘ 68과 유스티누스(Justinus) xxxvi. 1. 7들은 어떻게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살해되었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 그리고 트리폰은 자기 친구들을 군사들 가운데로 보내어 만일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다면 그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또 데메트리우스는 파르티아인들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만일 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가[㈜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 Sidetes) 참). 고대. 13권. 7 : 1(222). ] 그 왕군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반역에 대한보복으로 모진 고통을 가할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의향을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만일 그 왕권이 트리폰에게 주어진다면, 자신들은 편히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트리폰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트리폰은 그 왕좌의 주인이 되자마자 자신의 교활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기 위하여 대중들의 환심을 샀고, 또 온유한 성품을 지닌 체 하였다. 그러나 그가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트리폰의 자신의 본색을 드러냄에 따라 그의 적들은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왜냐하면 트리폰을 싫어하는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데메트리우스의 부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로[㈜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의 딸과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의 전(前) 부인, 차마). 고대. 13권. 4 : 1(80)/] 갔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셀류키아(Seleucia)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테르(Soter)라[㈜ 참). 고대. 13권. 8 : 2(244)와 고대. 7권. 15 : 3(393)에서 요세푸스는 그를 안티오쿠스 유세베스(antiochus Eusebes)로 부른다. 유세베스나 소테르라는 이름은 안티오쿠스 Ⅶ 세의 성(姓)으로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인 성(姓)은 유에르게테스(Euergetes)이고 그의 보통 이름은 시데테스(Sidetes)이다<그가 자라난 밤빌리아(Pamphilia)의 시데(Side)성읍 출신임>. ] 불리는 데메트리우스의 형제 안티오쿠스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트리폰의 요구로 인해 어느 도시에서도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티오쿠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와서 자기와 결혼하여 왕좌를 차지해 줄것을 그에게 청하였다. [㈜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Ⅵ세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세번째 남편이 되었다 참). 고대. 13권. 7’1 (221). ]그녀가 이러한 기간에 안티오쿠스에게 청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친구들이 그같이 행하도록 그녀를 설득하였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는 셀류키아의 몇몇의 백성들이 그 시(市)를 트리폰에게 넘겨 주는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었다.
2. 데메트리우스 ll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가 시몬과 동맹을 맺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는 셀류키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매일같이 힘을 키워나갔다. 힘을 키운 후 그는 트리폰 전쟁을 벌이기위하여 출병하였다. 트리폰은 안티오쿠스에게 패하여 상부 수리아(Upper Syria)에서부티 베니게 (Phoenicia)로 쫒겨 갔다 안티오쿠스는 그곳까지 그를 추격하였다. [㈜ 시몬(Simon)에게 보내어진 안티오쿠스의 편지는 마카비 1서 15 : 1-9에 인용되어 있음. 트리폰(Tryphon)이 도라(Dora)에게로 도망하는 기사도 11절에 언급되어 있음. ] 그리고 트리폰이 공략하기가 어려운 요새인 도라(Dora)로 피하였지만 거기서 그를포위 공격하였다. 안티오쿠스는또한특사들을 유대인의 대제사장인 시몬에게 보내어 우호동맹을 제안하였다. 시몬은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도라를 공격하고 있는 안티오쿠스의 군사들에게 막대한 양의 돈과 식량을 아낌없이 공급해 주었다. 그결과 시몬은 순식간에 그의 친밀한 친구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마카비 1서 15 26-31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는 시몬(Slmon)의 도움을 거절했고, 그들의 동맹을 끊었으며 욥바(Joppa)와 가사(Gaza)의 반환 흑은 배상금과 조공을 요구했다. ] 한편 트리폰은 도라에서 아파메아(Apamea)로 도망쳤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 포위 당한 끝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이 것은 그가 3년을 통치 한 후의 일 이 었다. [㈜ 더 정확하게는 4년 주화시기에 의하여 볼 때 주전 142에서 138년까지. 참). ‘CAH’에 있는 Bevan 8 : 527]
3. 안티오쿠스 시데레스가 유대인들을 배반하다
[㈜ 안티오쿠스 Ⅶ세와 시몬 사이의 전쟁은 마카비 1서 15 : 38-16 : 10에 더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고대사’ 에서 이 시점으로부터 ‘고대사’와’ 전쟁사’의 병행관계가 시작된다. 요세푸스는 ‘고대사’의 이 부분을 쓰면서 같은 자료들(주로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그리고 스트라보(Strabo) )를 사용한다. 이 것들을 그는 ‘전쟁사’ 1. 2를 쓰는데 사용했지만 단어를 변형시킴으로 어떤 것들을 수정하고 조심스럽게 몇 개를 첨가시켰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불성실한 안티오쿠스는 시몬이 필요할 때 자신에게 제공하여 주었던 그 도움들을 잊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친구들 중 하나인 켄데바이우스(Cendebaeus)에게 일군의 군사들을 주어 그에게 유대를 약탈하고 시몬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몬은 이러한 안티오쿠스의 배신행위에 대해 들었을 때, 비록 그가 이제는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안티오쿠스로부터 받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 몹시 화가 났다. 그리하여 이전 보다도 더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하게 된 그는, 마치 청년처럼그 전쟁을 지휘하였다. [㈜ 마카비 1서 16 : 3에 따르면 시몬(Simon)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을 했다 그러나 4-7절의 구절들은 쉽게 대명사의 주격이 시몬(Simon)임을 추측케 해준다(루키안 수정본(Luc. )은 요하네느 Johannes=John이 라는 이름을 첨가한다). ]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유다(Judas)와 요한(John) , 참) . 마카비 1서 16 ; 2. ] 가장 용맹한군사들과 함께 맨 앞에 서게 했다. [㈜ 다른 본문에는 “그의 아들을 내 보냈다”라고 되어 있음. ] 반면에 그 자신은 자신의한대를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 異文에는 “가까이 왔다”라고 되어 있음] 그리고는 그 중 많은 군사들을 산중의 협곡에 매복시켰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단 한번의 전투도 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 중요한 계약은 케드른(Cedron)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의 카프라(Qafra)로 아소도(Azotus)의 북동쪽 약 6마일 떨어진 곳이다] 시몬은 그 적들을곳곳에서 패퇴시킨 후, 그의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보냈다. 그는또한 로마와도 동맹을 맺 었다. [㈜ 동맹에 대한 설명은 마카비 1서 15 : 16-24에 주어져 있다. ]
4. 시몬은 그의 사위인 틀레미의 배반으로 죽임을 당하다
시몬은 8년 동안 유대인들 위에사 통치하였다[㈜ 주전 142에서 135년까지임. 마카비 1서 16 : 14에 의하면 시몬(Simon)은 셀류키드 177년의 11월 쉐바트(Shebat) 즉 주전 135년 2월에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는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사위인 톨레미가 꾸민 흉계 때문이었다. 그 당시 톨레미는 시몬의 아내와 두 아들을[㈜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유다(Judas).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살해되었다. 참). 고대. 13권. 8 : 1(235). 마카비 1서 16장 19절은 그 아들들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그들의 어머니에 대 한 언급은 없다. ] 붙잡아 감금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의 세째 아들인 힐카누스(Myrcanus)라고도 불리는 요한(John)을 죽이기 위하여 자객을 보냈다. [㈜ 그는 마카비 1서 16장에 따르면 가자라(Gagara)에 있었으며 이 구절은 이 부분에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대한 설명을 끝낸다. ] 그러나 젊은 요한은 자객들이 온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위험을 피해 그 도시로[㈜ 예루살렘을 의미 함. ] 서둘러 갔다.왜냐하면 그는 그(예루살렘) 백성들이 자기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과 톨레미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자기를 도와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톨레미도 또한 다른 성문을 통하여 그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 주민들은 그를 몰아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힐카누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